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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Feb 25. 2024

테메큘라 (Temecula, California)

집돌이, 집순이의 Day Trip

격동의 12월과 1월을 보내고 이제야 한숨 돌려 본다.


집이라면 여행이나 출장 후 잠시 쉬어가는 공간 쯤으로 여기고 살았던 우리들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Home이란 '공간과 몸이 하나가 되어 안에서 하루 종일 뒹굴어도 지루하지 않고 그저 편하기만 한 그런 곳'이구나 새삼 알아 가는 것 같다.


집 안 곳곳을 둘러보며 여기는 이렇게 고쳐 볼까 저기에는 이런 걸 해 볼까... 마치 성형 중독자가 거울을 보며 여기를 고칠까 저기를 고칠까, 보톡스를 맞을까 필러를 주입할까 하는 거 마냥 집을 성형해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퇴한 두 사람이 딱히 정해진 스케줄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떠질 때까지 자다가 아침에 깨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다. 낮에 심심해지면 다른 Suburbian(교외 거주자)에 섞여 대형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고 Home Depot에서 물건을 구경하며 한두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10시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자 남편이 한참 기다렸던 듯 다소 쌩뚱맞게 Temecula day trip을 제안한다.

"뭐? 어디. 뭔 큘라?거기에 뭐 있는데?"

"어...음...다시 생각해 보니 귀찮다. 그냥 집에 있자."

"얼마나 걸리는데?"

"한 시간 좀 넘게 걸려."

창 밖을 보니 하늘이 높고 햇빛도 따뜻해 보인다.

"가 보자. 날씨도 좋은데."


"WoW, We're going to Te --- Me --- Cu --- La"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놀리 듯 테.. 메... 큘... 라 ㅋㅋㅋ 테 메 큐 울 라 ~~ ㅎㅎ 하며 별다른 준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출발했다.



미국판 7080 라디오 방송인 The Bridge에 채널을 고정하고 이글스와 엘튼 존, 아메리카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집에서 고작 20마일이나 왔을까.

벌써 길을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 집에 콕 박혀 지척에 있는 대 자연의 모습을 놓치고 있었구나.'

왼쪽에 보이는 산의 모습과 오른쪽에 펼쳐진 산의 모습이 다르고, 가까이 있는 산은 멀리 있는 산과 또 다르다.


'저기 아직 눈이 쌓여 있네.'

'저 산 좀 봐. 이끼가 이불처럼 덮여 있어.'

'와, 저기 저 산은 한국에 있는 산 같아. 어쩜 저렇게 비슷하지?'

지구라는 별에 처음 온 외계인들인지, 덤 앤 더머인지.

그나마 둘이 꿍짝이 맞아서 다행이다.

주거니 받거니 다소 원초적인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따뜻한 해를 만끽하며 테메큘라 가는 길. 먼 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다


Temecula,

캘리포니아 남부에 살던 Luiseño Indian어로

where the sun shines through the mist.”라는 뜻을 가진 도시.

이런 아름다운 의미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을 존재조차 몰랐단 그 언어에 감탄사가 나온다.


Temecula에 vineyard도 있고 이런저런 좋은 데 많다지만.

"우리는 우리답게 맛집에 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맛집 리스트를 찾아 1909목적지로 정했다.


Temecula old town으로 들어서자

'음? 뭐지? 왠지 가짜의 냄새가 진동하는 걸?'

1800년 대 골드러시 당시의 건물을 잘 보존해 둔 것으로 유명하다는데 첫 느낌은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 사람의 손이 많이 거쳐간 인공(工)의 타운 같은 느낌이다.


주차를 하고 원래는 전당포로 쓰였다는 은행 건물, 여전히 총자국이 남아 있는 옛 saloon, 1800년 지어진 목조 건물을 구경하며 Old Town을 한 바퀴 돌다보니 '잘 보존했네'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삐딱하니 다가온 이 곳의 시시한 첫 느낌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 파손된 건물을 재건하면서 더해진 사람의 손길과 뻔해 보이는 관광지의 싸구려 상품점들 때문이었던 듯 하다.


테메큘라 올드 타운


집순이, 집돌이 머릿속엔 벌써 집에 갈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먹고 가야 뭔가 한 것 같을 테니

"밥 먹고 가자."


여기 오는 동안 차 안에서 가보자고 정한 맛집 1909테이블을 잡고 앉아 타코와 버거를 주문했다.

'어? 이거 뭐지? 생각보다 너무 맛있다.'

소고기를 기계로 갈아 만든 것이 아닌 칼로 직접 다져 만든 듯, 스테이크도 버거 패티도 아닌 부드럽게 씹히는 버거의 식감이 너무 좋다.


1908년 대지진 때 무너진 건물을 재건한 것이 1909년이라 이름을 1909라 지었다 한다.

1960-70년 대엔 위험하기로 악명 높았던 Long Branch Saloon이 있던 장소로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당시 흔적인 총자국이 천정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Long Branch Saloon 당시 사진과 현재 1909의 모습
맛집은 맛집이네! 인정한 1909 버거와 타코


'집에 갈까?'

그러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좀 걷자. 햇빛도 따뜻한데..."


찐 이탈리안 젤라토 발견.

아이스크림은 살쪄도 젤라토는 안 쪄.

아니 이런, 이탈리안 도넛과 패스트리까지.

크... 그냥 갈 순 없겠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밥만 먹고 갈 순 없잖아?


 
다음에 꼭 들르고 싶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Bottega Italia


점심을 너무 배불리 먹은 탓에 이탈리안 도넛과 카놀리는 패스하고, Ciao라고 찍힌 와플을 쿡 박아 주는 젤라토를 먹으며 나는 남편을, 남편은 나의 모습을 서로 찍어 주었다.


"이제 집에 가자."

"그래. 할 거 다 했으니까 가자."

여행지에서 할 거, 볼 거, 먹을 거 다 했다며 그렇게 집돌이, 집순이의 Day Trip을 마쳤다.



집에 와서 창 밖으로 노을을 본다.

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맑으면 맑아서 좋은

Southern California의 하루가 이렇게 또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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