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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리 크랩

행복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고 싶은 요리

by 리나

싱가포리안이 좋아하는 싱가포르 음식

( 2020년 8월 서베이 결과 )

1위 치킨라이스 (Chicken Rice)
2위 락사 (Laksa)
3위 칠리 크랩 (Chilli Crab)


칠리 크랩

축하할 일이 있거나 가족 모임이 있을 때 혹은 외국에서 손님이 방문했을 때 대접하는 특별한 음식.

이름은 '칠리 크랩'이지만 많이 맵지 않아 어린 아이들과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싱가포르식 칠리 크랩은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이 '게'를 잡아 온 날이면 게를 볶아 토마토소스와 칠리소스를 섞어 끓여 만들었던 아내의 요리법에서 유래했다 한다.


칠리 크랩 레시피는 비교적 간단하다.

샬롯(혹은 양파), 붉은 고추, 마늘, 생강을 블렌더로 곱게 갈아 달구어진 웍에 기름을 넣고 볶는다. 손질한 게를 웍에 넣어 재료와 섞어 볶다가 두반장 소스, 간장, 케첩, 설탕 물을 붓고 끓여준다. 게가 익으면 녹말물을 넣어 소스를 걸쭉하게 만든 다음 계란을 풀어 소스와 골고루 섞어 마무리한다.



싱가포르 칠리 크랩은 연중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스리랑카 맹그로브 숲에서 잡은 머드 크랩 (Mud Crab)으로 만든다. 머드 크랩은 얇고 부드러운 껍질에 살이 많아 국물 요리보다는 볶아서 살을 먹는 칠리 크랩 요리에 최적이다.


머드 크랩의 거대한 집게 속엔 달콤한 살이 꽉 차 있어서 통닭을 먹을 때 닭다리를 떼어 집안의 가장이나 장남 혹은 귀한 손님께 드렸던 옛 우리 어머님들이 하셨던 것처럼 크랩의 집게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 중 가장 귀한? 사람의 접시 위로 간다.

물론 특별한 서열이 없는 친한 친구들끼리 먹을 때는 내 손으로 이 집게를 들어 내 접시로 직접 가져오기엔 눈치가 보여 누군가 내 접시 위에 올려 주길 바라며 혹시라도 누군가 내 접시에 올려 주면 못 이기는 척 좋아하는 티 내지 않고 먹는다.


집게를 차지할 만한 '짬밥'이 아니라면 그다음 순서인 게딱지 정도는 내 차지가 되었으면 기대해 본다.

집게처럼 딱 달라붙어 앞니의 힘을 빌려 뜯어먹을 만큼 쫀득한 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스가 적절히 밴 살과 내장을 숟가락으로 긁어 먹거나 밥을 넣어 비벼 먹으면 맛있다.귀차니스트에다 음식을 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최적인 부위다.


이제 남은 것은 게 '다리'이다. 게를 알뜰살뜰 구석구석 잘 발라 먹는 진정한 crab lover 들은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씩 뜯어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얇고 부드러운 게 껍질을 살살 깨서 벗겨 먹기도 하고 안에 있는 살을 쪽쪽 빨아먹기도 하며 들이는 공에 비하면 너무 적은 양의 살을 먹느라 양손이 걸쭉한 소스와 게 껍질 조각으로 범벅이 되어도 옆에 놓인 라임을 띄워 준 물에 손을 헹궈 가며 무섭게 잘 발라 먹는다.



이렇게

게를 해치우고 나서 소스에 남은 게살은 계란과 파기름으로 맛을 낸 볶음밥이나 기름에 튀겨낸 달짝지근한 만토우로 접시를 닦아 내 듯 싹싹 긁어먹는다.



칠리 크랩은 편한 사이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함께 먹기 힘든 음식이다.

입과 손에 끈적한 소스를 잔뜩 묻히고 게 살을 뜯으며, 이 사이에 낀 게 껍질을 손톱으로 파내며, 그 와중에 대화도 나누어야 하니 체면을 차려야 할 자리나 데이트 상대에게 잘 보이려면 피해야 할 음식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과 같이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다.

예쁜 짓을 해도 밉게 보이는 사람이 다소 긴 시간 번잡한 칠리 크랩 먹는 모습을 봐줘야한다는 건 고통이다.


혼밥을 즐기는 사람이 식당에서 혼자 먹기 힘든 음식이다.

손가락을 쪽쪽 빨아 가며 혼자 한 마리를 해부하듯 요리조리 다 뜯고 파내고 하기엔 적지 않은 양이서 소스에 남은 게 살을 갓 튀겨낸 만토우로 찍어 먹는 '마무리'를 못할 수도 있다. 여럿이 함께 먹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칠리 크랩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싶을 때 생각나는 음식이다.


이스트 코스트 점보 시푸드 레스토랑,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칠리 크랩 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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