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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Oct 08. 2020

서브컬처와 철학 (4)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옆에 두고 읽는 『WHITE ALBUM』


※ 들어가기 전에


이번 편에서는 98년도에 출시한 원작 게임 WHITE ALBUM의 파생 미디어 중 09년도에 방영한 TV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였다. 혹시라도 원작이나 코믹스, 리뉴얼판을 접한 독자의 혼란을 방지하고자 밝혀둔다.



개관


모든 일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남녀 간 사랑도 마찬가지다. 특히 서툴고 충동적인 젊은 시절의 사랑은 찬란하고 빛나는 부분만큼이나 그 이면에는 음영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친구가 연심을 품던 이성이 자기를 좋아하는 바람에 우정이 흔들린다든지, 이별을 통보받은 한쪽의 애정이 증오의 비수가 되어 상대방의 주변까지 엄습한다든지, 지금 앉은 자리에서도 몇 개나 예시를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연인 관계가 발전하다보면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말해 입 아프지만 결혼은 연애와 다르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그에 따른 새로운 인간관계가 성립하고, 사회적으로 앞에 ‘유부-’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무엇보다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관계의 장본인들에게 그 무게에 맞는 사고와 행동이 요구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결혼으로 바뀌는 자신의 세계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그의 인생의 지상 과제는 적어도 자신만은 그런 굴레에 빠지지 않은 채 세상의 찬란하고 빛나는 부분만 탐미하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데, 그에게는 결혼 생활의 성실성과 영속성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속성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키르케고르가 약혼자 올센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떠난 뒤 쓴 작품으로, 가명으로 쓴 이 책을 통해 그의 명성은 굳어지게 된다. 책에서 키르케고르는 올센과 세상에게 자신을 설명하려고 한다. 윤리학을 넘어서는 훨씬 높은 믿음의 삶(종교적인 것)을 향한 운동은 이 책의 끝 부분에서야 겨우 그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이번 편에서 다루는 범위는 총 2권 구성의 본서의 첫 번째 권 말미의 코델리아라는 처녀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용하는 요하네스라는 이가 쓴 <유혹자의 일기>와 두 번째 권 전체이다. 심미적 실존의 의미, 그 실존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이유, (책의 목적이) 윤리적이고 최종적으로 종교적일 때 그 수단이 반어적이고 희극적임을 염두하며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WHITE ALBUM』‘투 하트’ ‘시즈쿠’ ‘키즈아토’ 등 비주얼 노벨로 이름을 알린 에로 게임 제작사 Leaf가 플레이어의 선택범위를 늘리고자 육성 시뮬레이션 요소를 강화하여 98년도에 출시한 작품이다. 타이틀 히로인 모리카와 유키를 제외하면, 이미 연인이 있는 주인공이 주변의 다른 여자들과 썸을 타서 종국엔 유키와 파국에 이르고 새로운 연인과 맺어지는 게 원작 게임의 변하지 않는 목표이다.

09년도에 방영한 애니메이션은 매체 특성상 옴니버스식이 아닌 오솔길 전개를 취하다보니 주인공의 우유부단함이 한층 부각되고 주변인들이 끌어안고 있는 내외적 갈등이 순차적으로 터져 나와 매 주 방영분마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술을 깨물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소재로 끌어들이기 좋은 선정성과 충분한 개연성을 보유하고 있다.



『WHITE ALBUM』의 인물 관계


주인공 토우야는 연인이자 신인 아이돌 유키, 절친 아키라, 소꿉친구이자 한 살 위의 선배 미사키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친분을 이루고 있다. 토우야가 동경하던 테니스 유망주의 여동생 하루카 역시 약간 거리를 둔 상태로 이들과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작중 배경은 원작보다 좀 더 과거 시대의 일본. 스마트폰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아날로그 전화가 통신의 주력이던 시기. 여기에서 오는 소통의 단절과 엇갈림이 본 작에서 유키와 토우야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 토우야와 유키를 이어주는 건 토우야의 집 전화기에 유키가 남겨놓는 음성메시지, 그리고 아주 가끔씩 연결되는 짧은 통화이다.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인 유키는 얼마 안 되는 자유 시간에도 매니저 야요이가 옆을 단단히 지키고 있다. 살얼음판 같은 연예계에서 짓궂은 일을 종종 당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장이자 프로듀서 오가타 에이지의 여동생인 대스타 오가타 리나의 친구로서의 배려가 큰 위안이 된다.


○ 또래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하던 리나에게 유키는 소중한 친구이자 라이벌이다. 어느 날 변장을 하고 유키와 카페 에코즈에 가서 만난 유키의 연인 토우야에게 장난스럽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준 것을 시작으로 비밀스런 관계가 시작된다. 유키가 에이지와 신곡 작업에 몰두하는 사이 리나는 매니저를 시키는 걸 구실로 토우야와 점점 가까워진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연예계에서 옛날부터 자신을 전담 마크하던 에이지의 부재는 리나가 더욱 토우야에게 집착하게 만든다.


○ 야요이는 수시로 토우야에게 ‘당신의 존재는 아이돌 모리카와 유키의 성장에 걸림돌이다’라는 식의 견제를 하며, 정 혼자서 쓸쓸하다면 자신이 위로해주겠다며 그와 종종 몸을 겹치게 된다. 토우야와 유키가 서로 소통하려는 시도를 중간에 가로채면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하는 야요이의 진의가 어디까지 유키의 성장을 위한 것이고, 혹은 어디까지 토우야에게 진심이 생긴 건지는 알 길이 없다.


○ 미사키는 오래 전부터 토우야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키 역시 토우야를 좋아하며, 아키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던 미사키는 토우야가 유키와 맺어지는 걸 지켜본 채, 아키라의 마음은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쓰는 걸 좋아하던 미사키는 대학의 연극 써클에서 전 남자친구 타마루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보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토우야가 이에 엮이며 서로 단둘이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많아지고, 애써 참아 왔던 연심이 다시 포화하기 시작한다.


○ 하루카의 오빠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날에도 그녀의 곁을 지켜준 건 토우야였다. 그날 하루카는 하나뿐인 오빠를 잃었고 토우야는 유키에게 미사키가 그렇듯 줄곧 동경하던 사람을 잃었다. 긴 생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세상에 달관한 듯 살아가는 하루카를 토우야는 혼자 내버려둘 수 없다. 똑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서로의 상처를 잘 아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보낼수록 생겨나는 마음 역시 깨닫지 못한 사이 연인의 그것과 비슷한 색을 띠어간다.


○ 토우야의 정기권을 주워준 날, 마나가 인식했던 그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신인 아이돌이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망상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는 마나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쓸데없이 크고 넓어 혼자 있기 더욱 쓸쓸했던 집에 실낱같은 온기를 가져다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시종일관 한결같은 감상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외로운 사람은 버릇처럼 하루에 한 명씩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여성을 ‘오늘의 여신’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마나는 어느새 자신이 토우야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관계를 2쿨(24~26화)짜리 애니메이션에 풀어놨으니 매 주 아침드라마 보는 기분을 토로하던 시청자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요즘 시대에야 준성인 대상 연애물에서 저 정도 수라장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98년도 당시에는 연애의 어두운 부분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과감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화제작이던 F&C社의 『With you』의 ‘친여동생 캐릭터’이자 ‘비非공략 대상’인 이토 노에미 정도의 선정성은 댈 바도 못 된다.



A의 관점에서 보는 토우야 : 심미적 양상


앞서 말했듯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1권 말미에는 요하네스라는 저자의 ‘유혹자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고, 그 앞에는 본서의 ‘이것이냐’에 해당하는 A의 심미적인 논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A의 논문 중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현대의 비극적인 것에 반영된 고대의 비극적인 것》의 핵심 주장들을 토우야라는 캐릭터에게 적용해보겠다.

“고대의 비극과 현대의 비극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거의 관찰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여 온 일이다.” 둘의 차이는 특히 ‘고통’과 ‘비애’의 상대적 비중과 양자를 독자 혹은 관객이 수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있어서의 줄거리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사상과 성격dianoia kai ethos을 들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또 중요한 것은 줄거리이고, 개개의 사람은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줄거리를 위해서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의 세계는 충분한 자의식과 반성을 거친 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개인은 여전히 국가나 혈족이나 운명 등의 현실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다. 주인공의 몰락은 단순한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동시에 하나의 수고이다.

반대로 현대의 비극에서 주인공의 몰락은 수고가 아닌 행위다. 시추에이션과 성격이 지배적인 현대 비극의 주인공은 주체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반성적이다. 이 반성은 국가와 종족과 운명과 관계되는 모든 직접적인 매개로부터 그를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자신의 종전의 생활로부터도 그를 분리시킨다. 서사시적인 전경도 서정시적인 유산도 없이 주인공은 전적으로 자신의 행동으로 서고 또 쓰러진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과거의 생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의 전 생애를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서 그의 어깨에 지우고 일체를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그의 미학적인 죄과를 윤리적인 죄과로 변화시키고 만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1부 中 《현대의 비극적인 것에 반영된 고대의 비극적인 것》 p.257


이 변화가 얼마나 교묘하게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는지 보여주기 위한 예시 하나만 들어보겠다. 가수 마이크로닷과 산체스의 부모가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기를 쳤다고 한다. 마닷 형제에게 법적 책임이 없음은 자명하나 네티즌들은 도의적 책임을 물어 집요하게 공격했고, 미디어는 이후 연쇄적으로 일어난 연예인 측근의 ‘빚투’의 시발점으로 다루었다. 이를 ‘마이크로닷의 비애’라고 표현하면 거슬리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굳이 반박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크로닷의 고통’이라 하면 어떨까? 스스로 주체적 개인을 지지한다고 믿는 사람이 ‘부모의 죄과는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논리에 별 거부감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무뚝뚝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후지이 토우야. 유년기의 어느 날, 혼자 울고 있는 토우야를 달래며 메노우는 ‘여신이 너를 지켜줄 거야’라며 의도치 않은 암시를 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토우야의 여신은 유키였고, 유키가 토우야에게서 떨어져 있는 동안 ‘오늘의 여신’은 리나였고, 야요이였고, 미사키였고, 하루카였고, 마나였다.

여신들은 토우야를 사랑했으며, 유키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토우야의 우유부단함에 상처 입었다. 그러나 A는 이를 두고 누가 잘했네 잘못했네를 따질 생각이 없다. “현대는 가족과 국가와 종족에 관한 모든 실질적인 범주를 잃었고, 개개인을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고, 결국 그의 죄과는 죄가 되고, 그의 고통은 후회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비극적인 것은 폐기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또 엄밀한 의미에서 수고의 비극이라고 불러야할 그것도, 사실상 그 자체의 비극적인 관심을 잃는다. 왜냐하면 수고를 낳게 하는 힘이 자체의 의의를 잃고, 관객들은 “너 자신을 도우라. 그러면 하늘이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A의 심미주의의 단면이다. ‘심미주의’에 깃들어 있는 사상 전체는 미결의 상태와 또 선택으로부터의 자유의 상태에 고집스럽게 서 있는 것이다. 심미가는, 마치 따분한 강의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뭐든지 ‘재미있는’ 혹은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거니와, 그런 사람은 강의가 시작될 때 강사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 정신이 팔려서, 그 방울이 강사의 코를 따라 더디게 흘러내리다가, 강사가 그의 그러므로에 도달할 때 코의 끝 부분에서 톡, 떨어지는 느린 과정을 눈으로 따라간다.

《유혹자의 일기》의, 누군가가 실제로 결혼하게 되는 후회스러운 결과를 겪지 않으면서도 처녀를 유혹하고, 심지어 그녀와 약혼해서 또 유혹의 실제적인 과실을 즐길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비결은 처녀로 하여금 약혼을 깨게 함으로써, 그것이 전부 그녀의 생각이고 그대, 불쌍한 사내야말로 상처받은 쪽이라고 믿게 만듦으로써 파혼하는 것이다. 심미가는 과거의 향락을 정리해놓은 스크랩북을 훑어보는 즐거운 회상에서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

토우야의 우유부단한 행보가 요하네스와 같은 의도를 품지 않았을지언정 극중 나타나는 양상에서 그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결단하지 않는’ 것이다. 유키와의 관계를 지켜나가기를 결단하지도, 유키와 결별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를 결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변 모든 여성들은 토우야의 ‘오늘의 여신’일 뿐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토우야는 굳이 결단할 필요가 없다. 이미 심미적 향락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시적인 것을 향락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제2의 향락으로써, 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는 이 향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처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는 심미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향락하였고 제2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심미적인 인격을 향락한 것이었다. 요컨대 전자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현실이 그에게 주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가 현실에게 잉태하게 한 것을, 즉 시적詩的인 것이 된 현실을 이기적이고도 인격적으로 향락하였다는 점에 중점이 있었고, 후자에 있어서는 그의 인격이 주체적으로는 발산해 버리고, 그는 단지 상황과 상황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향락한 점에 중점이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그는 항상 현실이 기연機緣으로서, 혹은 계기契機로서 필요하였고,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실이 시적인 것 속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1의 단계의 열매는 정서情緖였고, 이 정서에서 일기가 제2의 단계의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물론 이 열매라는 말은 곧 제2의 단계에서는 제1의 경우에서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시적인 것은 그가 그의 생애를 사는 과정에서 언제나 양의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1부 中 《유혹자의 일기》 p.541



B의 관점에서 보는 토우야 : 윤리적 양상


<특히 나의 과제로 간주해야만 하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결혼의 심미적인 의의를 제시하는 것이고, 다음은 실생활의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혼 속에 깃들인 심미적인 요소가 얼마나 단단히 간직되는가 하는 사실을 제시하는 일이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결혼의 심미적 타당성》 p.16


A의 심미적 실존에 판사이자 유부남 B는 실로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제 양상은 윤리적인 국면에 접어든다. 이 인용문은 B가 A의 고독한 자기 탐닉을 비판하면서 결혼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A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에서 따온 것이다. B가 심미적 관점와 윤리적 관점 사이에서 이끌어내는 차이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시간과 영원성의 배경적 차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은 그 자체가 항상 추상적이므로, 그것이 외적인 역사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미 죽음이 그 사랑을 덮치려고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의 영원성은 허망이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의 사랑은 소유와 더불어 시작되고 내적인 역사를 획득한다. 부부 사이의 사랑도 성실하고, 로맨틱한 사랑 역시 성실하다 – 그러나 이제 그 차이에 주목하라. 로맨틱한 사랑의 성실한 애인은 기다린다. 15년을 기다린다고 하자 – 그리고 이윽고 그 보답을 받는 순간이 온다고 하자. 이때 15년이란 세월을 멋지게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문예의 견해는 옳다. 그래서 문예는 황급히 바로 그 순간으로 달려간다. 기혼자는 15년 동안 성실하고, 그 1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소유를 간직한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시간의 계속 속에서 그는 줄곧 그가 소유한 성실성을 획득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뭐니 뭐니 해도 부부 사이의 사랑은 그 자체 안에 첫사랑을, 그리고 첫사랑이 갖고 있는 성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결혼의 심미적 타당성》 p.269


A는 시간과의 진실한 관여를 결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실재와의 관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이는 이제 그가 영원성에 대한 피상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미가는 순간 안에서 또 순간을 위해서, 순간의 현재의, 덧없는, 우연한 쾌락을 위해서 산다. 심지어 요하네스가 많은 시간을 코델리아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때처럼 그가 시간을 투자할 때조차 – 혹은 그가 설령 낭만주의 소설에서 15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순간을 위해서다.

물론 여기서 유키와 토우야는 부부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로맨틱한 연인의 성실성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유키와 토우야가 간신히 서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공통적인 경험이 없는 이상 소재는 빠르게 고갈되고, 야요이와 에이지에게 토우야와 만나야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유키와 ‘꿈을 좇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최소한의 볼멘소리도 못하는’ 토우야의 태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나 B의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조금만 더 성숙함을 요청해서, 배우자의 귀가를 기다리는 부부의 그것으로 치환할 순 없을까?’ 이미 한국에도 한쪽의 기다림을 강제하는 제도가 있지 않은가. 군대 말이다. 흔히들 ‘군대 2년을 기다려 준 연인이면 충분히 신뢰가 보증된 셈이다’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뢰를 단순히 로맨틱한 연인의 그것이라 하기엔 ‘군대까지 기다렸는데 결혼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올 정도의 무게가 있다. 물론 아이돌이 이 년 만에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연인 사이면서, 결혼도 안 했으면서 서로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 자체에 이미 첫사랑의 성실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표상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적 계기들을 주제로 하기 때문이거니와, 연인들이 만나고 불꽃이 튀며, 그들이 다섯 쪽으로 농축된 15년의 세월 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결합하고, 서로의 팔에 안기며, 만사가 다 잘되고, 그러면 끝이다. 결혼 생활은 예술에서 쉽게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결혼 생활은 매일매일의 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평범한 성장이기 때문인바, 거기에서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정복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일단 최후의 한 방이 발사되고 나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모르는 장군과도 같다. 결혼 생활은 시간에 대한 현명한 사용과 지배에 관한 시간이며, 나날의 농사에 착수하는 시간이다.

B가 생각하기에 A에게는 그 어떤 자기도 없다. 만일 자기를 소유한다는 것이 신뢰할 수 있는 자기의 변치 않는 영속성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심미가의 삶은 일련의 단속적인 계기들로 증발되어버리며, 과거에 관해서 불쾌한 것은 무엇이든 모두 망각하고 오직 그 즐거움만 회상하는, 그리고 미래를 되도록 기분 풀이의 새로운 공급으로 축소시키는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심미가에게는 과거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또 자신의 말이 미래에도 지켜질거라는 확신을 줌으로써 삶에 주어져야 하는 실존의 통일성이 부족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리고 울티마툼Ultimatum


A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자기도취적 내지 심미적 실존을 상술하고 있거니와, 이 실존은 자신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높고 가장 예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쾌락을 주는 것에만 전적으로 달려 있는 삶으로서, 그 대가로 타인에게 어떤 해를 주느냐 하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B는 판사인 동시에 행복한 유부남인데, 윤리학의 원칙과 법 아래에서의 의무에 대한 의식을 옹호한다.

키르케고르는 훗날 《유혹자의 일기》는 올센을 퇴짜 놓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잘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리고 결혼의 명예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런데 그 자신은 최근에 주지하다시피 그 명예에서 예외가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이 책의 저술 의도는 헤겔학파, 즉 19세기 중엽의 덴마크 철학과 신학의 지배적인 지적 세력을 자극적으로 도발하려는 것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체계’에서의 운동의 원리는 모순율에서 구체화되는 부정적인 것의 힘이라는 헤겔의 핵심적인 교의로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헤겔식 변증법적 결과는 긍정과 부정의 상위의 통일인데, 이것들은 상대방에 대한 각각의 추상적 대립에서 무화되고 또 상위의 구체적인 통일 속으로 지양된다. 이것을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유명해진 말로 표현하자면, ‘종합’은 ‘정립’과 ‘반정립’의 상위의 통일이다. 이런 조정적 통일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부정을 위한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A의 경우 부정은 그 대가가 지나치게 컸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덜 힘든 해결책을 찾아냈다. 논제를 전혀 채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그에 대한 반정립의 공격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도 않고 또 결단을 내리지도 않음으로써, 그는 부정적 결과를 겪을 필요가 없게 된다.

토우야가 유키를 끝까지 기다리며 백년가약까지 맺었다고 치자. 그녀의 허리는 굵어지고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토우야를 따분하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고, 토우야가 언젠가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에게 끝없이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토우야가 끝끝내 유키를 차 버리면, 세상은 토우야를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인을 외톨이로 만든 찌질이’라 비난할 것이고, 그것을 토우야는 또 후회할 것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두 경우 모두 토우야는 후회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해결책은 ‘모순 원리가 지배하는 실재나 현실’로 진입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결정에 대해 그 결정들을 철회할 권리를 확보해 두는 것이다. 심미주의에 깃들어 있는 사상 전체는 미결의 상태와 또 선택으로부터의 자유의 상태에 고집스럽게 서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밤은 좀 더 계속되지 않는 것일까? (…)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는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으련다. 처녀란 일체를 바치고 나면 연약해지고 일체를 상실하고 만다. (…) 나는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회상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향기를 잃고 말았다. (…) 남자가 처녀 속에 자기 자신을 창작해 놓고, 처녀가 그 관계에 싫증을 일으킨 것은 자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을 높여줄 수는 없을까? - 이런 일은 한 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이 문제는 극히 흥미 있는 여흥餘興이 될 것이다. 즉, 이 여흥은 그 자체로서는 심리학적인 흥미를 가질 것이고, 또 그런 면을 추구해 가노라면 허다한 에로스적인 관찰로써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여 줄 것이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1부 中 《유혹자의 일기》 p.815~816


요하네스의 심미주의는 한 어린 여성의 상처받기 쉬운 연정에 대한 그의 잔인한 악용이라는 윤리적 ‘모순’으로 귀결된다. 헤겔처럼, 키르케고르는 삶의 낮은 형식들이 내적 모순에 의해 붕괴됨에 따라서 더 높은 혹은 더 풍요로운 삶의 형식들로의 점차적인 상승에 의한, 정신에 대한 일종의 교육에 관해서 성찰한다. 헤겔은 이를 정신 내지 사유의 운동이라고 인식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경우는 이것은 실존의 운동이며, 삶의 구체적인 형식들을 겪는 과정이고, 사유의 운동이 아니라 현실 삶의 방식들의 운동이다.

독립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심미주의는 ‘절망’으로 향하는데, 이는 실존의 파멸이며, 또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실존적 모순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도덕적 삶의 전율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을 초월하려는 생각이 든다.


<부부 사이의 사랑은 그 자체 안에 선험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적인 항존성을 갖고 있고, 이런 항존성 안에 깃든 힘은 바로 운동의 법칙과 같은 것, 즉 결심이다. 물론 이런 결심 속에는 타자가 정립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 타자는 극복된 것으로 정립되어 있다. 결심 속에서는 이런 타자가, 외재적인 것마저도 내적인 경험 속에 반영시켜 볼 수 있을 만큼 내적인 타자로 정립된다. 이 타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타당성을 획득하지만, 이 타자는 바로 이 타당성 안에서 결코 타당성을 가질 수가 없는 무엇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련되고 정화된 사랑이 이 운동에서 나타나 체험된 것을 동화同化한다 – 바로 이 점에 역사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결혼의 심미적 타당성》 p.194~195


2부의 윤리적 양상에서는 ‘실존적 자기’가 도입된다. 이는 자기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서의 심오한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자기를 본질 내지 실체라는 고전적 측면에서 어떤 기본적 본질 내지 자기 동일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유, 결단, 선택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들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존재를 자유의 측면에서 정의함으로써, 키르케고르는 인간성을 자연의 질서에서 배제하고 또 존재의 커다란 연쇄와의 연결을 끊는 것처럼 보인다. 키르케고르 자신에게 있어서, 자유는 항상 하느님 면전에서 행사되고, 하느님은 지레의 받침점 내지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 작용하는 반면, 그를 추종한 세속적인 실존주의자들의 경우, 하느님은 이러한 새롭게 발견된 자유 그리고 훨씬 자유롭게 흔들려야 한다고 위협받는 자유와 충돌한다.


윤리학에서는 영원성은 순간들의 연속을 관통하는 한결같은 영속적인 관여의 힘을 의미하거니와, 이는 시간과의 끝없는 씨름을 통해서 싸워야 하고 또 쟁취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낭만적 연인이 “나는 한다”라고 말할 때 막이 내리고 소설은 끝이 나며, 또 뒤따르는 일상생활의 실재는 꿈같은 환상 속에서 증발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존의 분망함 속에서 “나는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시작하는 것, 미래를 위해서 맹세하는 것,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영원성의 한결같음으로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고 ‘거실의 시계 소리를 들으면서 영원성 안에서 사는’ 기술을 실천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다.

윤리학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견해에서는, 모든 것은 반복의 가능성에 의해 결정된다. 윤리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처음에 서 있고 또 미래는 앞에 있으며, 매일매일은 다시 “나는 한다”라고 말하라는 새로운 요구를 제시하는데, 그럼으로써 “나는 한다”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오직 최후에서뿐이다. 오직 최후에만 그 서약은 최종적으로 지켜진다. 키르케고르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윤리학은 매 순간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덕의 ‘습관’을 형성하는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습관’은 덕의 실천을 촉진하는 데 반하여, 키르케고르의 반복에서 강조되는 것은 어려움이다.

키르케고르가 개념적 기초를 제공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실존적 자기에 대한 개념으로 이를 이해해보자. 부부간의 사랑은 그에 대한 성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부부간의 서약은 선택의 단호함의 가장 명백한 사례이며 이는 심미가에게 결여된 것이다. ‘순간’이라는 개념은 『존재와 시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항아리의 표면에 얼어붙은 시간의 조각이 아니며, 그 서약에 대한 영속적인 관여에 의해 채워지는 선택의 순간, 혹은 진리의 순간이다. 순간에서 삶의 분산된 흐름은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집중된다. 하이데거의 “진정한 결단”에서 과거와 미래, 행위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임은 모든 것이 결단의 순간에 집중되는 통일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의 시간성은 영원성과 교차하고 또 영원성에 의해 충만해지거니와, 여기에서 그가 영원성이라는 말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사후 세계의 영원성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영원한 정당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자기로서의 그것의 영속적인 연속이며, 이것이 바로 윤리적 성실성의 구조다.


<나의 이것이냐 / 저것이냐는 우선 당장은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택하든 아니면 그 둘을 다 배제하는 쪽을 택하든, 하여간 어느 쪽을 택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규정 밑에서 존재 전체를 심사숙고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선과 악 쪽을 택하는 사람은 선을 택한다는 것이 사실상 진리이지만, 이런 일은 후에 가서야만 판명이 된다. 왜냐하면 심미적인 것은 악이 아니라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선택을 구성하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택을 하는 일이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항상 딜레마의 어느 한 쪽에 매달려 있고,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려고 하면 그 일이 꼭 필요하고, 따라서 또 선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인격형성에 있어서의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균형》 p.329


심미가의 단 하나의 결단 혹은 선택은 바로 자신은 아무것도 선택 혹은 결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지점에서 판사는 자신의 실제 과제가 심미가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단 선택의 계획이 착수되기만 하면, 판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역학이 심미가를 선의 길로 인도하고 또 그로 하여금 악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해줄 거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판사의 기본 과제는 심미가를 설득해서 도덕적 관점을 갖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대안들은 심미가가 되는 것 대對 윤리적인 존재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단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대對 선택의 삶이다.


<‘너는 하느님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대가 옳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 그것은 그대가 하느님 앞에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배움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 자신이 원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느님에 대하여 다투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곧 그대가 고상한 존재라는 증거이고, 결코 하느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새는 땅에 떨어집니다 – 어떤 점에서 참새는 하느님 앞에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느님 앞에서 옳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인간에게만 모든 생물에게 거부되어 있는 사실, 즉 하느님 앞에서는 옳지 못하다고 하는 사실이 유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S. 키르케고르 著, 임춘갑 譯) 2부 中 《울티마툼ULTIMATUM》 p.661~662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전개되는 실존변증법의 마지막 전환은 ‘최후의 말’에서 이루어지는데, 최후의 말은 북부 해안 지방의 히스가 무성한 유트란 황야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 친구가 판사에게 우편으로 보낸 설교문이다. ‘실존변증법’에서, 한 가지 형태의 삶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그 삶을 분열시키는 내적 긴장의 팽팽한 압력하에서 붕괴되기 위함이며, 또 우리는 그럼으로써 여전히 더 높은 단계로 옮겨진다. 그 설교문은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과 관련된 반성이다. 하느님의 법정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장소가 결코 아니라고 이 설교문은 주장한다.

목회자는 누가 누구보다 더 윤리적이라 주장하는 것보다, 더 잘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무한한 기준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절대적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고 있다. 판사는 심미가의 교화를 위해서 이 편지를 전하고 있지만 그러나 ‘최후의 말’의 요지는 그 메시지가 판사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심지어 정의로운 존재로 있는 것에 익숙한 판사조차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윤리학은 교만이다. 도덕적 관점보다 더 높은, 훨씬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관점이 있다. 사람이 윤리적 준거의 기준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으며 또 우리가 정의롭다고 결론짓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설교문은 윤리적인 것에 내재하는 ‘절망’, 윤리적인 것이 실존에 남겨놓는 구멍을, 《유혹자의 일기》가 심미주의에 고유한 절망을 폭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폭로한다. 이 설교문은 윤리적 삶이 자기만족적이고 최종적인 관점으로 남아 있을 경우 감당해야 할 위험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윤리적 관점에 머무름으로써 자기는 절대적 관점을 박탈당하고 또 하느님의 절대적 신성보다 못한 것인 어떤 기준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를 실체 내지 정신으로, 또는 본질로 간주하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을 택하는 대신, 키르케고르는 자기를 자유라는 천으로, 선택이라는 직물로 직조된 일종의 원천으로서 도입하고 있다. 인간을 본질의 질서 내지 존재의 체계 속에 안전하게 끼워진 존재자로, 또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종속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대신, 키르케고르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바라고 주장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수행한 개념적 혁명은 ‘실존주의’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 하이데거가 자기에 대해서 “그것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고 말했을 때, 사르트르가 인간존재에서 ‘무엇’ 혹은 ‘누구’는 선택의 산물이라는 의미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썼을 때, 그들은 키르케고르의 상속인으로서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상가들에게는 혼란스러운 발견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 내지 ‘본성’에 의해 제공되는 견고한 규범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또 인간존재에게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그들 스스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넘겨주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경우, 그런 경향은 언제나 하느님에 의해 저지되고 있지만, 그러나 만일 하느님이 제거된다면, 카뮈와 사르트르의 심미적 실존주의에서 그런 것처럼, 모든 게 바뀐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이름 아래 하느님에 대항하는 실존적 반항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리는 것이다.



마치며


키르케고르의 실존변증법을 드러내기 위해 WHITE ALBUM을 끌어들여보았으나, 결국 더 높은 종합의 단계에서는 찬밥이 되는 바람에 독자 여러분들을 고전 독해의 늪에 빠뜨리는 귀결이 되었다. 울티마툼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교조적 색채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역이라서 그런 건지 키르케고르의 저서 중에는 그러한 색채가 아주 직접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그나마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첫째, 이 책부터 그의 말년까지 ‘윤리를 넘어선 신 앞의 단독자로서의 실존’은 일관된 테제이며, 둘째, 본문에도 나왔듯 헤겔 논리학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다른 노선을 걷는 족적으로부터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자들의 사유에 새로운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토우야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었든 어차피 그는 가상의 캐릭터가 아닌가. 판사가 심미가에게, 목회자가 판사에게 권면하며 이루어지는 실존의 변증법이 목표하는 진정한 대상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란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아니다. 그럼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이것이냐, 저것이냐? 아니면…



참고 문헌


『Enten – Eller』 S. Kierkegaard 著, 임춘갑 譯

『HOW TO READ 키르케고르』 John D. Caputo 著, 임규정 譯

『WHITE ALBUM』 原作 : AQUAPLUS(Leaf) 監督 : 吉村明, 吉田泰三  脚本 : 佐藤博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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