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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19. 2020

서브컬처와 철학 (3)

『Rewrite』를 통해 본 니체의 사상


들어가며



“주군에게 충성한다… 부모를 공경한다… 그건 세상에 나서 지켜야 할 불문율 같은 게 아니오. 충성할만한 주군에게 충성하고, 공경 받을 만한 부모를 공경하면 되는 일이오.”

레진코믹스에서 절찬리에 연재 중인 마사토끼 작가 원안 『삼국지 가후전』에 나오는 대사이다. 작중에서 가후의 이 말을 들은 장제는 식은땀을 흘린다. 그럴 만도 하다. 저들이 살던 후한말은 통치 수단으로든 정신적 이념으로든 공맹 사상이 깊게 뿌리박힌 시대로, 가후 같은 생각은 최소한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나는 미치광이요’ 라고 낙인찍히기 좋다.

그럼 이건 어떨까? 누군가 “테레사 수녀를 위인이라 할 만한가? 그 사람이 인류 문명에 뭔가 기여를 했어? 그냥 자기만족으로 구호 활동한 거 아냐?” 라 했다 치자. 그 순간부터 그를 대하는 주변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Key에서 2011년 발매한 미소녀 게임 『Rewrite』(이하 리라이트)에는 이러한 의문에 대처하는 단서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작중 주인공 텐노지 코타로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나는 사람을 구한다.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녀석이 있으면 일으켜 도와준다. 그 순간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착한 일을 했다. 선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 돕기에 따르는 기분 좋음이다. 사실은 상대의 입장 같은 건 상관없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상대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만족했을 뿐이다. 이기적인 선행이다.”

“어떤 생물이든 자신이 만족하고자 살아간다. 충실함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목적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충실함의 수단은 ‘고결함’에밖에 없는 걸까…”


리라이트의 각본에는 복수의 작가가 참여했지만 중핵 부분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타나카 로미오, 서브컬처와 철학 1편에서 다룬 게임 CROSS†CHANNEL의 시나리오 라이터다. 그의 작품에는 일관된 테마가 있는데, 바로 ‘자기 VS 타자’이다. 이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가 아니라, 자아의식의 깊은 단계에서 타자성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배제할지의 선 긋기의 미묘함을 추구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타자의 의견을 이도저도 동조해 주변에 완전히 녹아들어버리면 ‘자기’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기 때문에 누구나 벽을 치고 살지만, 그 벽이 너무나 강고해 외부와 자신을 완전히 차폐시키고 타자성이 분자 하나조차 침투하지 못한다면 정신의 성장이 멈추고 건전하다고는 못할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그 사이에서 적당히 절충하며 살고 있다.

타나카는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사실 굉장히 고도의 과정이며, 그러한 무의식의 심리 작용 안에서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커다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의 철학을 작품에 담아내 왔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고 과정을 굳이 비일상적 시나리오 안에 위치시켜 그 전모를 도드라지게 하여, 우리가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자기 VS 타자’의 균형의 애매함을 정면에서 까발리는 건 그의 작풍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리라이트에서는 지금까지의 그와는 다른 색채가 눈에 띈다. 첫 번째로 지구 환경문제를 이야기의 기조로 두고 그에 따라 다분히 현실사회적인 테마로 구성되었다. 다른 한편 생명 오라의 구상화, 별의 화신, 마물 등 판타지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과학과 비과학 양 측면에서 생명, 생물에 대한 강한 시선을 의도한 것도 종래의 타나카에게 없던 새로운 시도이다. 무엇보다 괄목할 대목은 앞서 언급한 주인공의 대사처럼 이기나 이타라는 행동원리의 언급, 또 그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의 선악의 가치 기준에 대한 사고를 유발하는 사회 윤리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한 명의 철학자의 사상을 통해 좀 더 명쾌히 이해된다. 바로 19세기 말 독일에서 혁신적인 사상을 제시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그 누구도 나란히 설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의 사상 자체는 어설프게 접근하려 들면 그 자체로 위험 대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들면 아주 복잡하고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여기선 리라이트와 니체를 번갈아가며 조명하는 식으로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양자를 이해하는 데에도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글은 니체의 사상의 요점을 알기 쉽게 정리하는 한편 리라이트에서 타나카 로미오의 본래의 사색에 더하여 앞서 언급한 여러 작품 테마를 포함한 모든 요소를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Rewrite』와 니체 사상의 개요



리라이트라는 제목은 주인공 텐노지 코타로가 자신의 신체 능력을 임의로 바꿔 쓸 수 있는 인간(리라이트 능력자)이라는 설정에서 유래한다. 모종의 궁지에 몰렸을 때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단계까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상에서 ‘생명의 진화’를 은유하고 있다. 물론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는 세대에 걸쳐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고, 적응하여 그에 맞춘 개체는 살아남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리라이트에서는 텐노지 코타로라는 한 인간의 자아 속에서 이 과정이 고밀도로 압축되어 재현되며, 이는 이야기 후반부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코타로는 이 능력을 껄끄러워하여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겠다고 생각한다. ‘굳이 진심을 내지 않고 주변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그의 태도가 서장의 상징적인 묘사 중 하나다.

이윽고 이야기가 진행되며 주인공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배경에는 지구 규모로 확대되는 환경 파괴의 소식이며, 세간 일반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라, 세계의 진상을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에겐 이미 인류 존망에 직결되는 중대 사태로 인식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세계의 진상을 둘러싼 두 거대 세력의 전쟁에 말려들어 어느새 적극적으로 싸움에 투신한다. 플레이어의 게임 내 선택에 따라 어느 세력에 붙어 어떤 행동을 할지 정해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선택지는 신비한 방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쪽지에 쓰인 질문 ‘당신에게는 힘이 있으며, 세계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자, 당신의 세계를 바꾸고 싶습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을 바꾸고 싶습니까?’에 대해 ‘세계’, ‘자신’, ‘정할 수 없다’ 중 하나를 고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타나카의 철학 ‘자신 VS 타자’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시사성이 강한 선택지조차 주인공을 진정한 결말로 데려다주진 않는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리라이트의 작품으로서의 장대함을 알 수 있다.

몇 개의 선택지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에겐 크게 다섯 개의 결말이 준비되어 있으나 사실 어느 것도 인류 절멸을 피할 수 없으며 대단원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엔딩을 끝내고 출현하는 새로운 챕터 「Moon」부터의 시나리오야말로 이야기의 후반전이며 리라이트의 진면목이다. 여기서 우린 이 작품이 인류를 비롯한 생명에게 예비된 멸망의 운명을 ‘다시 쓰기’ 위한 싸움을 그린 것임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최종 국면에서 마침내 주인공은 지구의 화신인 한 명의 소녀에게 다다르고, 소녀가 인류에게 진정 원하던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한 힘과 의지’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설령 어머니라 부르는 이 별을 탕진하고 소진시켜서라도 우린 번성하고 번영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였다. 즉 이 작품은 지구 환경보전을 테마로 두르면서도 마지막에는 그에 대한 맹렬한 안티테제에 도달한다. 지구를 최우선으로 두는 게 아니라 인간을 최우선으로 두라는 생물에게 가장 기본적인 운명을 우린 결코 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이다. 이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생겨나 양분을 흡수하며 마음대로 성장하여 이윽고 바깥 세계에 탄생하여 욕구대로 울음을 터뜨리는, 우리들 모든 인간의 원점에서부터의 강한 힘을 방불케 한다. ‘만약 지구에게 의사意思가 있다면 인간들이 자신을 신경 쓴 나머지 스스로의 생육과 번성을 가로막는 것을 과연 기뻐할 것인가.’ ‘그로써 행성으로서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해도 어머니 지구는 자식인 우리가 어디까지고 발전해나가는 것을 바라며 축복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을 밀어붙인 게 리라이트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관점에 대해 ‘그렇게까지 자기긍정하면 그만인가?’ 라 생각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일반 사회에서 환경보호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지구를 위해서’ 라는 이념의 ‘고결함’에 시선을 뺏겨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생육과 번성을 단절시키는 방향으로 정의正義를 정착시켜 버린 게 아닐까, 그것은 본말전도가 아닌가, 이러한 경종을 울린 게 리라이트의 메시지이다. 이 본말전도와 동일 선상의 지적을 19세기말 서양철학에서 행한 자가 니체다.


니체의 말 중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신은 죽었다”일 것이다. 실제로 이 한마디보다 그의 사상을 더욱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시작으로 세계의 온갖 종교를 전부 부정하고 ‘신 같은 상식을 초월한 존재는 없다. 그런 신앙은 당장 버리도록 하라’고 외친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야 ‘그렇게 노골적이고 뻔한 이야기를…’ 이라며 의아한 표정을 하지만 당시 사회의 서양 철학이란 기독교를 대전제로 파악했으며, 원래라면 오히려 신의 절대성을 논증해야 마땅한 철학자란 사람이 “신은 죽었다” 선언했으니, 사람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니체는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와 같이 ‘반철학’의 대표 주자로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한 성질의 철학이라 니체 사상을 두고 불쑥불쑥 부정적인 인상을 갖는 사람도 많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이미지는 오해에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그의 철학이 ‘반철학’이라는 시각. 분명 니체는 반종교를 내세웠지만 이는 반철학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는 종교와 동떨어진 지점에 진정한 철학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철학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다. 그의 인생역경만 봐도 누구보다 철학을 사랑하고 자신이 믿는 철학을 관철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그의 사상 중 니힐리즘(허무주의)이란 측면이 유독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자칫 니체 사상을 곡해할 수 있는 태도이다. 분명 그는 신이나 종교를 부정하고 그에 담보된 기존의 여러 가치관에 대해 그것들이 모두 환상이며 허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 세계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러니 뭘 해봤자 무의미하다.”처럼 무기력한 삶의 방식을 권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세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굳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가 어디에도 없다면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니체의 철학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열혈 히어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조차 아연실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긍정성 자체이다.

니체 사상의 구체적 내용은 크게 세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앞서 말했듯 종교비판이다. 그러나 그가 신이나 종교를 부정하려 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몇 번이나 강조한 개념인 ‘르상티망ressentiment’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굳이 풀이하자면 ‘약자가 강자에게 가지는 증오’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A와 B가 싸워서 A가 졌다 치자. A는 B를 원망하며 ‘싸움을 잘 한다는 게 쟤가 옳단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 라 생각한다. 니체는 종교의 기저에는 결국 이러한 ‘패배의 분함’이 있는 게 아니냐고 지적한다. 또 다른 예로 부유함을 누리고 과시하는 D를 두고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 없는 C가 부러움과 동시에 질투에 차서 ‘하나님은 헐벗고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위로하셨다. 거꾸로 말하면 부자는 자신의 부만큼 죄가 있는 것이며, 사후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 틀림없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라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격차가 눈앞에 들이밀어졌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척도를 설정하여 ‘나는 선, 쟤는 악’이라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바꿔 말하면 정신적으로 우위를 점하여 원한 감정을 무마하려는 성질이 우리에게 있으며, 종교에서 말하는 선악이란 결국 그러한 르상티망에 기원한 불건전한 가치 기준에 불과하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일면적이며 이로써 종교의 전 요소가 단칼에 부정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한 말 중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가 유명하다. 적어도 니체의 사유는 종교의 본질을 논의할 때 굉장히 흥미로운 접근임은 틀림없다.

이렇게 종교를 부정하고 선악의 가치를 배제하려 한 니체의 철학은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이는 앞서 말한 허무주의의 양상을 짙게 띠고 있다. 비유하자면 목적지가 사라진 미로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과 같다. ‘뭘 해도 결국 똑같다’ ‘어떻게 나아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를 두고 니체는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라 명명한다. 상상만 해 봐도 알 수 있듯 거기엔 아무 여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니체는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것에야말로 이상理想의 존재의의가 있다고 논한다. 즉 ‘목적지가 없다면 내가 직접 목적지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 사상의 세 번째 단계이자 그러한 늠름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여 자신의 손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이다. 니체를 이를 초인Übermensch이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신도 종교도 믿지 않는 그 초인이 발을 내딛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니,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니체는 말한다. 방금 전 르상티망의 예로 돌아가 보자. 더욱 부가 많은 D를 부러워하는 C는 조금이라도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돈을 모으면 되는 일이다. 싸움에서 진 A는 다음번에 B를 이기기 위해 단련하면 되는 일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고, 무리라며 포기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신이 언젠가 상대에게 처분을 내릴 것을 상상하며 쓰린 속을 가라앉히는 것뿐인 인생으로 만족하느냐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세의 환상에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현세의 현실을 똑똑히 포착하고, 자신이 지금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전력으로 수행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건전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곧 ‘힘에의 의지’이다. 다른 무언가에 의탁하거나 유보하지 말고 자신이 되고 싶은 대로 되면 된다는 강한 자기긍정이 니체 사상의 근간이다.

이쯤에서 니체의 사상이 ‘지구를 희생해서라도 인류는 번영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리라이트의 주제와 매우 흡사함을 눈치 챘을 것이다. 또 리라이트 종반부에서 인류가 잊고 있던 소중한 것으로서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한 힘과 의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이야기 중반 이후 주인공을 포함하여 다양한 특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초인’이라 총칭하는데, 원래라면 ‘초능력자’란 호칭이 더욱 자연스러울 텐데 굳이 특수한 명사를 쓰고 있다. 이런 요소들에 비추어 볼 때 타나카는 자신이 니체를 의식하고 이야기를 썼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초인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정리하자면 니체 사상과 리라이트에는 공통적으로 ‘압도적인 생의 긍정’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니체 사상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말한 니체의 사고방식은 ‘조금 위험하지 않나’ 하는 반응이 다소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니체에 대해 가장 오해하는 게 바로 이런 부분이다. 역사를 봐도 나치 독일3제국 수상 히틀러가 이 ‘힘에의 의지’를 입맛대로 해석하여 타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써 사용했다는 사실이 있다. (니체 자신은 오히려 국가주의를 혐오했음은 생전의 저작에도 나타나 있으며, 히틀러의 해석은 니체 본래의 사상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결론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누구나가 힘을 지향하여 자신의 욕망을 전력으로 충족하려는 사회에선 다툼이 끊이지 않으며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라 걱정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재밌게도 그는 대표작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에서 상당히 의외의 말을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건 또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니체의 철학이란 게 사실은 아무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지리멸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욕망대로 살라’ ‘의탁하거나 유보하지 말고 힘을 갈구하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의 약속을 지켜라’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니체의 이 말은 모순되는 게 아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휴일에 친구와 놀러갈 약속을 했다고 치자. 근데 당일이 되니까 영 내키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그냥 약속 깨버리자’는 사람과 ‘변덕으로 약속을 반려할 순 없다, 일어나서 가자’는 사람은 제삼자가 보기에 어느 쪽이 ‘강한’ 사람이겠는가. 그리고 니체의 이상적인 상像인 초인 역시 후자이다. 왜냐하면 초인이 추구하는 힘 중엔 그러한 정신적인 면의 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단순히 생존 욕구나 권력욕, 금전욕만을 상정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실현’을 목표하고 있다. 그리고 초인은 신과 같은 초월적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도 현실세계의 사고만으로 자신의 확실한 판단기준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모두가 초인을 목표로 하는 사회는 설령 종교가 없어도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기에 사회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게 니체의 생각이 아닐까.

애초에 선악의 윤리관을 형성하기 위해 어째서 신의 존재가 필요한 걸까? 니체는 ‘사실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신 같은 걸 상정하니까 우리의 사고가 거기서 정지해버리고 세상사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된 게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매우 추상적인 논의라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다음 사례를 보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수학의 정리가 있다. 직각삼각형에서 직교하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내용 말이다. 중학교 때 배워서 평생 써먹는 건데, 생각해보자. 중학생 때 우리가 이걸 배울 때 어떤 원리로 이게 성립하는지 배웠는가? 그냥 ‘그런 줄 알아’ 식으로 주입된 게 아닌가. 바꿔 말하면, “어느 날 신이 나타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옳다고 말했다. 그러니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옳은 것이다.” 라 해도 문제가 없는 셈이다. 가령 저런 식으로 믿는 중학생이 있었다 치자.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수학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정리 외에 수많은 공식에 대해서도 “신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옳은 것이다”라 믿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인생에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가 대학교 수학과를 진학해 수학자의 길을 꿈꾸게 된다면, 역시 이건 큰 애로 사항이 될 것이다. 왜냐면 “신이 그렇게 정했다”며 사고를 방치하고 있던 만큼 수학의 시야는 좁아져 있을 것이고 도저히 응용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즉 그는 ‘수학의 본질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그에게 신이 주는 신빙성은 곧 수많은 수학 정리들의 신빙성이었는데, 신을 믿지 않게 되면 그의 수학적 지평의 근간이 흔들릴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현대인들은 실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과학의 발달에 따라 신이나 사후 세계를 옛날처럼은 믿지 않게 되어 자신의 생의 근거를 상실해 감에도, 아직까지도 종교가 없이는 윤리관 같은 것은 만들 수 없다고 믿으며, 그저 팔짱을 끼고 사태의 악화를 보고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단 한 사람, 니체는 이렇게 외친다. “지금까지는 신에게 의존했지만 이제부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시간이다.” 라고.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마저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왜냐면 자신의 힘으로 그를 증명한다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 정리가 올바르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면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서도 지금까지 이상으로 자신을 갖고 그 정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니체는 선악의 가치 기준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쌓아올려 증명해 보자’ 는 의지를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생이란 수학과 달리 연역성이 떨어진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정답이 하나가 아닌’ 경우가 많아서 정리나 공식의 해명처럼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 그렇더라도 어느 정도는 모델화하는 게 가능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E는 먼 이국의 땅을 여행 중이다. 시가지에서 떨어진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어느 남자가 스쳐지나간다. 그는 금은보화를 온몸에 두르고 있다. 그걸 전부 현금화하면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정도이다. E는 휴대하고 있던 칼로 남자를 죽이고 금은보화를 훔쳐 달아난다.

E의 행위는 어딜 가더라도 ‘악’으로 취급받겠지만 어째서 이게 악이라 할 수 있을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치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강도・살인은 죄라고 법률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나라가 불과 얼마 전에 성립된지라 법률제도가 정식으로 정비되지 않았다면? 그럴 경우에도 이를 악이라 할 수 있을까? 혹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법이 심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자연법이 있고 이를 어긴 자는 사회적으로 박해받는다.” 그러나 E는 먼 이국을 여행하고 있었으니 금은보화를 현금화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회적으로 불리해질 일은 없다. 애당초 치안이 통하지 않는 산길에서 아무도 못 보는 사이 저지른 일이므로 E의 범행이 알려질 일은 없다. 따라서 E는 형벌을 포함해 사회적 제재는 일절 받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이 말이 나올 때가 됐다. “생명은 존귀한 것이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럼 살인은 안 하고 강도짓만 했다면 충분히 용인되는 게 아닌가? 그럼 또 이런 말이 나올 것이다. “인권의 침해이므로 이는 악이다. 살인은 타자의 생존권을 침해하며, 강도는 타자의 소유권을 침해하므로 어느 쪽이든 충분히 악이라 말할 수 있다.” 얼핏 들으면 납득할 만 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권리’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에 ‘타자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 것’이란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그의 말은 “죽이면 안되니까 죽이면 안된다. 뺏으면 안되니까 뺏으면 안된다.” 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다다르면 슬슬 ‘신’의 이름을 빌고 싶지 않을까? “하늘에서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살인이나 강도가 죄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결되어 버린다. 그러나 니체는 ‘신한테 도피하지 마’라고 말했다. 상식을 초월한 존재에 일절 의존하지 말고 ‘이 세계에 있는 것’만으로 E의 행동이 악이라고 어떻게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짝 관점을 틀어 보자. 방금 전 ‘E의 행위는 어딜 가더라도 ‘악’으로 취급받겠지만’ 이라 했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로 납득하고 넘어갔겠지만, 정말로 이게 올바른 견해일까? 예외는 어디든 있을 수 있으며, 설령 현대 사회에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과거 어느 역사 어느 문화에서는 예외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즉 ‘죽임당한 쪽이 잘못’이라 보는 가치관을 사회의 중심으로 두는 공동체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선 사회가 충분히 번영한 선진국에선 강도・살인을 선으로 취급하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이른바 도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강도・살인을 악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회, 더 파고들자면 타자를 상처 입히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는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고 해도 현재까지 지속하고 번영하지 못했단 뜻이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보다도 더욱 심층의 단계에서 인간의 사고에 새겨진 게 아닐까. 즉 ‘타자를 생각하는 감정’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사회나 이성 같은 걸 자각하기 훨씬 전부터 인류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 감정을 획득한 종이 인류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표현이 타당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이 ‘감정’이란 니체의 저작에선 그다지 직접적으로 논하지는 않는 관점이지만 그의 초인 사상에 대한 통찰을 심도 있게 하려면 꽤나 중요한 단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이상을 참작하고 방금 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가령 당신이 자기 욕망에 이끌려 부자 행인을 죽여 버렸을 때 어떤 감정이 마음속에 요동치는지 상상해 보라. ‘마침내 해냈다’는 달성감, ‘이걸로 놀고먹으며 살 수 있다’는 행복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플러스 감정과 섞여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이라는 후회, ‘면목이 없다’는 사죄의 마음이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들지 않는가. 그것은 종교보다도, 신앙보다도 더 깊은 부분에 근거한 인간으로서, 동물로서, 심지어는 생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그를 우리에게 부여한 건 예수도 무함마드도 부처도 아니다. 그들이 나타나기도 한참 전부터 인간이 갖고 있던 그 근원적인 감정을 떠올려내고 자각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열어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힘에의 의지’이며 니체 사상의 최종 도달 지점이 아닐까.



초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의 문제에 대처하는가



그렇다면 결국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방식이 이상적인 것일까? 니체 역시 그에 대해 기존의 개념으로 적확하게 표현하기 힘들어 ‘초인Übermensch’이란 어휘를 지어낸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초인의 삶의 방식을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신념’이 제일 타당하지 않을까? 앞서 말한 강도 살인의 예를 다시 불러오자. 만약 초인이 E와 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어떠한 행동을 취할까? 초인은 아마도 부유한 행인을 죽이려 들지도, 약탈을 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직후 누군가 초인의 앞에 나타나 “왜 살인도 약탈도 하지 않았는가?” 묻는다 치자. 초인은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건 나의 신념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인간인 초인이 이끌어내는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선 방금 전까지 그렇게나 시시콜콜 따지며 전전긍긍했는데 이제 와서 ‘신념’ 한 단어로 정리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좀 더 물고 늘어져 보자. “왜 그런 귀찮은 신념을 달고 다니는가? 그것만 없으면 당신은 저 자를 죽이고 그 돈으로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초인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평생 편하게 살기보다 나에게 몇 배나 중요한 건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것이 보다 큰 충족감을 준다.” 그럼 이렇게 의심해보기로 하자. “분명 당신은 어떠한 종교를 열렬히 신봉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르면 신이 전부 보고는 천벌을 내리거나 사후 지옥에 보낼 것이 두려워 강도나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초인은 이렇게 대답하리라. “나는 신도 부처도 사후 세계도 믿지 않는다. 비과학적인 가정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다. 나는 단지 다양한 인생 경험을 통해 내 나름대로 이것저것 궁리한 결과 ‘이렇게 살고 싶다.’는 지금의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신념이라는 단어의 울림에 압도된 우리를 앞에 두고 초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리라. “나의 이 신념의 근본에는 타자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방금 전 사람을 죽이면 나의 마음은 나름대로의 죄악감에 시달릴 것이다. 설령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해도 그늘 한 점 없이 맑은 마음으로 여생을 살아갈 순 없다. 말하자면 ‘꿈자리가 사납다’는 것이다. 타자를 지키려는 나의 이 감정은 아마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에 기원해 있으며, 간접적이겠지만 결국 나는 인간이란 종의 번영을 바라며 그에 수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마지막 문장에 한해 초인은 명백히 논리의 빈틈을 보인다. 그렇다면 반론해보기로 하자. “당신이 방금 전 사람을 죽이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인류 번영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지구상에는 70억 명의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를 죽인 순간 인류 전원에게 모종의 스위치가 눌려 살육 행위를 개시하는 것도 아니다. 즉 당신이 여기서 사람 하나를 죽여 금품을 갈취한들 그로 인한 인류나 사회 전체의 마이너스는 실질적으로 무시해도 될 정도로 작다. 결국 메리트 측면에서 당신이 강도 살인을 하는 게 훨씬 컸단 말이다.” 그러나 초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리라. “하하하, 당신 말이 맞다. 하지만 꿈자리가 사나우리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걸 신경 쓰다니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이 감정을 나는 소중히 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현 시점의 선택이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초인의 논리를 완전히 파쇄했다. 초인 자신도 이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초인은 웃으며 자신의 길을 관철할 것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초인다운 모습이다. 니체는 “인간은 분명 넘어설 수 있을 무언가다.”라 말했다.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던 시대에 맑고 올바른 길을 가는 가치는 신이 보증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신은 죽었다.’ 이성과 과학의 광명 아래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자신을 행복으로 이끄는 도표마저도 전부 잃어버린 현대 세계를 니체는 ‘위대한 정오’라 부르며 어디로 나아가든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라는 그러한 상황을 ‘영원회귀’라 칭했다. 보통 인간들이라면 “이제 모든 행위는 무의미하다”는 선고가 내려지면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다르다. “좋아, 그럼 한 번 더!(Wohlan! Noch Ein Mal!)”라며 굳이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 길을 나아가는 의미 같은 건 없다.’ ‘논리적으로 철통같지도 않다.’ 비판받는다 해도 그는 쾌활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걷고 싶으니 걷는 길이다. 신념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삶의 방식도 꽤 즐겁다.” 이 순간 분명 그는 ‘인간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진정한 의미의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말하자면 종교나 신앙 같은 애매한 것들을 배제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실적인 답을 모색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국 이론에 구멍이 난 신념이란 것을 들고 나온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비논리적인 ‘종교’란 것에서 또 다른 비논리인 ‘신념’으로 갈아탔을 뿐이지 않느냐고 말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 ‘갈아탐’에서 커다란 의미를 발견했기에 니체는 초인 사상을 역설한 것이다. 니체에게 종교는 사람들의 눈을 ‘내세’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세’의 미련을 끊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종교인들은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역설할 것이다. “내세만이 진실이며 이상이다. 현세는 불완전한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세에서 아무리 영달을 구해도 헛되며 오히려 무욕으로 소박하게 사는 것이 사후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저지른 과오’라며 정면으로 부정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던 게 아닐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리고 아마도 없을 사후 세계나 신을 위해서 어째서 현실 세계의 행복을 뒷전으로 미루어야 하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의의였거늘 실제로는 인간의 행복을 제한할 뿐인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신도는 맛있는 만찬을 배불리 먹고 싶다고 생각해도 굳이 사치를 멀리하지 않는가.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픈 게 있어도 그것이 교리에 반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염원을 억지로라도 억눌러 단념해버리지 않는가. 그렇게 ‘신을 위하여’ ‘사후의 천국행을 위하여’ 라 자신을 다독이며 청빈한 인생을 완수하고서는 마침내 죽어 참된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나 인내에 인내를 거듭했으니 사후는 필경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더니 ‘죽고 나니 신도 천국도 없었다’는 결말이면 너무나 불합리하다. 구원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니체는 말한다. “그렇다면 족쇄에 불과한 그런 신앙은 차라리 내다버리는 게 낫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힘껏 하면 된다. 지금 눈앞의 생을 똑바로 직시하고, 마음껏 도전하고 탐구하고 구가하라. 그 이상의 정의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니체 사상의 압도적인 긍정은 이른바 자신을 가두는 족쇄를 부수고 자유를 손에 넣은 순간과 같은 희망과 자기 주체 정신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가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회에선 질서가 유지되지 못함이 자명하다. 그러나 니체가 역설하는 초인 사상은 그 문제도 극복하고 있다. 초인은 묶여 있던 족쇄를 자기 손으로 끊어냈다고 해서 자유로운 상태를 만끽한 나머지 방종하고 폭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족쇄에 묶여 있으니 얌전하고 족쇄에서 풀려나면 맹위를 떨치면 그건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인간의 이성이 고작 그런 것이겠는가. 니체는 힘주어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라는 족쇄를 파괴하고 그 대신 ‘신념’이라는 마음가짐을 품음으로써 자신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을 지키려 하는 초인의 삶의 양식이야말로 인간이 무엇보다 목표로 해야 할 것이며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본래의 강함이란 그에 대해서야말로 발휘되는 것이다.

방금 전의 강도 살인의 예에서 최종 결론을 내 보도록 하자. 눈앞의 행인을 죽이면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종교의 신도는 ‘죽이지 않고, 빼앗지도 않는다.’는 선택을 한다.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사후에 그러한 행위에 따라 상벌이 내려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천벌에 대한 공포심이며 장래의 보다 큰 행복에 억지로 눈을 향함으로써 현세의 욕망을 못 본 체 하는 도피 행위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런 장래의 커다란 행복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인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않고, 빼앗지도 않’지만 그 심리 상태는 종교의 신도와는 전혀 다르다. 초인의 강한 시선은 결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내세에 있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세계만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이런저런 갈등들을 전부 받아들이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신념을 수행한다. 논리적으로 득실을 따진다면 죽이고 빼앗는 게 명백히 자신에게 플러스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초인은 당당하게 손해 보는 길을 택하고 만족하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친 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떳떳하다고, 혹은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신념대로의 행동을 관철할 수 있었다. 누군가 칭찬해주지 않더라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종교의 신도는 ‘벌 받고 싶지 않으니 참는다.’는 부정적인 지향성이 선행하고 또 사후의 보상을 기대하는 점에서 결국은 타산적이다. 게다가 그 타산은 배신당한다. 자신의 인생의 척도를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정하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인 나약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초인의 생의 방식은 웅대하고 눈부시며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 있다. 더욱이 초인의 마음은 늘 자기실현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강도 살인의 예에선 종교의 신도나 초인이나 외면적으론 똑같은 행동을 취했지만 전 생애에 대한 양자의 태도의 차이는 평소 일상생활의 여러 장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자면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자신의 다리로 내딛어라. 다른 사람에 의해 높은 곳으로 옮겨지면 안된다. 다른 사람의 등이나 머리에 타서는 안된다.”



종교의 형식주의화에 대항하기 위한 니체 철학



이와 같이 니체 사상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강조하고픈 매우 중요한 포인트는 초인이 내포한 신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의 덕목이며 따라서 자신의 성장이나 인생 경험에 맞춰 수시로 갱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몇 십 년 살다보면 사람은 당연히 인생관이 바뀐다. ‘그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시야가 넓어진 지금은 이 선택지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신념 자체도 계속 진화를 거듭하며 인생의 다양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한편 종교의 계율에는 그 정도의 자유도는 기대할 수 없다. 기독교의 신약 성서는 요한묵시록 최종장(22장)에서 “만약 이 성서에 새로이 글자를 추가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환란을 내리시리라. 만약 이 성서의 어느 부분을 삭제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거두실 것이라.” 이런 식으로 꽤 섬뜩한 경고문까지 적혀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걸 전면적으로 나쁘다 비판하진 않지만 몇 백, 몇 천 년 전 사회에 살아 있던 인간의 사상을 한 글자, 한 어절도 바꾸지 않고 현대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런 점에 대한 반성이 있었는지 초대 교회가 출현하고 6백 년 후 무하마드가 새로이 창시한 이슬람교는 경전 코란을 기조로 하여 시대에 따라 갱신되는 샤리아(이슬람법)의 운용이 종교 내 시스템으로서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합리적인 제도로서 주효하던 샤리아도 어디까지나 무하마드의 언동의 해석의 변경이 주를 이루며, 언동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신도에게 용서받지 못할 행위로 인식될 것이다. 종교가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한 예언자나 경전이 권위를 갖는 건 피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시대가 진행되며 어긋남이나 모순이 늘어나는 건 치명적이라 할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종교가 갖는 하나의 큰 결점이라 생각한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그러한 종교의 약점을 완전히 극복한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니체 본인이 눈치 챘을지는 모르겠지만 위에 말한 것에 추가해서 말하자면 초인이 종교의 신자보다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니체 사상을 평가할 때 가장 감탄할 만한 게 아닌가 싶다. 바로 ‘초인의 신념은 그 자신에 내재한 감정에 의거한다는’ 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존중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인간에게는 타자를 배려하는 심정, 무의미하게 타자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가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모든 악행이나 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예 무효한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의 심중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가 역설한 ‘이웃 사랑’의 개념과 동일하지 않은가. 그러나 기독교는 그 사랑의 소중함을 민중에게 널리 이해시키기 위해 부득이 전지전능한 신이란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연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으며 기독교는 전 세계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너 자신을 사랑하듯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물론 그것 자체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고귀한 사상의 침투 이면에 감춰진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신의 음성 혹은 그리스도의 음성으로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는 본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음성으로서 갖고 있던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본인은 어디까지나 ‘자신 안의 그 목소리를 깨달아라’ ‘그를 소중히 하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며 가르침이 권위가 되는 사이 어느새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 하라 말씀하셨으니 타인을 섬기지 않으면 안 돼.” 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즉 신이라는 초월자가 발하는 눈부신 휘광에 의해 사랑의 명분이 덧칠해져 그것이 애당초 우리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모두가 신을 마음으로부터 외경하던 시대였다면 사회는 그런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과 합리주의가 세력을 떨치고 신앙의 신빙성이 엷어진 현대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신도 천국도 없으니까 더 이상 이웃 사랑을 실천할 가치 역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원상복귀 이하의 상태이며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이전보다 사회도덕이 저하하고 인류 번영과 평화는 저지된 꼴이다. 그렇다면 이 결말을 피하기 위해 남은 길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인류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다시금 자각하는 것이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 감정과 같은 것을 이번엔 각자가 신의 이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재발견해 그 위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신념을 구축해가면 된다. 과거의 초월적인 신앙이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의해 굳게 경직된 마음의 얼음을 깨뜨리고, 그 깊은 너머에서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란 이름의 불씨를 발견해, 이를 부채질해 자신을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불꽃으로 바꾸는, 그러한 강한 생의 방식을 우리는 목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니체의 초인 사상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한때 유대교가 빠져 있던 과잉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형태로 ‘중요한 건 마음이다’라 주장하여 기독교를 새로이 확립했다. 그러나 2천 년의 세월을 거쳐 그 가르침도 권위의 옷을 입어버렸고, 추종과 타산으로 얼룩진 세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다시금 ‘자신의 마음속을 바라보라’는 경구를 설파한 자가 니체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너희들은 아직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기도 전에 이 나를 찾아냈다. 신자란 자들은 모두 그렇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은 이다지도 초라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명하노라.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발견하라. 그리고 너희들 모두가 나를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나는 너희들의 곁으로 돌아오리라.”

니체는 인류를 이끌 진정한 예언자(임의로 차라투스트라라 부른다)가 나타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리라고 생각했다.



『Rewrite』의 스토리에 담긴 주제와 의의



니체 사상에 대해 참 길게도 설명하고 예시를 들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빌드 업을 기반으로 리라이트의 진수를 접해 보자. 작품의 주인공 텐노지 코타로는 자신의 신체 능력을 마음대로 강화할 수 있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정보를 임의로 고쳐 쓸 수 있는 ‘리라이트 능력자’라 불리는 인간인데, 동시에 그는 자신의 생에 막연한 공허함을 안고 있으며 녹화綠化도시의 학원의 보편적인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있을 곳居場所을 구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는 늘 자신의 특수능력을 감추고 진심을 다하기를 회피하면서도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안심감을 느낀다. 그러나 개성적인 친구들과 지내는 즐거운 일상에 점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마침내 그는 인류가 직면한 멸망의 예언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구 규모의 투쟁의 실태를 알게 된다. 그 진상은 녹화도시에서 텐노지 코타로의 앞에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던 수수께끼의 소녀 카가리篝가 지구의 의사意思를 구상화한 ‘별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미 한계를 맞고 있는 지구 환경을 재생하기 위해 머지않아 그녀 자신의 손으로 인류에게 재정裁定을 내리리란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마텔マ─テル이란 이름의 환경보전단체를 모체로 하여 카가리의 재정을 수행하려는 ‘가이아주의자’와 어디까지나 인류의 존속을 내걸고 카가리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가디언’ 사이의 대립이 발생, 수면 아래서 치열한 전투 행위가 펼쳐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리고 코타로의 친구였던 학생들이 사실 누구는 마텔의 성녀 혹은 마법사, 누구는 가디언 소속 전투원, 또 누구는 가이아주의자와는 다른 계통의 대대로 독자적으로 카가리를 수호하는 사명을 이어받은 일족 ‘드루이드ドルイド’의 소녀임이 밝혀지고, 게임 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코타로가 어느 진영에 붙는지가 스토리 분기가 되고 각각 그에 따른 엔딩이 마련되어 있다. 코타로는 자신의 리라이트 능력을 발휘해 전사로서 성장하지만 어느 루트든 결말은 인류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카가리는 인류에게 내릴 재정을 피하고 싶다면 인류의 ‘좋은 기억’을 보이라고 충고하지만, 인류가 독선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나 환경보호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주장해도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고, 결국 세계는 종언을 맞게 된다.

그러나 모든 엔딩을 클리어하고 나타나는 새로운 챕터 ‘Moon’으로 진입하면 코타로의 혼이 월면月面에서 눈을 뜨며, 이야기는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거기엔 지구의 카가리와 매우 닮은 ‘달의 카가리’라 불리는 소녀가 있고, 그녀는 생물이 없는 달 위에서 혼자 유구의 시간을 지내며 지구 문명에 대한 연구를 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탁월한 지성으로 지구 문명이 다다를 무수한 분기 세계 전부를 파악하고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멸망의 운명에 대해 간섭과 관측을 계속하며 생명 존속의 가능성을 줄곧 탐색하고 있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지금까지 주인공 시점에서 보아 온 몇 개의 엔딩이 달의 카가리가 관측해 온 분기 세계의 극히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코타로 역시 그를 알고는 멸망 이외의 결말을 찾아내 거기에 도달하고자 그녀가 행하던 ‘생명의 이론’ 연구를 돕기로 한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는 자기 근저에 자아의식을 규정하는 프로토콜과 같은 존재를 슬쩍 들여다보는 등 생과 개인에 관한 깊은 식견을 얻음과 동시에 점점 표정이 풍부해져가는 달의 카가리에 대해 모종의 친근감을 싹틔우게 된다.

이윽고 달의 카가리는 ‘생명의 이론’을 어떻게든 형태화하나 그것은 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선 결국 불확정적이라는 연약한 이론이었다. 그녀에겐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녀가 이끌어 낸 최선의 성과에 코타로는 자신이 가벼운 마음으로 평을 남기고 있음을 깨닫고는, 이론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구석에 “언젠가 다시 너와 만나고 싶어.”라고 적는다. 그러나 달의 카가리가 이를 기반으로 이론을 재구축하자 불확정적이던 한 갈래 길이 무수한 가지를 이루어 미래로 펼쳐지며 생명 존속의 방법론이 마침내 완성에 다다른다. 그리고 코타로는 생명에게 남겨진 그 유일한 길을 실천하고자 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달의 카가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달에서 지구로 생명의 회랑을 건너고, 죽음의 별이 된 지구를 다시 생명의 빛이 감싸는 장면에서 ‘Moon’ 챕터는 끝난다. 그 후 억겁의 세월 동안 가혹한 도태와 진화 끝에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텐노지 코타로라는 자아가 태어나는 시점에서 최종장 ‘Terra’가 시작한다.

최종장 Terra에선 이야기 전반과 똑같은 녹화도시나 학원을 무대로 하여 똑같은 등장인물들의 면면과 마주치지만 어딘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코타로에게 더 이상 달세계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과거에 생명의 이론에 새긴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어.”라는 감정의 불씨만은 강하게 남아 있어 그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을 비춰 준다. (실제 플레이 시 도처에서 선택지가 출현하는데 이전까지는 순전히 플레이어(코타로)의 선택이었다면 여기서부턴 올바른 선택지 옆에 불씨 같은 것이 빛나고 있어 플레이어(코타로)가 망설이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이기에 가능한 장치 연출이 존재한다) 이리하여 그는 가이아주의자, 가디언, 드루이드 어느 진영에도 경도되지 않고 자신 마음속의 카가리가 가리키는 길을 관철하는 독립적이고 강고한 인간으로서 리라이트 능력을 전력으로 구사해 싸워나간다. 이윽고 이 세계도 멸망이 시작되어 차례차례 천지개변이 발생하는 가운데 코타로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 마침내 지구의 카가리에게 다다른다. 절체절명의 순간 코타로가 끝끝내 눈물을 쏟으며 선택한 행동은 ‘지구의 카가리를 찔러 죽인다.’였다.

“카가리가 바란 최선의 기억… 그것은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한 힘과 의지가 아니었어? 인류가 거의 손을 놓아버린 것. 별을 너무나 소중히 하려고 한 바람에 사람들이 놓치고 있던 것. 설령 어머니라 부르는 이 별을 탕진하고 소진시켜서라도 우린 번성하고 번영해나가지 않으면 안 돼.”

기나긴 여정 끝에 도달한 이 각오를 텐노지 코타로는 인류를 대표하여 지구의 카가리에게 밝힌다. 그리고 찔린 카가리는 마치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온화하게 “참 잘했어요.”라 남기고는 미소와 함께 사라져간다. 그러나 코타로 역시 리라이트 능력을 극한까지 사용하는 바람에 나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선택 덕분에 가까스로 멸망을 모면하고 빛을 되찾아가는 세계에 “만약 언젠가 하늘에 다다를 자가 있다면 달에 있는 소녀를 발견해주길 바란다. 오직 혼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곁에 잠시 들러주길 바란다.”는 목소리가 어디까지고 울려 퍼지고,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돌아보니 기존의 사물의 짜임새에 속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관철한 주인공의 모습은 그야말로 니체의 초인 사상의 체현이라 말할 수 있는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역시 그의 내면의 충동을 계속 발현한 카가리의 존재이며,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달세계에서 그가 영혼에 새긴 달의 카가리라는 타자를 지향하는 감정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지구와 대비되는 ‘타자’의 달이라는, 우주 공간을 향한 피아의 투영이라는 점도 작품의 묘미이지만 무엇보다도 코타로가 가진 감정이 그라는 한 명의 인간의 강고한 삶의 방식의 주춧돌이 되어 그것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번성하고 번영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류 번영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결말로 이어지는 시퀀스야말로, 타나카 로미오가 이 작품에 담은 가장 상징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정리하자면 『Rewrite』의 주제를 니체 사상이라는 단면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혹은 거꾸로 니체 사상을 『Rewrite』의 주제라는 단면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타자애他者愛의 행동도 그것은 결국 자기애自己愛의 다른 얼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걸로 괜찮다. 그러한 기본적인 걸 놓치면 안 된다. 우리들 인류에게 필요한 건 이타利他까지도 포함한 이기利己를 있는 힘껏 긍정하는 것이다.”라고.

서장에선 환경 문제를 테마로 한 작품이라 생각하게 해 놓고 최종적으로는 지구를 희생해서라도 인류의 번영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역동적인 주제 전환에 “로미오한테 한 방 먹었다”고 감탄한 유저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도 물론이거니와 별의 화신 카가리나 생명력의 화신인 수많은 마물 등 판타지 요소도 잔뜩 들어가 있고, 한편으론 진화론에 기초한 수십억 년의 생명 도태의 역사 및 ‘지구와 달’이란 우주 차원의 피아 상징도 눈여겨 볼 요소로, 시공간적으로 장대히 펼쳐지는 스펙터클을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게다가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정신의 성찰이라는 미시적인 시점에서 인류사의 수렴과 번영이라는 거시적인 시점까지 탁월하게 전환시키고 교차시키고 마지막에는 융합시키며 니체의 초인 사상을 타나카 자신의 과제인 ‘자신 VS 타자’의 새로운 지평으로 승화시켰다. 『Rewrite』야말로 미소녀 게임에서 달성된 철학과 문학의 해후이며 현대 사상이 낳은 이야기 예술의 극치로서 앞으로도 조명되어야 할 걸작이라 확신한다.



참고 문헌


Zur Genealogie der Moral』F.W.Nietsche 著, 김정현 譯

『Also sprach Zarathustra』F.W.Nietsche 著, 정동호 譯

『Rewrite』原作 : Key/ビジュアルアーツ  シナリオ : 田中ロミオ、竜騎士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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