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으레 친구의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친구의 조건이나 자격에 대해 현실적인 회의가 들 때 나온다. 내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A는 여성 인권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수시로 페미니즘 책이란 걸 가져와 몇몇 구절을 읽힌다. B는 늘 똑똑하고 냉정하며 빈틈이 없다. 이 두 친구에게 ‘친구란 무엇일까’를 질문해 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도서관 로비 창가에는 A의 열변을 토하는 목소리가 가득 차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점차 빠지기 시작한다.
“난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해 봐, 유리천장과 외모 코르셋을 달고 사는 여자들을 공감할 수 있는 너희 자신을. 조금 더 인간으로서 나아지고 성숙해질 수 있잖아.”
내가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이 B가 입을 연다.
“나는 이런 너를 손절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나아지고 성숙해진 네가 그렇지 않은 우리를 인내하느라 고생이 많다.”
A의 인상이 구겨진다. 평소와 다름없는 B의 말투에 A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직선적으로 대꾸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비꼬면서 변하려 하지 않는 게 요즘 남자들이지. 너처럼 맨스플레인에 갇혀서 도저히 공감하지 못하는 한국 남자들이 ‘한남충’ 이라 불리는 건 자업자득이야.”
“아, 그래? 그럼 맨날 하던 똑같은 얘기지만 오늘 또 네 신념을 팩트로 조져 줘야겠다. 내가 이렇게 착한 친구야, 이 찌질아.”
나는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맨날 똑같은 내용으로 말싸움하면서도 주먹다짐까진 가지 않고,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또 같이 다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를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 참 좋은 친구들이다.
“…유리천장 같은 소리. 너 지금 여자 안 뽑는 기업들 정부가 쫑크 먹이는 거 모르냐?”
“여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인위적 개입이 필요한 건 당연하지.”
“그놈의 코르셋 상관없이 남자의 분야에 도전하는 여자들은 왜 페미니즘을 입에 안 달고 사냐?”
“너는 세계 자체가 여자에게 불리하단 대전제를 무시하고 있어. 보장과 우대 역시 늘 당연해야 하는 거라고…”
슬슬 지루해지려 한다. 내가 나서서 이야기의 흐름을 꺾는다.
“오늘 3대 3 미팅하기로 했지? 아직 시간 괜찮나?”
B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A에게 말한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까 우리 A는 박해받는 여성 인권 보장에 앞장서는 ‘탈 한남’ 이었지? 그럼 친구로서 신념을 관철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너는 그 중 제일 반반한 여자하고 제일 별로인 여자 중 누굴 고를 거야?”
A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연다.
“음, 그야 제일 별로인 여자지. 제일 외모로 인정을 못 받을 테니까.”
“야! 이거 봐, 너 딱 걸렸어. ‘제일 외모로 인정을 못 받아’? 이거 봐. 너 지금 제일 별로인 여자라며 코르셋 씌웠네.”
A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러더니 가까스로 말문을 연다.
“애초에 외모로 고르니 마니 하는 게 유치하고 천박하지 않아? 제일 착하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최고지.”
“좋아, 난 유치하고 천박하니까 예쁜 여자만 노리고 제일 못생긴 애 너한테 밀어줄게.”
“아니, 애초에 착하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좋다니까. 왜 이상한 소리를 하냐…”
“야 임마. 네 ‘착하고 마음이 잘 맞는’ 기준을 너 말고 누가 아냐? 꼴랑 카페에서 한 시간 이야기하는 거 가지고 잘도 보편타당한 ‘착하고 마음이 맞음’을 알겠다. 이놈아. 네가 예쁜 여자 좋아하는 게 죄악이라고 나나 정필이가 그러겠냐? 말을 안 하면 중간은 간다.”
A는 입을 다문 채 B에게서 고개를 돌려 애꿎은 창밖을 본다. B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다.
“너도 유튜브에서 조던 패터슨이나 마제 좀 봐라. 그 사람들이 맞는 게 뭔지 다 알려준다고.”
B는 늘 이렇게 유튜브에서 본 유익한 정보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워서 A와 내 앞에서 말하곤 한다. 아는 게 많아 입담이 좋고 홍대에서 핫하다는 옷을 챙겨 입고 다니니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오늘 미팅에서도 누굴 노리든 어렵지 않게 애프터를 받아낼 것이다.
그런데 사실 B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다. B는 늘 ‘그 여자친구 역시 자신의 입담과 외모에 넘어갔다’ ‘어차피 이 나이에는 다들 조건보고 연애하는 거니 딴 데서 자기처럼 할 거다’ 라 말한다.
A가 B를 째려보며 말한다.
“오늘도 네가 찍은 애랑 2차 갈 거지?”
“응.”
“분위기 좋으면 또 같이 잘 거지?”
“당연하지.”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B에게 묻는다.
“네가 여자친구한테 잘못하고 있는 건 알지?”
“뭘 또 새삼스레 물어보냐.”
“걔도 딴 남자랑 놀아나는 거 직접 본 적은 없지?”
“야, 됐어. 됐어. 그래 내가 나쁜 놈이다~”
B는 열정적인 A와 달리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 똑똑한 친구다. 늘 시큰둥하고 쌀쌀맞은 말투를 하며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딴죽을 걸지만, 그것이 일상 속에서 또래로서의 운신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다들 그렇게 살아. 상대가 의리를 지키지 않는데 나 혼자 지키면 헌신짝 되는 거지. 언제부터 세상이 그렇게 다정한 사람들로 가득했냐. 적당히 섞여들어 실리를 챙기는 게 현명한 거지. 거짓말도 좀 쳐 가면서.”
자, A, B. 이렇게 다 썼으니까 조별과제 낸다?
야, 정필아 너 B한테 원한 있냐? 조원들을 주인공으로 픽션 쓰는 게 과젠데 팩트를 쓰고 ㅋㅋㅋㅋㅋ
A 너 쪼개지 마라. 야, 박정필. 너 나 멕이려고 작정했냐? 그리고 A가 평소에 얼마나 지랄 맞은데 이렇게 순화해주냐?
시끄러 이놈들아. 그럼 다음부터는 너희가 직접 써. 남 이야기 따라할 줄이나 알고 자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쓸 줄 모르는 주제에.
2019.03.17
김 영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