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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Oct 15. 2023

마지막 날은 늘 감상적이 돼

8월 8일 화요일 몬트리올 시내

몬트리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하늘은 전날처럼 흐렸지만 비가 내리진 않았다. 일요일 저녁에 사태브라더스Satay Brothers에서 밥을 먹고 나와 지하철로 가는 길에 발견했던 그린스팟Greenspot이라는 이름의 다이너에 현지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린스팟은 <트윈픽스>의 더블R 카페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쿠퍼 요원 흉내를 내며 체리파이와 블랙커피를 시키고 싶었지만 메뉴에 파이 종류는 없었다. 폭주족 버전의 케이트 맥키넌처럼 생긴 웨이트리스에게 팬케익과 스크램블 에그,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고 빈티지한 인테리어 사진을 실컷 찍었다. 컨셉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오래된 레스토랑이어서 에어컨 바람을 5분만 쐬어도 곰팡이 먼지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저렇게 낡은 에어컨 모델에 교체할 수 있는 필터가 아직도 생산되고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마주 앉은 현지가 일주일 동안 몬트리올 가이드(자신을 지칭한 것)가 안내한 코스 어땠냐며 별점을 매겨보라고 해서 5점 만점에 20점이라고 답했다. 현지는 "언니들이 몬트리올의 전성기인 여름에 와서 할 수 있는 가장 재밌는 액티비티를 전부 즐길 수 있었다"고 했다. 몬트리올은 11월부터 4월까지 눈이 내린다. 7월부터 8월, 단 두달 한여름 날씨가 반짝 빛나는데 그래봐야 최고기온 27도 정도에 습도는 50% 이하인 날씨다. 요즘은 이상기후로 예년보다 비가 자주 온다고는 하지만, 이 때가 몬트리올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오늘 하루는 쇼핑의 날로 정했다. 마지막 날이니 부피나 무게에 아랑곳 않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서 트렁크에 쑤셔 넣기로 했다. 전날 이튼 센터에서 봐 둔 물건이 몇 개 있어, 앳워터Atwater 마켓을 들렀다가 다시 이튼 센터로 돌아와서 추가로 더 쇼핑을 하고 집에 짐을 두기로 했다. 그린스팟에서 밥을 먹고 나와 두 블럭 정도 걸어 커피를 사고-여전히 평범한 커피-더 걸어서 앳워터Atwater 마켓으로 향했다. 장탈롱 마켓과는 다르게 꽃이나 가공 식료품이 많다고 한다. 시내에서 가장 크다는 장탈롱 마켓도 동네 시장만 했는데, 앳워터는 장탈롱 마켓의 절반 정도 되는 규모였다. 앳워터는 농산물보다 샤퀴테리, 치즈, 양념 종류가 많았다. 요즘 난 집에서 요리를 하진 않지만 아빠에게 선물이라도 사다줘야겠단 생각에 올리브오일 종류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가족친지들과 회사에 선물할 메이플 잼, 캔디, 작은 병에 든 시럽 등을 샀다. 광목실로 만든 장바구니가 금새 바닥이 뚫릴 것처럼 길게 중력 작용 방향으로 늘어졌다.


대파 한 단을 꽃다발처럼 든 현지와 함께 이튼 센터로 향할 때 쯤 되자 하늘이 쨍하게 개었다. 대중교통과 도보로 이동하며, 누가 먼저 물어봤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피식대학> 채널에서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누굴 고르겠냐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야기는 이상형 월드컵으로 이어져 빠니보틀 대 곽튜브로 흘러갔다. 현지가 캐나다에 가기 전, 우리 둘을 포함한 몇 명의 여자 무리는 매년 연말마다 호텔방에 모여 연말정산 시상식을 하곤 했다. 샴페인을 따르고, 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호텔방 TV에 핸드폰을 연결한다. 올해의 영화, 올해의 노래 부터 시작해 올해의 유튜버, 올해의 아이돌, 올해의 배우 등등까지 계속해서 밤새 토론을 이어 가는 것이다. 이상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종국엔 염따나 성시경 같이 ‘애인 삼기 싫은 남자' 월드컵 같은 내용으로 수렴 되곤 했다. 빈 신전 떡볶이 플라스틱 그릇을 비닐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린 뒤 그 앞에 와인병을 나래비 세우고 다음날 아침에 호텔을 나와 냉면을 먹는 것이 이 파티의 마무리였다. 현지가 캐나다에 간지 1년 조금 남짓한 시간이지만 몬트리올 시내를 거닐며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자니 족히 10년은 넘은 추억같은 향수를 불러왔다. 몬트리올에 있는 내내 현지는 우리를 위해 아침마다 쌀밥을 지어 한식 밥상을 차려주고 밤에는 인터넷을 뒤져 산 냉동 순대를 썰고 떡볶이를 끓여주었다. 마치 시골에서 손주들이 오길 기다렸던 외할머니처럼,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바베큐 때 구울 갈비 핏물 빼는 사진을 보내왔다. 겨울에 오면 아이스하키 경기도 보고 숲 속 산장에도 놀러 가자며 ‘또 와'라는 말을 계속 했다. 그녀의 이런 정다움이, 실제보다 더 긴 시간과 아련함을 더해 서울에서의 우리 추억을 윤색한 것 같다. 이튼 센터에서 자기가 ‘늘 먹던 대로' 주문해 준 버블티 포장지에는 주문자명 Hyunji와 선택한 옵션 내역이 적혀 있었다. 이 다정함의 디테일을 기억하려고 포장지를 사진으로 남겼다.


나의 노스탤지어를 방해하듯 먼지 한 점 없이 맑은 동부 캐나다의 공기는 극심한 알러지를 선사했다. 이름 모를 나무와 꽃들의 미세한 분비물들이 내 비강에 엄청난 테러를 가하고 있어 <짱구는 못말려> 속 맹구처럼 콧물이 흘렀다. 항히스타민제를 챙겨왔지만 한 알로는 어림도 없어 이튼 센터에 다녀와 두 알째 지르텍을 먹고 기절에 가까운 잠에 빠져들었다. 라켓도 싸들고 올까 고민할 정도로 테니스에 미쳐 있는 나를 위해 현지가 오후에 자기 코치에게 테니스 레슨을 예약해 주었었다. 집에서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알람 소리도, 현지가 나를 깨우는 소리도 꿈결 속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결국 현지가 나 대신 레슨을 받으러 갔고 네 시간 정도 사경을 헤매다 일어나 핸드폰을 보니 저녁 시간에 맞춰 슈워츠Schwartz's에서 보자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구글 지도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공공 자전거를 탔다. 얼굴에 바람을 맞으니 그제야 좀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슈워츠 앞에 늘어선 긴 줄에서 현지와 다시 만날 때가 돼서야 두 알의 항히스타민제가 완전히 해독된 기분이 들었다. 그린스팟만큼 오래 된 식당 슈워츠는 훨씬 손님이 많았고 직원들이 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어 부산역 앞 국밥 맛집을 연상시켰다. 두 번째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옆 자리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며 산더미 같은 양배추 피클과 브리스킷 샌드위치를 부지런히 씹어 넘기는 것으로 몬트리올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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