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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Oct 15. 2023

귀국에 3일 걸린 사연

8월 9일 밴쿠버 국제공항

비행기나 기차 같이 시간 맞춰 타야하는 교통편에 대해 강박이 있다. 아침 9시 반쯤 비행기를 타야 하니 네 시간 전에는 일어나야겠다 싶었다. 게다가 착륙하는 날 한국에는 태풍 예보가 있어 전날부터 수시로 이메일과 문자 인박스를 열어 보았다. 당일 새벽에 눈을 떠 핸드폰을 확인하니, 비행 스케줄이 변경되었다는 알림이 이메일로 와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의 기억에 노이로제를 느끼며 내용을 확인하니, 에어 캐나다 직원 근무일수 조정이 필요해 환승지가 변경 되었다고 한다. 원래 시카고를 경유하는 노선이었으나 밴쿠버 경유, 더 짧은 환승 대기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태풍이 저녁에 온다고 하니 미리 착륙 하겠다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온라인 체크인을 하는데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 옵션이 눈에 띄었다. 밴쿠버-인천 노선은 11시간 비행이라, 다른 미주 노선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다. 비즈니스 업그레이드 비용도 내 생각보다 저렴했다. 5분 정도 고민하다가 ‘업그레이드' 옵션을 선택하고 결제를 진행했다. 이 아름다운 휴가의 대미를 장식하려면 이 정돈 돼야지.


집주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홀로 공항으로 출발했다. 몬트리올에서 밴쿠버까지 네 시간 비행 후  90분 간의 환승 대기 시간, 그리고 밴쿠버에서 인천까지 열한 시간의 비행이 예정돼 있었다. 네 시간의 에어캐나다 국내선 비행은 고통 그 자체였다. 냉장고처럼 추운 기내 온도에 덜덜 떨며 승무원에게 담요를 달라 요청했더니 이 비행기에는 담요를 싣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상식과 너무 다른 대답에 벙찐 채 이를 위아래로 부닥치며 덜덜 떨고 있는데 옆자리 아저씨는 익숙하다는 듯이 가방에서 락앤락 통에 싸온 음식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기내식이 물 한병까지 모두 유료였다. 체크인과 짐 부치기까지 모두 셀프 서비스로 바뀐 몬트리올 공항을 떠올리며 항공 서비스가 점점 열화 되고 있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이럴 거면 항공료를 절반으로 내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 멀미약 때문에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밴쿠버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빨리 이 냉장고를 탈출하고 싶었다. 설마 11시간짜리 노선에 담요가 없지는 않겠지, 게다가 비즈니스 클래스인데, 같은 혼잣말을 하며 환승 게이트를 찾아 전광판을 두리번 거렸다.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인천행 비행편이 지연되고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아직 모르니까, 기다려보자, 라고 중얼거렸다.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게이트 앞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출발 게이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카운터에 있는 직원들을 계속 노려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 알림음과 동시에 방송이 시작 됐다. 도착일 서울의 태풍 예보 때문에 비행편을 취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체 결함이나 항공사 이슈가 아닌 천재지변 원인이기 때문에 에어캐나다는 현지 호텔이나 다른 어떤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취소 된 항공편은 내일 날짜로 재예약 후 이메일로 알려주겠단다. 속으로 욕을 지껄이고 있는데 옆에 있던 70대 한국인 할머니가 이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 상황을 설명 드렸다. 할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자기는 캘거리에서 손자가 부킹해 비행기를 태워줬고 혼자 환승해야 하는데 그럼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이메일로 공지를 확인할 길이 없는 이 할머니를 모시고 카운터로 다가가 에어캐나다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분은 혼자 환승하시는데다 항공편 예약을 본인이 직접 안하셨어요. 별도로 안내를 좀 해주세요.” 방어적으로 몰려오는 승객들의 컴플레인을 응대하고 있떤 한국인 직원은 나와 할머니를 슥 훑어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일행이세요?” “아뇨. 지금 이 분 혼자 환승하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럼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기분이 상한 나는 더 이상 직원에게 대답하지 않고 할머니께 저 직원이 자기가 알아서 해준다니 옆에 붙어 계시라 당부하고 뒤로 빠졌다. 이번에도 히스패닉 승객들이 가장 큰 소리로 카운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 해브 노 머니 포 호텔!” 내게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 대답한 그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윌 턱 투 유 어게인 웬 유 컴 다운.”

실소가 터졌다. 답이 안 나오는 상황과 대화에 머리를 짚고 옆에 서 있는데 금발의 백인 매니저가 나타났다. 직원들의 반응으로 보니 직급이 높은 매니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한국계 직원들이 방송한 것과 다르지 않는 내용을, 좀 더 단호한 태도로 다시 한번 공지했다. 호텔 예약은 알려주는 URL로 들어가면 할인가를 제공해 주겠다며 무슨 브로슈어를 주었다. 알려준 사이트로 들어가 보니 1박에 30만원대는 지불해야 베드버그가 없을 것 같은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호텔스닷컴 앱으로 밴쿠버 다운타운 지역을 검색해 보니, 제공해 준다는 할인가는 2-3만원 수준인 것 같았다.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싶은 맘을 꾹 참고 짐을 찾으러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같은 비행편의 가족 단위 승객들이 호텔을 예약하고 짐을 찾고 있었다.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바라 보며 나는 밴쿠버 시내에 가지 않고 이 공항 안에서 24시간을 버티기로 맘 먹었다. 당장 통장에 30만원도 없는 상황은 아니지만 치밀어오르는 오기가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박박 갈며 기다리는데 한 시간이 다 돼도 내 짐이 안 나왔다. 어디든 날리고 싶은 주먹을 원피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에어캐나다 카운터로 향했다. 왜 내 짐이 안나오냐 물으니 승객명과 여권번호를 검색해 본 직원이, “네 짐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다가 내일 출발편 항공기에 곧장 실을거야.”란다. 그걸 왜 지금, 그것도 내가 물으니까 말하는데.

“아까 너네 직원이 모두 다 내려가서 짐 찾아 가라고 했는데.” “응, 근데 네 짐은 보관중이야.”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언쟁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너 혹시 짐 안에서 찾아야 할 물건 있어? 세면도구 줄까?” 공항에서 노숙할 거였고 칫솔 치약 정도의 가재도구는 소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뭐라도 받아내야 한단 생각이 스쳤다. “응. 줘.” 직원은 고급스러운 검정색 에어캐나다 파우치에 담긴 세면도구 세트를 건네주었다.

‘이 자식들이 과연 짐은 제대로 실어 줄까?’란 의심이 들었지만 굳이 거대한 트렁크를 이고지고 공항 안에서 쪽잠 잘 곳을 찾아 헤매고 싶진 않았다. 4월에 몬트리올에서 체류한 내 친구는 이미 미니애폴리스를 경유하며 수하물 분실을 경험했다. 내 짐도 없어진다면? 없어지는거지 뭐, 싶었다. 너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심해 깊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회사 매니저에게 슬랙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하루 더 휴가를 쓰겠다고 통보했다. 구글에 ‘밴쿠버 공항 노숙'을 검색했다. 다행히 밴쿠버 국제 공항은 24시간 대합실이 열려 있고 국내선 환승객도 많아 밤을 지새기 어려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자 찬바람이 슬슬 불어와 발이 시렸다.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상황을 전달했다. “나 곱게 자라서 이 나이에 공항 노숙 처음 해봐.”라고 하자 성은이 대답했다. “짜증나고 힘들겠는데, 너무 웃긴다.”

그렇다, 어찌할 도리없이 치미는 분노에 대한 특효약. ‘나는 지금 시트콤을 찍고 있는거야' 라는 상상. 출발할 때와 돌아올 때 비행편이 모두 취소 돼 본 여행기라니, 끝내주는 오딧세이다. 팔걸이가 없는 의자마다 차지하고 누워 잠을 자는 공항의 노숙 동료들을 보며 나는 에어캐나다의 대처를 정중하게 힐난하는 컴플레인 메일을 작성했다. 시간이 새벽대를 넘어가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어린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차가운 공항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딱히 공항 노숙이 특이한 경험도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찬바람이 덜 드는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며, 한 시간 정도씩 목베게에 침을 흘리며 쪽잠을 잤다. 이른 아침 보안 검색대가 열리자마자 줄을 섰다. 내 뒤에는 키가 큰 인도 여성과 키가 작은 인도 남성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타밀 지역 출신이라며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검색대에 가까워지자 직원들이 사람 무리를 갈라 놓으며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직원이 이 여성에게 말했다. “너 정말 이쪽 줄로 가도 되겠어? 저 남자가 너랑 같이 가고 싶어하는데?” <러브 액츄얼리> 찍고 앉았네. 검색대를 통과한 뒤로는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출국장에 들어서자마자 기념품 가게에서 기모가 들어간 스웻셔츠를 산 다음 에어캐나다 라운지 앞으로 직진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라운지 오픈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 들어가 샤워실로 향했다. 에어캐나다 라운지의 어메니티는 몰튼 브라운이었다. 따듯한 물에 몰튼 브라운 샴푸와 바디워시를 쏟아 붓다시피 거품 내 목욕재계 하고 두툼한 스웻셔츠를 입으니 피로와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샐러드 바에서 과일과 요거트를 수북히 퍼와서 먹을 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나는 비즈니스 클래스라 1구역으로 입장이었다. 커다란 고해상도 스크린과 거의 180도까지 젖혀지는 비즈니스 좌석에, 수하물 걱정도 잊은 채 얼굴에 헤벌쭉 웃음이 번졌다 . <화이트 로투스> 시즌 2를 끊임없이 재생하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잠이 부족했지만 생전 처음 타보는 비즈니스 클래스의 식사를 놓칠 순 없었다. 게다가 이 식사비도 다 항공권에 포함됐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프레즐 과자 한 알까지 다 챙겨 먹고 싶었다. 저녁과 아침 두 끼를 알차게 챙겨 먹고 와인까지 받아 마셨다. 먹고 눕고를 반복하며 행복하게 11시간의 비행을 마친 뒤 드디어, 인천에 도착했다. 몬트리올에서 수요일 아침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금요일 저녁이었다. 다행히 수하물은 문제 없이 나를 따라 인천에 도착했고 비즈니스 클래스는 짐도 빨리 나온 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출국장 문을 열고 나오자 고국의 30도가 넘는 온도와 90%에 가까운 습도가 나를 마중했다. 익숙한 지옥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없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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