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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Feb 09. 2024

할머니를 보내며


 2024년 1월 30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즘은 외가와 친가라는 언어도 안 쓰는 추세라고 하던데 옛날 사람인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엄마의 엄마다 라는 설명을 길게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외할머니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초반에 설명한다. 어차피 내게 할머니는 외할머니 한 명 뿐이고, 이건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단어일 뿐. 향년 97세인데 '한국 나이'로는 99세. 97은 뭔가 애매하고 99살이라 하면 거진 100살처럼 보이니까 한 세기를 산 느낌이 들어서 더 맘에 든다. 노인들은 넘어지거나 근육 못 쓰게 되어 자리에 누우면 보통 금방 돌아가시던데, 우리 할머니는 몇년을 거동 못하고 누워계시는데도 치매가 온 적도 없고 계속해서 신체 대사가 돌아가고 있을 정도여서, 오히려 육체가 감옥이 되어 안에 갇힌 신세로 몇년을 지내셔야만 했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드디어 할머니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들 안도하며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엄마는 할머니가 최고의 엄마였다고 했다.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어도 막내딸인 엄마와 막내 외삼촌에겐 진짜 그랬던 것 같다. 모든 일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 한번도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아본 적이 없어 보인다. 입관식에서도 엄마는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수의에 감싸인 할머니 몸을 어루만지면서 사랑한단 말과 여러 기독교식 축복의 말을 했다. 막내 삼촌은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계속 할머니의 부은 귀를 만졌다. 이모가 “막내아들 옛날에도 엄마 귀 만지더니”라며 웃었다. 그러더니 삼촌은 시신을 묶고 관에 넣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장례지도사들 옆에서 계속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엄청나게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여자 두 분이서 저렇게 하루 일과 마치고 나면 근육통에 잠도 안 오겠다 싶은 과정이었는데, 그렇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끊임 없이 말을 시키는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관 크기가 어땠고, 오동나무 관이었는데 뭘 어찌 준비했고… 말을 멈추지 않는 삼촌을 보고 웃음을 참으며 이를 꽉 깨물고 “저기서 왜 저러고 수다를 떨어”라고 했더니 엄마가 “엄마(할머니)한텐 뭘 해도 좋은 막내아들이라 괜찮아”라고 했다. 입관식에는 직계 자손들과 나를 포함해 손주 몇명이 있었는데 입관을 처음 보는 내 남동생은 어색한지 세 발짝 정도 혼자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친할머니 입관식 때는 혼자 화장실 가 있다가 이동 타이밍 놓쳐서 못 들어 왔던 애다. 이번엔 이 상조 특징인지, 장례지도사님이 워낙 정성껏 일을 하시는 분인지, 입관 의례가 꽤 많았다. 꽃도 여러번 놓고 관 위에 롤링페이퍼(?) 같은 것도 쓰고… 깨끗하게 염이 되어 있었지만 할머니 가까이 허리를 숙일 때마다 단백질이 상해가는 냄새가 났다. 주인이 없는 빈 집 같은 몸이었다. 할머니는 이미 한참 전에 다른 곳에 도착해 있구나, 생각했다.


 이틀간 하루종일 빈소를 지키면서 <던전밥> e북을 봤다. 오랜만에 만화책 보니까 정말 너무 재밌었다. 방명록 지키고 있었는데 앞에 사람이 와 서도 모를 정도로 몰입다. 확실히 애니메이션이나 웹툰과는 다르다. 중고등학생 때는 만화방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동생하고 <블리치>나 <원피스>를 스무 권씩 빌려와서 번갈아 읽곤 했다. 어릴 때 좋아했던 행위를 다시 하니까 잊혀진 감각이 깨어난 듯 했다. 이제 유튜브만 보지 말고 만화책도 좀 봐야겠다. 눈이 간지럽다고 했더니 사촌오빠가 “그래 너 만화 많이 보더라”라고 했다. "오빠는 아까 안에서 세 시간 자고 나오더니 상쾌해 보이네?"라고 받아쳤다니 자기 애기 돌잔치 계획 세우느라 어젯밤에 늦게 자서 그렇단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알았는데 우리 엄마는 연애지상주의자랄까, 가십 중독자랄까, 그런 거인듯. 그래서 맨날 <나는 솔로>나 <돌싱글즈> 보고 누가 누구랑 결혼을 했네 안했네, 사귀다 헤어졌네 마네, 이런 얘기만 하는거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날에 자기 막내 외숙모인가 누가 엄청난 부자라며 소개시켜준 남자가 자기에게 계속 구애하며 한 반년을 따라다니다가, 마지막엔 울면서 자기가 왜 싫냐고 물었다나. 그래서 듣고 있던 사촌언니랑 나도 그리 부자라며 왜 싫었냐 물으니, 그 남자에게 직접 “너무 삐쩍 말라서 싫어요”라고 대답했단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계속 울면서 “마른 장작이 더 잘 탄다는 말도 모르냐”고 했단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자기 대학 동기 누구랑 결혼해서 서초동 어디에 산다… 자기는 그 때 짝사랑하던 오빠가 있었는데 겨울에 스키 캠프 간다고 해서 자기가 엄마한테 얘기해서 - “내가 짝사랑하는 오빠가 가는 스키 캠프 따라갈건데 그 오빠 좋아하는 다른 애들도 두명이나 와.” - 엄마(할머니)가 이것저것 막 싸주고 챙겨줬었다…  이런 이야기의 연속. 계속 누가 오기만 하면 쟤가 누구랑 사귀었었고, 누구 부인이고, 누구랑 만났었는데 결혼은 누구랑 했고, 이래서 내가 전부 40년도 더 전 일인데 그만 하라고 했다. 등장인물 대부분 우리는 누군지도 모를 뿐더러 관심도 없다고. 큰 삼촌도 듣다가 “아잇 쓸데없는 얘길 하고 있어!”라고 해서 약간 속이 시원했다. 근데 할머니는 정작 이모한테는 엄청 보수적이었어서 연애의 연 짜도 못 꺼내게 했고 늘 집안일만 시켰다고 한다. 이모는 엄마의 스키 캠프 이야길 듣더니 자기는 스키는 커녕 할머니가 시켜서 한겨울에도 대청 마루에 물걸레질을 해야했는데 그러고 나면 손이 다 텄다고 했다. 옆에서 엄마가, 큰 딸한테는 그랬는데 자기 때는 할머니가 그새 많이 트여서, 대학교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할머니가 자기 엉덩이를 때리며 “만나는 남자도 없어서 방학 때마다 청주에만 있냐”고 핀잔을 줬다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모 표정을 살피며 이제 진짜 그만 하라고 말렸다.


 친척들하고 하나도 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모인 자리여서 그런지 내가 나이가 들어 그런지 이렇게 모여 있으니 충족감이 들었다. 이 쪽 일가는 꽤 인원수가 많은데 장례 기간 내내 아무 갈등도 없었다. 할머니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하고 옛 추억들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보니, 이게 할머니가 자신이 받았고, 우리에게 물려준 복이 아닐까 싶었다. 할머니의 인생엔 놀라운 이야기가 많다. 단순히 자기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미담이 아니었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장 잘 실천한 인생에 대한 교본을 만든다면 이런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을 거다. 종교적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이 없이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따져도, 순수한 가치를 따르는 사람의 인생의 결실은 이렇게 풍성하구나 생각했다. 할머니처럼 살다 할머니처럼 죽어야겠다고, 내내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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