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emondo Aug 25. 2023

3. 대행사

허리 디스크 상태가 악화되면서 계획보다 일찍 퇴사를 하게 되었다. 백수가 된 나는 수술날을 기다리며 각종 ott를 섭렵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우연히 ‘대행사’라는 드라마를 보게 된다.


게으름이 인생의 디폴트 값이었으나 욕심만은 많았던 나는 대학생 땐 복수전공에 교직이수를 했고, 교생 시절엔 기상캐스터를 준비하고 방송을 했으며, 직장 생활을 할 땐 꾸준히 시도하는 글 공모전과 유튜브, 블로그, 포토 프리랜서 등을 하며 혼자 부단히도 바빴다.

 그렇게 살아오다 35살의 나이로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게 된 지금 이 시점에서, 커리어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드라마 대행사의 이보영을 보며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스스로를 옥죄며 살았던 겐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민 결과 몇 가지로 추릴 수 있었던 이유 중 첫 번째.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는 것. 결국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이 내 일벌림과 생산없는 바쁨의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부재.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실패한다면 빠르게 다른 걸로 넘어갈 수 있도록 방패망이 되어줄 보험을 여러 개 가지길 원했다. 이건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가지고 있던 습관인데, 대학생 시절엔 교사가 되고 싶지도 않으면서 복수전공에 교직이수까지 하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무려 5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바쁜 나'로 도망쳤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기 위로를 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하루하루 가지며 살아가는 바쁜 하루살이 인생은 현재의 나를 잊기에 최적이었다.


 세 번째는 나의 자유로운 성격이다. 나는 자유로움에 대한 추구가 남들보다 강한 편이라, 어린 시절에 안정과 형식을 추구하던 소지방에 살면서 모두가 같은 결승점에 같은 시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별종으로 취급받을 때가 많았는데, 안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고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는 거. 하지만 어쩌겠는가. 흥미도 없고, 잘 맞지도 않지만 안정된 삶만을 위해 자유가 희생 당하면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비롯해 온 몸에 염증이 올라올 만큼 격렬하게 내 정신과 육체가 거부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루에 삼각김밥 하나 먹으면서, 출근 전과 퇴근 후의 시간까지 글을 쓰면 육신은 고달플지언정 정신이라도 행복한 것을. 그래서 나는 일찍이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살았고, 그 대가로 나의 20대는 온통 불안정했다. 


그리고 20대가 꺾어져갈 무렵. 명절을 맞아 고향을 방문해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친구인데, 여전히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사는 나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넌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나는 나의 치열함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쉽게 뱉는 걸까 기분이 상했고 오래된 친구인 만큼 무척이나 서운했다. 물론 그에게 나의 모습이 여전히 치기어린 모습으로만 보일 수 있었을 테지만, 모르겠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인데. 삶의 속도는 모두 다를 뿐인데.

 나는 그때 절실히 느꼈다. 나의 자유로움이 나의 욕심이자 이기적인 삶으로 낙인 찍힌 채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세상이 보통이라 여기는 루트를 따르지 않으려면 그들만큼의 안정을 찾아야만 떳떳해질 수 있고, 더 크게 성공해야만 나의 자유와 그에 따른 불안들까지 모두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은 때때로, 아니 꽤나 자주 결과론적이니까.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것들은 명확하고, 그중 하나만을 밀어붙여서 성공할 자신은 없으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어중간한 상태로 여기저기 펼쳐둘 수밖에. 누군가의 말처럼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할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 중 내게 가장 잘 맞는 것을 찾아야만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혹은 그 시간 동안 나의 어중간한 능력 중 하나가 떡상하길 기도했다.

 하지만 잘 알듯이,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며 행운도 아무에게나 찾아오진 않았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일들은 내게 부질없는 것들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걸까. 아니다. 내가 펼쳐둔 이 모든 일들은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삶에 더해지고 더해져, 내 인생에 어마어마한 도움을 줄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