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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나 Oct 16. 2020

서점의 다이아나

책 리뷰

여기 예쁘고 똑똑한 소녀가 있다. 교양 있고 부유한 부모님의 지원 아래 좋은 학교들을 거쳐 온, 또래집단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요 선생님들의 귀염둥이, 부모의 자랑.


변함없이 따듯한 관심과 보호 속에서 해맑은 소녀는 해맑은 성인으로 자라났다.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라, 그럼 그도 너에게 선의로 답할 것이다' 정도가 그녀가 사는 세계의 룰이었을까. '모르는 사람을 믿지 마라, 특히 주위에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와 같은 경고는 소녀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운 좋게도, 또는 운이 나쁘게도 소녀는 여태껏 타인을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해맑은 성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떼던 날, 그녀는 준강간을 당한다. 모든 범죄의 피해자들이 그렇듯, 무방비상태로.  

예쁘고 똑똑한, 그래서 실패에 익숙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이 한순간에 피해자 포지션에 놓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사건 전까지만 해도 가해자에게 애매한 호감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자, 여기서 그녀는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할까. 그리고 그 결정은 그녀의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이 미칠까.

유치원에 다니는 나의 딸은 얼마 전 동물원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소풍을 가기 전, 선생님이 동물원에서 꼭 지켜야 할 약속들을 알려주셨단다. 첫 번째, 보고 싶은 동물이 있다고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가지 않아요. 두 번째, 동물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아요. 세 번째, 길을 잃었을 때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요. 그리고 네 번째, 제일 중요한 건데 - 모르는 어른을 따라가지 않아요.


몇 번이나 교육을 받은 건지 줄줄이 주의사항을 읊고 난 딸이 묻는다. 엄마, 그런데 왜 모르는 어른을 따라가면 안 돼? 음, 그 어른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는데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거든. 나의 말에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딸이 한 번 더 맑은 눈망울로 묻는다. 엄마, 그래도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지?


아마도 모든 부모가 같은 마음 이리라. 제발 제발 바라건대 너의 세상에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기를. 아니, 가능하다면 나쁜 사람이라곤 전혀 모르는 채로 한평생 살아갈 수 있기를.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꿈과 환상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다. 언제까지나 아이가 있는 공간의 모든 뾰족한 모서리들마다 푹신한 스펀지를 덧대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언젠가 적절한 때에 딸에게 고백해야겠지. 엄마는 이 세상에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어. 하지만 문제는 나쁜 사람들 중에 일부는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별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라는 거야. 나쁜 사람 또는 쓰레기 같은 새끼들한테 걸리는 건 그냥 재수의 영역이고 너의 문제가 전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내 새끼가 젤로 중한 내 새끼 엄마로서 걱정하건대) 어쨌든 쓰레기들로부터 너 스스로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해.


딸이 조금 더 큰 뒤엔 이 책을 꼭 읽게 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줘야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때때로 불행은 찾아올 수 있어. 때로는 불행을 인정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무서워서 짐짓 괜찮은 척 해보고 싶을 때도 있을거야. 그렇지만 모든 연극은 결국 굴레이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나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방울 용기까지 쥐어짜 내어 스스로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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