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서 어떤 글이 “논리적”이다 라고 평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긍정적인 의도에서 선택된 칭찬이다. 개인적으로 논리적인 글쓰기의 필요성 그리고 중요성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나는 아직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주변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논리”라고 하는 것은 진지하게 글쓰기를 수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처럼 따라다닌다. 하다못해 대학입시에서도 “논술”을 요구하지 않던가.
하지만 논리적인 글쓰기는 쉽지 않다. 특히 나의 경우 직업적으로 “논리적인” 글을 써야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고 불편한 일이었고, 또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학술논문을 쓸 때 이따금씩 서정적인 비유를 집어넣거나, 직관적인 표현으로 내 주장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늘 논문심사를 거치면서 삭제 및 수정요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지적된 부분들을 한줄한줄 지워나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왜 논리적인 형식을 위해 직관적인 표현을 희생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논리적인 글쓰기를 강조하지만, 그 강조는 보통 맹목적으로 보일 정도로 획일적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왜 논리적인 글쓰기가 그렇게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다양한 글쓰기중의 한 방식이고 특징일 뿐인데, 어째서 그것이 보편적인 글쓰기의 필수요소가 되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루는 내용에 따라서 반드시 논리적이어야 하는 글이 있는 것이고, 논리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글도 있을 것인데, 글쓰기를 강조하는 대부분의 책과 작가들은 한사코 “논리적”이라는 수식어를 글쓰기 앞에 두려고 한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논리적인 사고를 전제로 하고, 또 그 전제가 충분히 잘 이행될 때 가능하다.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이 ‘논리’라는 것은 과연 그만큼 충분히 유효한 체계일까?
인간의 삶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인 인과관계의 범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조절해보려고 하지만 정작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예상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일관성은 논리적이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일관성을 논리적인 흐름으로 정의한다면, 하다못해 커피 한잔을 두고서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좀처럼 일관되기는 어렵다. 지금 당장 옆사람의 대화에 잠깐만 귀를 기울여보라. 그 대화를 녹취해서 글로 읽는다면 당장 한편의 부조리 연극처럼 보일 것이다. 명백한 주제를 가지고 시작된 대화가 아니라면, 평범한 일상의 많은 대화들은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기 보다는 직전의 상황에 대한 심정적 반응으로 촉발되는 대화가 주를 이루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의 관계가 논리적으로만 지속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관계에는 논리를 초월한 직관적인 연대과 공감의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는 논리의 기관차가 들어설 철로가 깔려있지 않다. 우리들의 삶이 그토록 다양하고 다채롭게 전개될 수 있는 것은 삶의 궤적이 논리로만 계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직관과 영감과 느낌과 예언 같은 당장의 기계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제 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의사사통의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해지고 더 불편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의사소통의 대표적인 수단으로써 글쓰기가 논리적이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각각 다를 수 있는 의사소통의 채널을 일원화 해서 소통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리는 결국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효율성이라는 부차적인 목적을 위해 본질에 해당하는 요소에 가해지는 강요된 질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생각은 다양한 사고의 터전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논리성은 그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일축시킨다.
인류역사의 위대한 과학적, 수학적 발견들 중에는 그 시초에 논리적인 필연성이 없었던 경우도 많을 것이다. 어떤 직관, 어떤 영감이 먼저 존재했고, 그 직감과 영감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논리와 과학적 논증이 이후에 부연된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만유인력과 연관 지었던 뉴턴의 생각은 논리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에도 지구와 같은 3차원적 공간이 있을 거라는 케플러의 상상에 어떤 논리적인 필연성이 있었을까? 별이 단지 빛나는 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지구와 같은 물리적인 공간의 실체로 인식하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데에 필요한 것은 논리가 아닌 직관적인 상상력이었다.
한국의 교육은 지나치게 논리만을 강조하는 것 같다. 서점에는 논리를 따로 공부할 수 있는 논리야 놀자와 같은 부류의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있다. 많은 책과 작가들이 논리적인 글쓰기를 강조하고 그런 강좌는 점점 많이 개설된다.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강요되는 논리 속에서 죽어가는 자유로운 표현과 직관과 영감은 배려하지 않는다. 논리적이지 못하면 열등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사회의 분위기속에서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예술적인 직관과 열정은 쉽게 바스러진다. 과연 논리적인 것은 그 기회비용만큼의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논리적인 글쓰기 앞에서 실망하고 힘들어하고 고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대부분 글씨기에 재능이 없다는 식의 자기자신을 원인으로 돌리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나라면 논리적인 글쓰기를 강요하지 않겠다. 누구나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일단 써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반드시 논리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그 다음의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그 어떤 목적을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면 굳이 논리적인 글쓰기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결국 소통이 목적이고 이해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논리적인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그 내용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나는 아직도 글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누군가의 글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쉽게 구분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나의 경우 그 글이 얼만큼 논리적인가의 여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논리의 체계가 사실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과학이 얼마나 신화에 가까운지 한번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