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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Oct 06. 2019

32. 배움에 관하여-1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녀의 뇌가 스펀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가르칠 의도가 없었던 이야기들은 어느새 배워 따라 하게 되고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은 결코 배우지 않는다. 5살 된 내 딸은 내가 가르치고자 하면 자꾸 설명만 한다고 투덜대어 어느새 딸 앞에서 나는 설명충이 되어있다. 딸이 가장 잘 배우는 것은 설명충의 설명보다는 스토리다. 오늘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나 어렸을 때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집중력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딸은 특히 1등을 하거나 뛰어난 성취를 보이거나 대장이 되는 이야기에 제일 관심이 많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1등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딸은 나와는 다르게 1등을 좋아한다. 노력해서 뛰어난 성취로 1등이 되어 대장이 되는 이야기를 제일 좋아한다.


 딸을 키우며 가르치는 입장이 될 때가 자연스럽게 많아지며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스토리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특히 역할극에서 스토리는 사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규범과 관습, 기초적인 도덕성을 가르치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 하지만 이런 역할극으로 좋은 학습을 이뤄내기 위해선 좋은 스토리를 짤 수 있는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다. 하지만 오늘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가르는 것에는 가르치는 주체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존재한다. 가르치는 주체를 선생으로 표현하고 가르침을 받는 대상을 학생으로 이야기하자. 선생은 의도성을 가지고 혹은 의도성 없이 학생을 가르칠 수 있다. 가르침에 의도가 더해지면 보다 면밀하고 자세하게 가르칠 수 있다. 이는 선생이 가르침의 내용과 방법을 선별하므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의도성 없는 가르침은 선생이 가르치고자 의도한 것도 아니며 내용을 검토하거나 방법을 생각한 것이 아니기에 학생이 주도권을 가진다. 학생은 선생의 의도하지 않은 가르침을 본인 스스로 판단하여 배워 나가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보다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학생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보다 배움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선생은 학생의 집중력을 이끌기 위해 학생에게 일정 부분 주도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5살 된 딸을 가르치고자 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딸이 대화와 놀이에서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형 놀이를 하며 가장 아름다운 인형을 뽑는 대회를 연다고 하자. 딸은 심사위원을 맡았다. 진행자가 심사위원한테 물어본다. "아름답다는 것이 뭔가요?" 심사위원인 딸이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진행자가 다시 묻는다.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건가요? 마음도 중요한가요?" 심사위원은 "둘 다 중요해요."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인형 콘테스트에서 얼굴이 이쁜 사람, 마음이 이쁜 사람, 얼굴은 이쁜데 마음은 이쁘지 않은 사람, 똑똑한 사람 등 다양한 사례의 참가자들이 콘테스트를 참가하여 아름다움을 뽐낸다. 딸은 심사위원이 되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뽑게 된다. 의외로 내 딸은 가장 똑똑한 사람을 아름답다고 뽑았다. 딸은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름다움은 똑똑한 것이라고 생각 끝에 결론을 내린 듯하다. 딸은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하며 아름다움은 지적인것에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게 아닐까?


 이처럼 주도권을 쥔 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배움에 임하게 된다. 하지만 배우는 과정은 힘들다. 배운다는 것은 뇌 안에 새로운 시냅스를 형성하여 연결망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며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초행길은 느리고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방향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에너지를 많이 쓸뿐더러 느리기에 재미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의 뇌는 배움에 최적화되어 있다. 아이들은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과 새로운 지식의 부딪힘이 적어서 어떤 것이든 그런 줄 알고 잘 받아들인다. 뇌는 경험하는 정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소위 악하다고 생각되는 그릇된 가치관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 세심한 교육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선생이 되면 가르치는 내용이 맞는지 학생에게 적합한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특히 선과 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에 관한 가치 판단이 끼어들게 되면 가르침은 매우 어려워진다. 이것들은 세계관 형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만들고 있어 사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유보했다. 이것은 딸이 커가며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경험하며 체득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가치판단을 가르치는 책과 영상이 많다는 것이다. 언제나 만화에서 정의는 옳고 승리하며 폭력으로 불의를 단죄한다. 그림책에서 약자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강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존재로 표현된다. 부모로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스로 사유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세워 나가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미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도 이미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살인 내 딸이 벌써 '왜 내 얼굴은 노란색이야? 흰색이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섬뜻하다.


 우리 자녀들의 교육은 이미 달리는 말에 올라탄 것과 같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는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지식과 규범들을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 놀며 가정에서 배운 것과 사회에서 통념되는 것들을 절충해 나갈 것이다. 나는 자녀의 사회생활이 시작되며 자녀의 교육이 던져진 주사위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부모는 가정에서 교육하겠지만 밖에서의 생활은 통제할 수 없는 던져진 주사위이다. 그렇기에 부모들이 좋은 학군을 선호하고 좋은 친구들을 맺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 후에는 이제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


 가정에서 부모는 교육자가 된다. 내가 가진 영혼에 따라 말과 행동이 표현된다. 표현된 말과 행동은 자녀의 영혼이 먹고 성장한다. 자녀의 모습이 부모의 모습과 유사한 것은 단순한 유전적으로 비슷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비슷한 모습을 띈다는 것이다. 자녀의 영혼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닦고 맑게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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