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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오 Jun 13. 2019

사진의 함정

핸드폰을 도둑맞아 비로소 쓰여진 여행의 짧은 기록들 1

 나도 과거에는 사진 찍는 것을 퍽 즐겼다.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사진’에 흥미가 사라지더니 내게 사진은 점점 기록의 수단으로만 남게 됐다. 정확히는 ‘여행사진’ 이라는 것을 찍는 데에 큰 동기를 갖지 못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예술과 기록이라는 두 개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그 둘 사이 어디에도 목표가 없는 것이었다. 예술사진을 찍겠다는 의지는 물론 없었고 그렇다고 명소 앞에서 내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목적도, 많은 이들이 그렇듯 유럽의 길거리에서 패션화보 같은 사진을 남기겠다는 욕심은 더욱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꼬박꼬박 카메라를 챙기며 열심히 찍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가족을 위해서였다. 내가 본 것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 셔터를 누르고 본 것들이 많았다. 메모리카드를 커다란 평면티비에 꽂고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감상할 날을 기다렸다.


 무엇인가를 보고 ‘좋음’을 느낄 때 일단 셔터를 누르는 것도 언제부턴가 우리가 갖게 된 습성이다. 그 반사적인 행동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호크니는 사진이 갖는 광학적 한계를 회화로 극복하려 했다. 러시아의 역원근법 그림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세계를 시각화 하는 매커니즘도 상대적인 인지체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진은 그 시각적 인지체계를 획일화 시키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본 것을 그렸지만 사진 이후의 화가들은 사진을 그린다.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 는 말이 칭찬이 되고 그림을 보며 ‘사진 같다’ 고 말하는 것이 칭찬이 되는 묘한 아이러니 속에 두 매체는 자리하고 있다. 호크니로 돌아와서, 호크니는 하나의 렌즈가 갖는 한계를 주로 생각 한 것 같다. 그의 포토콜라주나 캔버스를 여러 개 이어 붙여 완성하는 대형회화가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점이다. 사진은 하나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오려내지만, 사람의 시각인지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동공의 떨림으로 이 세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또한 보는 동시에 느낀다. 감각이 동시에 진행되고, 동시에 ‘인지’한다.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봤을 때 ‘봤다’라는, 시간적으로 단절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실상 늘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빛의 움직임, 공기의 움직임, 그리고 시간의 움직임. 헌데, 사진이 포착하는 것은 한 순간의 하나의, 한 방향의 프레임이다. 이 기술이 획정, 제한하는 우리의 다른 감각들은? 어떤 화가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세잔, 모네, 그리고 호크니가 대표적일 것이다.


사진출처 http://www.hockney.com/index.php/works/photos/photographic-collages


 본론으로 돌아와,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내가 보고 나누고 싶었던 것들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생각의 전제가 단단히 틀려있다.


 폰을 도둑맞기 전, 기나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그동안의 핸드폰 사진을 정리했다. 1000장이 넘는 사진이 있었다. 특히 알프스 산맥의 일부이며 독일의 최고봉인 츄크슈비체 밑의 Eibsee 호수의 사진, 카프리에서의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카프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아나 카프리의 정상에 올랐을 때, 숨을 들이 쉬자 폐 언저리 까지 빳빳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깎아 지르는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다시 사진을 지나치다 보면 내가 찍은 사진이 타인의 블로그 에서 봤던 다른 사진들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같은 자리에서 아이폰으로 그 풍경을 찍은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내가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셔터를 눌렀던 때에는 내가 특수하게 경험한 것들도 있다. 특히 뒤셀도르프, 그리고 여러 전시장에서의 기억은 관광지 순례와는 다른 것이었다. 전시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당장 해석하기 어려운 글들, 기억해야할 작가이름, 기억할만한 소스들을 카메라로 찍어놓았기 때문에 특히 아쉽지만, 또, 그게 없으면 어떤가? 전시를 보고 내가 얻을 것도 작가 이름이나 전시 컨셉에 대한 정확한 이해 따위의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떻게 내가 본래 전달하고 싶었던 그것에 다가갈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이 많은 작가들의 질문이었고 내가 고민해야 할 것도 이것이었다. 나는 너무 손쉽게 찰칵찰칵 찍어대는 사진이 그것을 대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군가 긴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 보여줄께”라고 하는 말이 꼭 달갑지만은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번쯤 함께 보기야 하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단순한 사진보기에 있지 않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흥미로운 것’을 뒤늦게 복원해 보기로 한다. 많은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전기로 만들어진 보조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광학적 눈속임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오감으로 경험한 것들을 정리 해보려 한다.



* 일련의 여행기는 2015년 여름 40일간의 여행 후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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