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오 Jun 14. 2019

도난

핸드폰을 도둑맞아 비로소 쓰인 여행의 짧은 기록들 10


도난 Ⅰ


 칠칠치 못한 내가 웬일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지내나 했는데, 결국 폰과 카메라를 도둑맞았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나의 물건을 계획적으로 노렸다. 그것을 갖겠다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었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나의 의지보다 강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렴풋이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 이불에 뒤척이는 움직임이 지금 생각해보면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새벽에 깨는가 싶더니 늦잠을 자서 초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샤워하러 갈 때 그것을 두고 가기를 바라며 기다렸을 것이다. 먼저 폰을, 그리고 가치 있어 보이는 다른 것까지. 그가 여행자에게 카메라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차 없었다.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다.


 나는 그간 많은 길을 걸었다. 그중엔 나에 대한 어떤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타인에 대한 어떤 의지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난 무수히 많은 소매치기를 거쳐갔을 것이다. 한 번은 실제로 만났지만.

이 일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었을까. 카메라와 핸드폰까지 락커에 넣어 둘 수 있었을까? 그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새벽 2시가 가까워지는 늦은 시간이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난 내가 샤워하러 간 사이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도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들을 믿는 것이 더 이상한데도 말이다. 그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느낀 불안한 기분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 테다. 난 그 자리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참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건 한 사람과 내가 마주쳤기 때문이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우리의 궤도가 맞닿아 그의 의지와 만났기 때문에. 웃긴 건 두 물건 다 사용가치가 있는 물건이기에 누군가의 손에서 그것이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내 것으로 여기고 오래 만져온 물건을 누군가가 사용할 것이다.

그는 나의 사진과 전자적 기억들을 훔쳐갔지만, 그는 나의 경험을, 내가 느낀 것들을 그리고 나의 진짜 기억을 훔쳐갈 순 없다.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도난 Ⅱ


 도둑맞고 타 들어가는 마음으로 잠을 잤다. 누군가 나의 물건을 탐한 침대 위에서 잠에 들기가 너무 어려워서 비행기가 오후에 있음에도 아침 일찍 호스텔을 나섰다. 긴 비행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히드로로, 히드로에서 베이징으로, 그리고 18시간 뒤 베이징에서 서울로.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쓸데없이 다 읽어 버리면 짐이 될까 봐 아주 안 읽히는『미학 안의 불편함』을 챙겨 갔더니 책을 읽기도 싫었고 모든 의욕이 사라져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공항 안의 삼성 티브이에서 소리 없이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리스에 입국하는 난민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자료화면으로 밤에 보트를 타고 시리아에서 그리스로 건너오는 난민들이 나왔다. 해병대 훈련할 때 들고 가는 것 같은 작은 고무 보트에 2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빈틈없이 뱅 둘러앉아 배를 타고 해변으로 밀려들어오는데, 그중엔 아이도 있고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어두운 밤에 해변으로 밀려온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구명조끼를 벗어버리고 어디론가 모두 흩어졌다.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그토록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견뎌 왔을까. 어떻게 그 보트에 저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가. 어둠 속에 불안한 눈을 빛내며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자, 지난밤 내 물건을 노린 사람이 생각났다.


 그의 삶을 생각해 봤다. 타인을 지켜 주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그의 삶을 그려 보았다. 그는 마땅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살아남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최소한 나보다는 더 한정적인 선택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절박했다면, 그것에 내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이란에서, 시리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보트 영상을 보며, 나는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로 했다.


도난 Ⅲ


 도난으로 인해 하이델베르크 일정도 무산되고, (그쯤 되니 버스 예약비 15유로쯤은 아깝지도 않았다.) 상심이 커서 잠도 쉽게 못 자고 마지막 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지루한 시간이 날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시간에 1유로이던 인터넷 사용비가 공항에서는 10분에 2유로였다. 사람들은 자기 스마트 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난 아이폰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물끄러미 바라보다 경계의 시선을 받았다.


 가지고 있던 자물쇠를 꺼냈다. 여행 떠나기 전날 다이소에서 산 자물쇠였고 자물쇠 번호는 몸통에 끼워져 있었는데 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버렸다. 다시 꺼낸 자물쇠는 잠겨져 있는데 의외로 쉽게 떠오를 거라 생각한 번호는 절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자물쇠 번호를 맞추다 생각했다. 나는 물건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숙소 락커 같은데 에서 사용하려고 가져간 자물쇠의 번호를 이미 오래전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한국에 갈 때까지 이걸 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때울 놀잇감이다! 싶다가, 번호를 맞출수록 곧 열게 될게 두려워 그만두었다. 정말 자물쇠가 풀려버리면, 그 순간 어쩔 수 없었던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던 일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더 슬퍼질 것 같았다. 아직도 자물쇠는 잠긴 채로 그 용도를 잃은 채 있다.






* 일련의 여행기는 2015년 여름 40일간의 여행 후 쓴 것들이다.

작가의 이전글 검증된 여행이라는 레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