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태석 신부는 톤즈라는 땅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교회를 지으셨을까, 학교를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학교다.'
월트 디즈니는 '이 세상에 어린이와 어른이 있는 게 아닌, 어린이와 몸이 커버린 어린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멋대로 인용하여 내 생각을 적어보자면, 세상에는 '어린이'와 '다 못 큰 어린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 못 큰 어린이'에게는 갖가지 환상이 필요하다. 교회나 시청, 국회의사당 혹은 간판, 복도, 휴지통 등등..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환상 대신 친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학교는 배우러 가는 곳이 아닌, 친구를 만나러 가는 곳이다. "가갸거겨" 언어를 배우고 글자를 익힌 들, 그것을 써서 소통할 친구가 없다면 어린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들이 읽을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땅의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학교를 선물했다. 일제강점 하의 조선학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일본창가를 장려했지만, '어린이'잡지에 실린 동요는 어린이 스스로의 순연한 본심을 장려했다. 비록 천도교에서 주관한 전국적 소년운동에 힘을 기댔다 할지라도, 소파의 운동에는 추진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깔려 있었다.
헌데 그가 표방한 소위 '동심천사주의'는 때로 첨예하게 비판받기도 한다. 요컨대 아동을 진부한 환상에 빠트리고, 유치하기만 한 교육에 몰아넣어 현실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비판을 제기한 관점엔 식민지 현실을 바로 깨우쳐 어린이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한 취지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동심이 천사'라는 주장은 과연 순진한 낭만처럼 들리기도 한다. '천사'라는 존재의 이미지가 서구 기독교로부터 비롯했음을 짐작하면 그럴 만도 하다. 하물며 '아기천사'라는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 큐피드로 형상화되지 않았던가. 큐피드는 천진하고 발랄하면서도 장난꾸러기 성질을 지닌,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성격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동심천사주의'는 다시 말해 서구의 '어린이관'을 고국 조선에 이식시키려는 획책이었을까?
필자는 '동심천사주의'의 진의를 소파의 행실에서 찾고자 한다. 그는 어린이에게도 경어를 쓰며 생각과 가치관을 나눌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했다고 한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어린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아동들은 그저 '아직 못 자란' 어른이었다. 하지만 어른이야말로 '못 자란 어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파는 사회적 존재로서 '어린이'를 널리 알린 것은 물론이요, 그에 따른 실천 또한 잡지 간행과 문예활동으로 이어나갔다. 또, 앞서 말했듯 평소 행실에 있어서도 어린 사람을 존중했다는 것을 보면, '동심천사주의'란 그저 기치에 불과한 것이요, 그 진의는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친구를 선물해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파 방정환이 일본유학생 출신임을 감안하면, 일본과 서구의 문화가 조선어린이운동에 작게나마 묻었을 여지도 있다. 하지만 방정환은 식민지 고국땅에서 난삽하는 종교나 이데올로기보다 어린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 뛰었고, 실천으로서 이를 널리 보급했다. 그는 '다 못 자란 어린이'의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일생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