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나는 정치적 환경을 오로지 ‘나’와 관련된 것으로서 해석해왔다. 하지만 정치적 실천을 이룬 사람들은 세상을 ‘그 사람’의 것으로써 이해한다. 여기서 말한 ‘그 사람’은 요컨대 ‘해독불능 및 대체불능의 그 사람’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다. 바로 전태일 열사의 사례다. 오늘날 우리는 전태일 열사를 노동운동의 한 중대한 변곡점으로서 이해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아주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현실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라는 ‘한 세상의 사회’는 ‘노동자’라는 이름에 대해 정치적 논의를, 그 이전보다는 첨예하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전태일’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그의 옆에는 ‘그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병을 얻어, 결국엔 각혈까지 하는 장면을 전태일이 목격하였다고 한다. 전태일이 이 여학생을 도우려 했지만 여학생 본인은 해고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주변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여학생은 해고되고, 이후 전태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잠을 더 줄여가며 법과 한자를 독학으로 깨우쳐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마저도 거절당한 뒤 그는 대낮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라고 외치며 산화했다. 재단사 전태일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자족적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실제로 보조사에서 재단사로 승진한 그는 훗날 자신만의 가게를 열려는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전태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 나타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절친하며 절대로 신의를 배신하지 않을 친우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한 사람의 생으로 걸어들어온 ‘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나’라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까지 벌이게 하는 ‘그 사람’ 말이다. 내가 알던 ‘나’는 세상을 살면서 익히 들어온 갖가지 사건들이 자신에게 닥쳐도 흔들림 없이 대처할 자신감을 완비했다. 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그런 ‘나’를 완벽하게 뒤집고 무너뜨린다. 때문에 ‘그 사람’을 가진다는 것은, 기꺼이 자신을 전복시키고 ‘나’로 하여금 극단의 극단을 알아보게 한다. 사상이나 체계가 ‘나’를 바꿔줄 것이란 믿음을 뒤엎고, ‘나’가 비로소 사상이나 체계를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새겨준다는 것이다. [202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