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며칠 전이라 그런지 차도 막히고 분주한 하루였다. 보통은 연휴가 시작되는 주에는 촬영이 많지가 않다. 이날도 연휴를 어떻게 보내야 자랑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늦은 오후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지만 프리랜서들에게 모르는 번호는 새로운 클라이언트 아니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상냥한 상담원이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급하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인제 자작나무 숲 사진 있으세요?"
클라이언트는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말했다. 처음 통화하는 클라이언트 다. 상당히 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제 자작나무 숲 사진이 내겐 없었다. 어디인지도 알고 사진도 많이 봤던 곳이지만 일부러 시간 내어 간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핑계를 하나만 말하자면 겨울에 가야 멋진 사진이 나올 곳이라 생각해 아껴두고 있었다. 아니 사실 추운 겨울에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질문을 듣고는 바로 대답했다.
"가서 찍으면 되는데요!"
"음, 마감이 연휴가 끝나는 날이에요. 지금은 연휴 시작 삼일 전이고요. 연휴 때는 촬영하기 힘드실 텐데 괜찮으세요?"
빠르게 모든 걸 계산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나는 일에 관해서는 완벽한 S와 J를 가진 사람이다.
현재 날씨는 영하 10도. 며칠 전에 강원도는 폭설이 왔다. 하절기라 입산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 등등.
"내일이라도 촬영해서 마감 하루 전까지 보내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자신감 넘치게 대답을 했다. 너무 오랜만에 여행을 가장한 풍경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인데 일이라는 완벽한 이유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였다.
야외에서 특히 산이라는 거대한 자연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걸 고려해야 한다. 입산 시간, 그날의 날씨, 구름의 유무, 해가 움직이는 방향. 이럴 때는 검색부터 시작이다. 겨울이라 오후 2시 이후에는 입산이 안 되는 상황. 며칠 전 폭설로 아이젠 없이는 입산이 불가능하다. 모든 걸 고려하고 마지막으로 날씨를 보니 내일이 가장 덜 춥고 날씨가 좋았다. 9시 입산을 목표로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등산이라 할 정도로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모든 등산 장비를 꺼내 들었다. 참고로 등산을 꽤 다녀서 이미 풀세트로 구비되어 있다. 어머니는 히말라야를 가도 될 거라 말할 정도다.
새벽에 일어나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맥 드라이브에서 향기 좋은 커피와 맥모닝을 샀다. 새벽에 맥드라이브는 천국 같은 곳이다. 전국을 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차에서 음식을 먹는 게 익숙하다. 공기는 차지만 오히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이 반갑게 느껴졌다. 2시간을 달려 근처에 도착해 간단하게 물이랑 초코바를 샀다. 현장에 가서 상황을 봐야 하지만 보통 풍경 사진은 30-40분으로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해가 산 뒤로 넘어가 나무와 하늘이 붉게 물드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이른 시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속버스에서 내린 프로 등산러분들은 단풍 시즌에나 볼법한 원색의 등장복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장 심플한 구성으로 촬영 장비를 챙기고 입산을 시작했다. 10시쯤 되니 해가 산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공기는 청량하고 하늘은 점점 하늘색에서 푸른색으로 번져 간다. 서울에서 나고 살아온 나에게 산에 올 때마다 느껴지는 가장 큰 차이는 공기이다. 폐 속 깊게 들이마시니 자작나무 향기가 벌써 느껴지는 거 같았다. 며칠 전 폭설로 발목을 넘게 쌓여 있는 눈 때문에 아이젠을 착용해도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래도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의 겨울 이라니. 얼마나 낭만적 인가. 사진가로서 오히려 흥분되는 순간 아니던가. 1시간을 조금 넘게 올라가야 하지만 12시가 넘어 해가 머리 위에서 안녕을 말하기 전에 자작나무 숲을 만나고 싶어 멈추지 않고 걸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길 아래로 곱고 길게 뻗어있는 숲이 보인다. 종이처럼 하얀 나무들이 촘촘히 숲을 이루고 있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華)로 쓴다고 한다. 결혼식을 화촉이라 흔히 말하는데 옛날에 촛불이 없던 시절엔 자작나무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을 대용했기 때문이라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두께가 상당히 얇아 벗겨서 글귀를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해의 방향을 보고 자작나무 사이로 들어가 촬영을 한다. 백옥과 같이 하얀 자작나무와 쌓인 눈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 사이로 비추는 해가 눈의 색과 자작나무의 색을 갈라놓는다. 눈의 하얀색은 살면서 본 가장 고운 하얀색이다. 자작나무가 가진 하얀색은 어릴 적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색이다. 해를 마주하기도 등지기도 하다가 잠시 카메라를 거둔다. 가만히 서서 이 순간을 눈으로 담는다. 잠시만 사진가의 의무를 내려놓고 처음으로 마주한 고고한 숲의 자태를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눈을 뜬다.
마지막으로 프레임 안에 자작나무와 하늘을 가득 담기 위해 누워본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자작나무의 끝이 하늘로 모여들고 푸른색 바탕이 자작나무의 순수함을 돋보이게 한다. 자연이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장면을 연출해 그 웅장함이 거대할수록 사진으로 담아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직접 다가가 눈으로 보는 게 자연의 위대함을 그나마 느끼고 담을 수 있는 방법이다. 숲의 중심부터 언저리까지 눈을 헤치며 사진을 찍고 났더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는 잠시 앉아 대상을 다시 바라본다. 찍은 사진을 빠르게 스캔하며 돌려보기도 하지만 놓친 스폿이 어디일까 고민하고 천천히 이동하며 눈으로 점검한다. 초코바를 먹으며 숨을 고른다. 후반전을 준비한다. 원정치고 전반전은 우세하게 점유율을 가져갔다. 이제 후반전은 승리를 위한 결승골만 남았다. 풍경 사진도 기본적으로 사진가가 가져가야 할 구도가 있다. 처음에는 그 기본에 충실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조금은 실험적이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을 해서 임팩트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전반전은 그 한 컷을 위한 초석이었다. 2차전에 남은 체력을 다해 사력으로 사진을 찍는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사진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내 카메라에 담긴 모든 피사체에 대한 예의이다.
입산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쯤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시 한번 숲을 내려다본다. 이 아쉬움이 오늘의 노력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자작나무 숲이 다른 계절에 자신이 가진 색과 자태를 보러 오라고 잡아 끈 것이었다. 하얀색으로 곧게 뻗어 있는 자작나무는 하나씩 보면 다 같아 보인다. 그들이 모여 이룬 숲으로 들어가 보면 매시간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듯 말이다.
초록이 가득한 모습은 어떨까. 뜨거운 여름 속 청량함이 가득한 숲을 상상해 본다. 아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에 새로운 자작나무 숲을 만나러 올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