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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 Dec 20. 2023

나의 해방일지

은퇴 후 찾아온 자유

오전 7시 기상 알람을 껐다. 퇴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다.

이제 마지못해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 장기수가 출옥할 때 이런 기분일까 싶게 해방된 기분이다.

영하 17도 한겨울 새벽에 일어나 꽁꽁 언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된다. 억수 같은 비를 뚫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여의나들목이 물에 잠겨 출근이 늦을까 노심초사할 일도 없다. 지옥철에 끼어 출퇴근할 일도 더 이상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아도 된다. 햇살 좋은 봄날이면 감옥 같은 회사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 어디든 꽃길로 향하면 된다.  

자유다. 내 맘대로 해도 되는 생이 펼쳐졌다.      


엄마, 직장인, 아내, 며느리, 딸이라는 5단 저글링을 계속하려면 집중력과 쉼 없는 움직임이 필요했다. 버거웠다. 너무 힘들 때면 출근길에 사고가 나서 입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었다.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당시 나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 청년이 주인공인 일본소설을 읽었다. 그는 힘든 직장생활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만 어렵게 된 정규직을 그만둘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외로웠다.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다. 청년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절망스러운 상황에 공감했다. 19년을 아나운서로 19년을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했다. 무려 38년이다. 주목받고 인정받으며 자율성이 보장되고 공적 가치도 실현할 수 있는 대단히 양질의 일이었다. 처음 10년간은 회사의 일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그러나 한 직업에 오랜 세월 종사하다 보면 자기 직업을 냉소적으로 보기 쉽다. 시간이 지나자 반복되는 일상이 목을 조여와 좁은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같이 갑갑했다.

 ‘좋은 직장’이라는 것이 굴레가 되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명예퇴직이 흔치 않게 좋은 조건으로 공지되었을 때 강렬하게 퇴사를 원했다. 하지만 엄마의 말 한마디로 뜻을 접었다. 엄마는 영어교사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있는 중학교에 배정되는 바람에 새 영어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일주일 정도 우리 반 영어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엄마의 영어 수업은 재미있었지만 엄마 스스로는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40대 초반에 교사를 그만두고 엄마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새로 산 오븐으로 매일 카스텔라와 쿠키를 구워주었고 친구들과 자주 여행도 다녔다. 편안해 보이는 엄마를 보며 여자의 행복은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직장 생활 내내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일상이 미안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엄마 손에 거뭇거뭇 피기 시작하는 검버섯을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엄마는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건 뭐야?”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학교를 일찍 그만둔 게 가장 후회스러워”

“아니 왜?” 난 진짜 놀랐다. 일을 그만두고 엄마는 내내 행복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계속했으면 연금도 나왔을 거고...”

결국 돈 때문인가

“애들도 더 재미있게 가르쳤을 것 같고”

흠. 돈 때문만은 아니군.

“빨리 그만두고 오래도록 심심했어.”     


현타가 왔다. 인생의 모토가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였는데 조기퇴직은 백 퍼센트 후회각이었다. 거기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엄마처럼 오래 심심할 게 확실했다. 아들이 결정타를 날렸다.

“하기 싫어서 그만두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만두세요, 하기 싫다고 좋은 직장을 버리면 자식들이 뭘 배우겠어요” 아들은 그저 가정소득이 반으로 줄어드는 게 두려워서 한 말일 수 있지만 자식이 배울 게 없다는 말은 강력했다. 가정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고 싶을 때도 눈을 부릅뜨고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훗날 군대 가서 휴가 나왔다 복귀하기가 너무나 싫었던 아들은 말을 바꿨다. “하기 싫은 이유로도 충분히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요”


어쨌거나 명퇴 기간은 이미 지났고 다시 기회는 없었다.  정년퇴직까지 꾸역꾸역 다닐 수밖에. 훗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들에게 인내를 가르치기 위해서.

억지로 했던 일들이 나를 키웠다는 건 인정한다. 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인내도 극기도 기를 수 없다. 젊은 날 힘들다고 벗어던졌다면 지금의 안정된 생활도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직장생활 7년 차인 아들은 아침마다 회사 가기 싫다고 투덜대지만 스스로 한 말이 있어 결코 대안 없이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이다.    

  

첫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원부터 직장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아침이면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가방을 꾸리고 어디론가 향하는 삶을 무려 50여 년을 지속해 왔다. 알람을 꺼도 비슷한 시각에 일어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샤워부터 하지 않고 가만 누워서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낼 궁리를 한다. 회사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순전히 내 문제다. 오랜 세월 울타리가 되어줬고 한 달도 빠짐없이 456회 월급과 적지 않은 보너스를 주었던 회사에 감사한다. 입사 동기들은 행복하게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보였고 종종 나만 이렇게 힘든 이유가 궁금했다. 사주에 물이 많고 역마살도 있다던데 흐르지 못하고 오래 머무르다 보니 생긴 답답함일까. 의문스럽던 차에 성격유형검사를 해본 후 확실해졌다. 나의 MBTI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얽매이고 통제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그럼에도 남들과 비슷한 길을 좇았다면 의무를 다하고 난 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 경우가 많단다. 내 속에 들어와 봤나 싶을 정도로 정확하다. 운명의 별은 계속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데 의무와 성실성과 현실은 머무르기를 강요하니 거기서 상충된 갈등이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다.

퇴직한 이후 비로소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      


'랩 걸'이라는 책을 쓴 식물학자 '호프 자런'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다섯 가지를 성취해야 한다고 했다. 성장하고 번식하고 자원을 비축하고 자기 방어를 하고 재생하는 것. 부모 밑에서 성장하고 결혼해서 번식했으며 직장생활을 통해 자원을 비축하고 자기 방어도 했다. 이제 남은 건 재생뿐이다. 다시 살아남.

은퇴 이후의 삶을 다시 태어난 듯 살아가면 나는 지구상의 생명체로써 할 일은 다 하게 된다. 여행 다니며 많이 보고 느끼고 글을 쓰며 타인과 소통하고 공동체의 선에 조금이라도 보탬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즐거움을 찾으면서 매일 재생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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