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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교육쟁이 Mar 25. 2020

텔레그램 n번방, 성교육을 재고하며

 

1) 피해자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디지털 기반의 집단 성착취가 연일 사회 문제로 떠오르지만, 성범죄 피해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거의 없다. 성범죄는 추가적인 가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피해자 유발론이라는 책임 전가에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성별을 떠나’, ‘가해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쉽게 돈을 벌려고 한 이들 또한 잘못했으며’, ‘일탈계를 만들어 음란물을 제작해 올린 피해자들도 처벌해야 한다’ 


하나하나 끔찍한 발언이지만, 나는 이 말을 하는 이들이 대단히 감수성 떨어지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성교육을 통해 만난 청소년과 양육자들은 ‘동의’를 근거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리는 데 꽤 익숙해 보였다. 그 동의가 자유의지인지 위계에 의한 폭력인지 캐묻지 않았다. 통념에 기대, 권력에 기대 생각하고 말했다. 


“결정한 것도, 동의한 것도 너야” 

라고.    




2) 인성교육, 성교육의 실패?


곧 성교육의 실패라는 얘기가 나올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건만 터지면 성교육이 매우 중요한 성범죄 예방이라는 얘기는 늘 빠지지 않고 나왔다.


그렇게 중요한만큼 예산과 인력과 교육시간이 확보되었는가는 차치하더라고, 성교육은 우리 사회의 없던 성차별을 양상하지 않는다. 없는 통념, 없던 규범 또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성차별적인 구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스템에 수없이 일조해 온 이들이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민주 시민 양성은 교육만을 통해 이뤄질 수 없다. 


개인의 합이 곧 구조로 환원되는 건 아니지만,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열심히 해왔던 이조차 이건 교육의 실패라고 말하는 건 성찰없는 회피에 불과할 뿐이다.     




3) 피해자 유발론은 강력한 성규범화를 통해 구성된다


그리고 (주류)성교육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인 구조, 성적 통념과 고정관념을 매우 충실히 반영해 왔다. 2015년 국가 차원에서 개발하고 전국 초중고에 배포한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은 성규범화 교육의 집합체에 가깝다. “데이트 성폭력은 여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아 발생한다”, “남자는 성욕에 약하고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단둘이 있어서는 안 된다” 등등. 이게 정부 차원의 최신 성교육 가이드라인이자 기준이라는 건 당혹스럽다 못해 참담한 수준이다. 


미성숙한 청소년과 폭력으로서의 성을 강조해, 성적 행동을 규제하고자 하는 성규범화 교육으로서의 성교육. 더욱 참담한 건 폭력예방으로서의 성교육만큼 성행동을 규제하는데 일조하는 것 또한 없다는 점이다.  



   

4) 순결교육을 대체한 성폭력예방교육은 가해를 예방하기 어렵다


가해자들이 들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성폭력예방교육은 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지금의 10~20대 남성들은 성폭력예방차원에서 의무화된 학교 성교육의 수혜자들이다. 


우리 사회 강력한 성차별과 성별 고정관념을 1년에 2시간 남짓한 교육으로 균열을 내긴 어렵다 한들, 균열을 내고자 하는 시도조차 부재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성폭력의 정의를 “타인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위”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여성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지 말자가 교육의 목표라니, 21세기 순결교육과 같다. 그리고 순결교육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성폭력예방교육은 성적 주체로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다루지 않는다. 순결하지 못한 여성은 존중받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비폭력과 성평등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민주 시민 또한 양성하기 어렵다. 




4) 성적자기결정권을 다루지 않는, 인권과 성평등에 기반하지 않는 성폭력예방교육은 진정한 예방교육이 될 수 없다


텔레그램 기반 성착취가 점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향후 교육부와 지자체의 성교육 정책이 폭력예방교육을 강화하는데 집중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성폭력예방교육 시간을 확보하고 예산을 투입할 것이다. 아동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폭력으로서의 성을 강조하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등을 다루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이 방식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가해자들 또한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까. 


그러니 보호의 관점을 취하기보다, 권리를 보장하는 성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침해받지 않아야 할 권리로서 성적자기결정권을 다루고, 성적 동의가 무엇인지 현실의 구체적인 사례와 권력을 통해 분석하고, 우리 사회의 성별고정관념과 성별이중규범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성교육을 통해,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성교육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매뉴얼 개발, 강사의 역량 향상, 시간과 예산의 확보 등 교육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 


예방은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통념에 의해 피해자를 탓하지 않는 것, 성적자기결정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 모두를 포괄한다.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지 않는 폭력예방교육이 아닌, 비폭력을 상상하는 폭력예방교육으로서의 성교육이 실현되길 바란다.





인권과 성평등에 기반한 포괄적 성교육의 실현 방향

1) 성교육은 보호에서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2) 성규범화 교육에서 인권과 성평등에 기반한 포괄적 성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3) 성폭력예방교육은 안전한 성관계, 성적 동의, 성별 고정관념과 성별 이중규범, 다양성과 인권을 주요 내용으로 다뤄야 한다.  

4) 제도적 차원에서 포괄적 성교육 매뉴얼 개발, 강사 역량 개발, 시간과 예산 등을 확보해 성평등한 교육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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