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교육쟁이 Dec 31. 2019

실체 없는 유령,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 매뉴얼대로 진행하고 있나요?” 성문화센터 실무자로 있던 시절, 강의가 잡힌 학교로부터 숱하게 들었던 질문이다. 


우리나라엔 국가 수준의 표준화된 성교육 매뉴얼이 있다. 교육부는 2013년부터 2년 동안 6억원을 들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급별로 ’성교육 표준안’을 개발했고, 2015년 전국의 학교에 배포했다. 국가가 제작한 학교 성교육의 표준 지침이다. 그런데 그 매뉴얼이 현재는 비공개다. 처음엔 교육부 누리집에 공개되었으나 어느 순간 “문제가 될 수 있는 자료”라며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모든 교육기관이 반드시 따라야 할 매뉴얼인데, 공개조차 하지 않으니 황당할 뿐이다. 일선 학교에서 보유하고 있을 수 있으나 누가 보유하고 있는지 파악조차 안된다. 마치 유령같다. 그리고 그 유령 같은 메뉴얼에 따라 성교육을 진행할 것을 일선 학교에선 요구한다. 


왜 비공개가 됐을까? 교육부는 체계적인 성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표준안을 개발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문제가 많다.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다양한 성적 지향과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 상 학교 성교육이 가진 일반적인 경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이 상식 수준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건 성폭력을 설명하는데 있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을 담고 있으며, 성폭력을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교육 표준안은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나타난다(초등)”,  “데이트 성폭력은 여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아서 생긴다(고등)” 등의 설명을 나열한다. 성폭력은 성별 간의 권력 격차와 사회 전반의 성차별적인 문화와 구조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한 유형이지, 남자의 성욕이 주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명은 성폭력의 구조적인 문제를 볼 수 없게 만들며, 더 심각하게는 성폭력을 생물학적인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만들면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화 하는데 일조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아 성폭력이 발생한다는 설명은 10여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 군 된장녀 논란을 연상시킨다. 다분히 여성혐오적이며, 더욱이 마치 피해자가 여지를 줬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했을 것이라는 편견 또한 강화한다. 


그 외에도 성교육 표준안은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부모의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을 결혼의 가치로 설명(중등)하면서 다양한 가족관계에 대한 상상의 가능성을 막고, 남녀의 성인식 및 책무성의 차이(중등)가 있다고 함으로써 성별에 따라 다른 규범과 행동 양식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성관계는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중등)고 이야기 하면서 사실상의 순결 교육을 하고 있으며, 성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건강한 이성애를 제시하는 등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정부 차원에서 제작한 최신 성교육 자료라는 점은 황당함을 넘어 참담하다. 


2015년 3월,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 연수자료’는, “성교육은 교사의 성적 가치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돼 있다. 이 말은 교사의 판단과 가치를 개입하지 말고, 표준안에 담긴 가치를 전수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차별, 성별 고정관념, 잠재적 가해자,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 성소수자 차별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성교육 표준안은 과연 ‘누구’의 가치인지 의문이 생긴다. 이를 통해 어떤 효과를 만들고자 하는 건지도.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은 성차별, 성별 고정관념, 잠재적 가해자,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 성소수자 차별 등을 ‘바람직한 성규범’이라 주입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물론 모든 교육은 ‘바람직한 상태 및 방향’을 전제로 한다. 성교육 역시 도달하고자 하는 분명히 상(교육 목표)이 존재하고 이를 위한 행동 양식을 제안하는 교육이다. 예를 들어 성폭력예방교육은 그 교육을 통해 (비폭력 상황뿐만 아니라) 평등하고 평화로운 성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제안하는 교육일수도 있다. 문제는 성교육 표준안이 전제하는 성규범은 우리 사회의 성을 둘러싼 편견과 오해를 강화하거나 성차별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학교 성교육은 우리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한 예민한 성찰을 담아야 한다. 성찰 없이는 그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성규범 혹은 성차별을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성교육 표준안이 보수정권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문제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들은 다시 제작하게 될 국가 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은 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6일, “한국사회는 아직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돼 있지 않다”라고 한 대통령의 발언만 놓고 보면, 성평등한 가치를 내포한 성교육 표준안 제작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차별주의자들의 민원과 다양한 이해관계보다 우선해야 할 평등과 인권의 가치는 언제쯤 공교육 내 명시될 수 있을까. 어쨌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성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까 싶다.




 

1) 성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수용할 수 있는 자율권은 필요하지만 성윤리나, 성규범, 성행동에 있어서는 타인을 배려하는 건강한 성행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을 배려한 책무성이 뒤따르는 건강한 성행동이 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행동은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들의 미래에 있을 결혼과 가정생활에 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행복한 삶을 위해 학생들에게 성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가치관과 성규범, 성행동에 대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성적인 통제 능력을 길러 다양한 성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도입 배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