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교육쟁이 Dec 22. 2019

받는 사람은 재미없고 하는 사람은 서툰, 성교육

질문의 시작

어떻게 성교육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기에 앞서, 나는 어떤 성교육을 받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자. 많은 성인들은 이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나도 그렇다. 생물 시간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 임신 된다는 내용을 공부했는데 그것도 성교육일까? 하지만 여기에는 성관계와 임신에 대한 태도, 성적 욕망과 지향, 성정체성, 관계맺기 등은 빠져 있다. 때문에 그들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라고 응답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90년대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순결 사탕을 받았고 낙태를 악마화해서 그린 페이크 다큐 영상을 봤다. 살인과 등치시켜 낙태의 비윤리성을 강조한 그 영상이 안타깝게도 조작된 것임을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피임 지식이 생길리 만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질외사정이 피임이 된다는 파트너의 말을 의심쩍어 하며 성관계를 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기억되겠지만, 나에게 그 사건은 다음 달 월경이 나오기까지 생생한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되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대다수의 기억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성교육은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고,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침묵했다. 때문에 침해받지 않아야 할 성적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교육받지 못했고,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는 역량을 강화시키지 못했다. 피해자는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것임도, 이 세상엔 나와 다른 다양한 성적 지향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도 10대인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시대의 탓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 사건이 사회 이슈화 되었고 재판까지 갔었던 사례는 1993년이 최초였다.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된 시기도 1994년이다. 무엇이 폭력인지 이때쯤이야 제도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후 다양성과 인권 존중, 여성권익과 지위 향상을 위한 법, 제도, 정책적 개선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다. 시대는 변하는데 성교육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지금의 청소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기억에 남는 성교육이 있나요?” 여지없이 똑같은 대답이 들려온다. 


“몰라요. 잤어요. 기억 안나요.” 


몰라도 상관없고, 듣고 있으면 잠만 쏟아지고, 기억에 남는게 거의 없는 지금의 성교육.


대체 이유가 뭘까. 이 글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성교육의 불편함은 성차별의 일면

질문에 대한 답에 앞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교육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떠올려보자. 


우리 사회에서 성교육을 ‘하는’ 주체들은 대체로 40대 이상 여성이다. 정확하게는 보건교사(대체로 여성), 양육자(대체로 여성), 성교육 강사(대체로 여성) 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순결 교육을 받았으며, 지속적으로 ‘여성’으로서 취해야 하는 성적 규범에 대해 사회적으로 학습 받고 그것을 실천해 왔다. 특히 ‘성’은 남성의 영역이고, 성욕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배웠다. 기껏해야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전부였고, 따라서 여성이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자신의 성적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드러내고 욕망하는 순간, 문란한 여성으로 취급당하거나, 차별과 배제, 혹은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단순 부끄러움이 아닌 수치심으로 이해하고, 성교육을 불편해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국 성교육의 불편함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과 맞닿아 있다. 즉 성차별의 여러 현상의 일면인 셈이다. 이 불편함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으며, 어떠한 성적 욕망은 허가하고 어떤 것은 금지하는지, 성별에 따라 어떤 행동을 자연스럽다고 학습시키고 있는지 비판해야 한다. 나아가서, 왜 성교육을 담당하는 절대 다수가 여성 양육자 혹은 여성 교사인지까지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교육을 하는 주체가 이 불편함-‘성차별’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면 과연 성교육이 효과가 있을까? 그 불편함을 회피하거나 드러냄으로써 어쩌면 성교육을 통해 이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을까?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이 우리 청소년을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시키는 주체로 키우는 것이라면, 교육자 역시 정의와 평등에 책임있는 주체여야 한다. 때문에 관습이나 전통, 현상 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것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할까. 많은 성인들이 성교육을 잘 해야 한다는 압박만 받을 뿐, 아직 성교육을 잘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언제가부터 성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가정과 학교에서의 역할과 실천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온갖 책과 미디어가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내가 만난 많은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양육자 성교육을 통해 여실히 느끼고 있다. 양육자 성교육은 가정에서 자녀와 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 태도, 기술 등을 하는 교육이다. 나는 양육자 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 교육 이전에 양육자를 위한 성교육 강좌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양육자들은 대체로 처음이거나 한 두번 들어본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성교육 책을 따로 찾아 읽어보신 적은 있으실까요?” 라고 물어보면 대체로 보지 않았거나 한 두권 정도 본 적이 있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성을 터놓고 이야기 하는데 높은 문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양육자들이 성교육을 통해 성지식을 학습하고 이를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서 양육에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양육자들은 대체로 “아무리 자녀라도 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부끄러움과는 달랐다. 어떤 양육자는 정확히 “수치심”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미혼의 교사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남자 청소년들이 자신을 성적대상화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낀다며 성교육 강사가 대신해 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교사를 자주 봐 왔다. 적어도 결혼한 여성이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덧붙이기도 했다. 


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하지만 실체 모를 불편한 삶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성교육을 하려고만 하면 드는 수치심이 성차별의 효과이자 학습임을 먼저 깨달아야 청소년에게 배움을 나눠 줄 수 있다. 그러한 배움은 단순 지식을 뛰어넘는다. 성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의 성찰을 통해 비로소 비판적 사고가 무엇인지, 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평등과 공정의 상태가 무엇인지, 청소년에게 설명할 수 있다. 




성교육이 성평등교육인 이유 

성교육을 이야기 하면서 성찰이나 혹은 평등과 공정의 상태를 운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답하기 위해 성교육이란 무엇인가란 가장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성교육을 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때의 성은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다.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지식을 전달하는데 교육의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판단이 끼어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성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성교육을 하면 “이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각기 다른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로 끝나 버리기 쉽다. 


하지만 성교육은 그것보다 보다 확장된 성의 개념을 끌어 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혹은 성을 둘러싼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 및 신념, 지식의 체계 등을 아우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을 바라볼 때 성과 관련된 행동이나 생각, 태도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성적 존재로서 나와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지 다룰 수 있다. 또 무엇이 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로막고 있는지, 어떤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추적할 수 있다. 성교육이 성정체성, 성차별, 성평등, 혐오, 연애 및 스킨십, 성관계, 성소수자 등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성교육은 다양한 성별간의 위치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권력 격차로 인한 차별, 배제, 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질문과 대안을 제시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육은 성차별의 문제뿐만 아니라 더 확장된 개념으로 권력과 차별, 폭력의 문제, 그것을 해결하여 더 좋은 사회를 이루는 방법을 교육의 일부로 다뤄야 한다. 무엇이 성평등한 사회인지 그것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권력과 폭력의 행사를 주의깊게 성찰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좀 더 나은 미래란 대체 무엇인가.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한계에 봉착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확산시켜 나갈 것인가. 


얼마나 많은 교사 및 양육자가 이 고민을 안고 성교육을 하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아무 질문과 대안이 없을뿐더러, 비판적 사고나 성찰 또한 부재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청소년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폭력으로써의 성과 미숙한 청소년

몰라도 상관없고, 듣고 있으면 잠만 쏟아지고, 기억에 남는게 거의 없는 지금의 성교육. 그 이유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있다. 궁금한 걸 알려주지 않고, 해마다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으며, 교육 방법도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더 근본적으로는 성과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관점이 매우 편향적이며, 그 편향성을 성찰하지 않는 성교육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편향성은 ‘폭력으로 구성된 성’과 ‘미숙한 존재인 청소년’에 대한 관점이다. 


대다수의 성교육에서 나타나는 성의 단면은 ‘포르노로 전시되는 성’, ‘착취와 매매가 가능한 성’, ‘폭력적 남성에 의해 착취되는 여성의 성’ 등이다. 자세하고 적나라한 성교육에 우려를 표하는 집단일수록 이러한 이미지는 더 강하게 나타난다. 때문에 이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네 몸을 소중히 하라’ 는 메시지만 남발한다. 성기(특히 여성 성기)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각각의 기능을 설명해 주는 것은 그들에게 포르노와 다름없다. 성기 그 자체가 포르노로 등치하는 것이다. 성기를 가진 존재가 어떤 각자의 차이나 욕망을 갖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도 포르노를 보는 시선과 비슷하다. 또 성이 곧 폭력이자 남성중심적이니 성적 권리, 특히 여성의 성적 쾌락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자체가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적 권리를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잠재적 가해자의 호기심을 건들면 언제라도 성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니 많은 성교육 강사들이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마세요”,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호기심이 자극될까봐 걱정입니다” “호기심으로 실천에 옮길까봐 염려된다” 같은 말을 수없이 듣는다. 


여기에는 청소년을 미숙한 존재로 보는 관점 역시 함께 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알려주면 호기심이 자극되고 이를 참지 못해 바로 실천으로 옮길 것이라는 말은, 청소년이 시시비비를 가릴지 모를뿐더러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며 대책없는 존재로 가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실천이라는 것도 음란물 시청, 성관계, 성폭력, 자위행동이 대부분이다. 즉, 문제 행동을 뜻한다. 실천이라는 아리송한 말에 담긴 뜻은 결국 성적 문제행동인 셈이다. 


성에 대해 알면 문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거나, “안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내 몸은 소중해”를 외치게 하는 성교육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타깝게도 목소리 높혀 외친다고 내 몸이 소중해지지 않는다. 교육은 사고와 경험을 통해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지 일방적 세뇌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알려주지 않으면 호기심조차 없을거라는 이 편견은 과연 누구의 믿음과 소망일까? 적어도 교육을 받는 사람의 욕구를 반영하진 않아 보인다. 


교육은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의도가 드러나는 법이다. 폭력으로써의 성과 미숙한 존재인 청소년을 부각시켜 얻고자 하는 교육의 의도는 간단하다. ‘하지 않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는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니 새로운 배움도, 주체적 판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성규범화교육이 아닌 성평등교육을 위해

여러 차례 출강을 통해, 나는 ‘하지 않는 몸’으로 청소년을 훈육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직접 마주쳐 왔다. 그리고 성교육에서 나오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목도해 왔다. 


많은 청소년들은 우리사회의 성차별, 성별고정관념, 성별이중규범 등을 아무 의심없이 익숙하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익숙한 것은 곧 정상적인 것이며,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것, 낯선 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편견과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는 것 또한 더러 보았다. 성에 대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거나,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청소년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성폭력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인지를 우려하거나, 혹은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것으로 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 성교육의 참담한 결과이다. 평등과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책임있는 시민으로 양성하는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만 유지할 뿐 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성을 둘러싼 주류적인 관점과 지식 그 자체를 과제로 받아 들이고, 해결 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교육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성규범 혹은 성차별을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성차별을 용인하는 성규범화교육으로 성교육이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 도처에서 무수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성적 존재로서 청소년을 강조하고 몸과 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성교육의 흐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또 성평등한 성교육의 내용과 방법론을 개발하는 등, 기존의 성교육과 다른 흐름은 과거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노력이 좀 더 가시화되고 성교육의 현장에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이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이들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민원인의 얼굴을 한 차별주의자들이었다. 나는 차별주의자보다 새로운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과 의미를 동의하는 지지자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그런 바램으로 이 글을 썼다. 성교육의 현장에서 현재의 성차별 구조를 유지하는 성교육이 아닌 성평등한 성교육을 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기록함으로써 평등과 대안을 꿈꾸는 더 많은 사람이 이를 공유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