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의 고향도 딱히 어디라고 할 수 없는 고향 정체성이 없는 나로서는 명확히 얘기할 수 있는 방콕은 진짜 내 마음의 고향 인지 모른다.
그 방콕에 2년 만에 다시 왔다.
가장 많이 온 해외 도시지만 이번은 여러 의미로 조금 다른 여행이다.
일단 생애 처음 내돈내산 비즈니스다. 그것도 무려 3 좌석을 결제했다.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행동은 때론 이렇게 거칠?다.
그냥 질렀어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이따가도 없으니까요.
코로나 이후 해외를 한 번도 나가지 못한 언니는 그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며 많이 지쳐있었다. 매번 함께 여행을 권유해 봤지만 현실적인 이유들로 같이 떠나지는 못했다. 그런 언니가 대뜸 콕 집어 '방콕'에 가고 싶다 했다. 나는 이때를 놓지 않고 다시 방콕에 갈 명분을 만들었다. 언니를 쉬게 해 줘야지 에헴. 그러려면 내가 잘 아는 데를 가야지 편하지 에헴에헴. (나중에 언니는 별생각 없이 '방콕'을 뱉었다 했다.)
그리하여 결성된 세 모녀의 첫 해외여행.(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아빠는 최종 후보에서 자진사퇴 했다.)
가족여행은 갔어도 모녀의 첫 해외여행이고, 언니는 몇 년 동안 힘들었던 일상에서 떠나는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도 주지 않았는데 이상한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이드의 숙명) 그래서 지른 것이 비즈니스였다. 언젠가 돈이 많을 때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그러나 그 언젠가 돈이 많을 때라는 건 내 인생에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이번에 해보기로 했다. 하필 인생에서 돈이 없는 지금 시점에. 그 서프라이즈 기획으로 인해(유상 비즈니스 가격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내가 끊은 방콕 항공권은 더더욱.) 늘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사는 나는 더없이 가난해져야 했고 최애의 MD 반지도 못 사고 꾹 참다가 친구의 선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 주제에 넘치는 소비는 아닌가도 계속 고민했다.(물론 객관적으로 매우 넘친다.) 한 번쯤 어때. 나쁜 짓도 아닌데?!라는 합리화를 계속해가며 그렇게 방콕 여행 계획을 촘촘히 짰다. 중간에 여행일정을 한번 변경해야 했는데 원래 12월 중순이었던 여행일정은 11월 중순 OR 12월 말 선택지 중에 뒤로 미루는 쪽으로 가다가 11월 중순으로 앞당겨졌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올해 2024년 내 운을 다 썼는데.. 12월로 중순 이후로 미뤘으면 내 최애의 콘서트 일정과 완벽히 겹쳐서 하루도 가지 못할 뻔했다. 아주아주 오싹했다. 일정을 바꾸는 기간 동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예약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며 11월로 바꿨는데...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란걸, 지금 좋아 보이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쳤다.
그렇게 11월 16일 새벽이 왔다. 공항에서 만나기 직전까지 그녀들에겐 비밀이다. 나의 서프라이즈 프로젝트는.
얼마면 되겠냐? 돈으로 시간을 삽니다.
주말 아침 출국장은 몹시 붐볐고 각자 집에서 출발하여 터미널에서 만난 엄마와 언니에게 나는 간단한 설명을 끝내고 비즈니스 체크인 카운터로 그녀들을 이끌었다.
"왜??? 너 우리 모르게 로또 됐어??" 언니는 아직 기뻐하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따라오며 물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애썼던 지난날의 나의 행적과 "기내식 먹어야 하니까 라운지에서 많이 먹지 마." "점심시간이 애매하니까 내리기 전에 라면 주문해서 오늘 점심은 그걸로 때울 거야" 등등의 앞으로의 당부를 마무리로 우리는 그렇게 탑승했다. 그런데 신나 하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던 언니는 아침식사를 끝으로 눕더니 비즈니스 서비스고 뭐고 누워서 계속 잤다. 어떻게 저렇게 한 번도 안 깨고 잘 잘 수 있나 싶어 나는 고개를 내밀고 계속 쳐다봤더랬다. 1분도 자지 못한 나로서는 신기하고 부러운 일이다. 그래서 라면은 나만 먹었다. 배는 나만 안 고팠다.
그런데 막상 비싼 돈 내며 누린 혜택은 또 다른 곳에서 나타났으니 방콕 공항에서 이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승객 패스트트랙'이었다.
예로부터 방콕 수완나품 공항은 출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기로 악명 높았다. 하지만 교통약자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승객 역시 패스트트랙으로 빠른 출입국 심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알고 끊은 건 아니고 끊고 보니 이런 정보가 있었다.(이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으므로) 문제는 내가 입국하기 몇 달 전, 태국 정부에서 자국 항공사 외에 타 항공사는 비즈니스 패스트트랙은 금지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정책이 다시 뒤집어졌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했다. 최종 확인한 정보는 여전히 이용가능 하다는 말이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비행기 탑승을 하자마자 승무원에게 물었으나 '직원 재량이나 본인이 알기로 원칙적으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험을 하기로 한다. 내 경험상 공항 직원이나 승무원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정보도 꽤 많았다. (정확한 본인 업무 범위가 아니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 나는 이 정보만을 위해 수많은 인터넷 정보를 뒤졌고, 여행 카페에서 최신 정보를 습득 한 자. 나를 믿기로 한다.
내리자마자 내 옆에 앉았던 가족은 일반 입국심사대로 갔지만 나는 가지 않는다. 요즘은 자동 출입국을 해서 입국 심사가 빠르다고 했는데 오늘은 아닌가 보다. 주말 낮이라 그런가 이미 입국 심사 줄이 어마어마하다. 내 판단이 틀렸다면 헤매다 다시 저 뒤로 줄을 서야 할 텐데... 식은땀이 나지만 패스트트랙 표지판을 찾는다. 하.. 어디지? 결국 서있는 직원에게 묻는다.(만국 공통 물어보는 게 가장 빠름)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줬더니,
"어?! 넌 여기로 줄 서면 돼! 일루 와" 알려준다.
"엄마, 언니! 여기 여기!!" 우린 냅다 직원이 안내해 준 패스트트랙 라인으로 들어와 줄을 선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탑승했던 비행기에서 일빠로 튀어나온 승객이 되었다.(아마도)
얼마나 입국심사가 오래 걸렸는지 심사하고 나왔더니 엄청나게 많은 양의 수하물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캐리어가 사람을 기다리며 계속 돌아가고 있던 희귀한 광경.
정보를 가진 자, 승리했던 순간이다.
여행지에서는 한 푼 아끼는 것보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이 이제 철칙이 되어버린 나는 편하게 픽업 서비스도 신청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대로 나아갑니다.
밀리는 시간까지 예상한, 정확한 시간에 호텔에 도착했다.
2년 전에 왔던 호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로 방을 바꾸는 등의 소동을 겪은지라 다시는 이 호텔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결국 다시 오고 말았다. 위치깡패에 3인 가능 룸을 보유하면서 이만한 가성비의 호텔은 없었다. 대신 메일로 당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당부의 당부의 메일을 집요하게 보내서인지(메일은 2년 전에도 보냈건만) 이번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당한 층. 준비되어 있는 엑스트라 베드. 청소상태 등등
아침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아직 시간이 있다. 우리는 환복을 하고 이른 저녁+공원 일정을 수행하러 간다.
모든 요구사항은 반영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하지만 일정상 올 일이 없어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노이스트 식당. 애매한 시간에 왔더니 대기는 없다. 대기는 없지만 앉아있는 손님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다. 심지어 여기는 T 멤버십 할인도 된다. 할인이 되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멤버십 바코드를 내밀었더니 현지 직원은 마치 국적이 한국인인 것처럼 능숙하게 메뉴를 클릭-클릭하고 넘어가더니 쿠폰 사용하기까지 눌러준다. 게다가 내 최신 정보에는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푸팟퐁커리 메뉴가 무료?! 예상 저녁 금액의 절반 가까이 세이브되었다. 출발이 좋다!
너무 다 좋아하는 메뉴. 저 땡모반(수박쥬스)은 양이 많으니 하나만 시키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만 시켰는데도 많아서 나중에 포장해서 공원에서 마시고 다님
그리고 바로 근처에 룸피니 공원엘 갔다. 보통 노이스트-룸피니공원 세트로 많이들 오신다. 그냥 공원인데 왕도마뱀이 관광? 명물이다. 얘네 때문에 일부러 오는 사람도 있고 얘네 때문에 안 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도 슬금슬금 육지로 기어 나오는 왕도마뱀을 만났다. 신기해서 사진은 찍었지만 가까이는 못 가겠다.
헤엄치고 다니는 왕도마뱀. 뭍(?)으로 나온 왕도마뱀. 언니는 악어냐며 ㅋㅋ
오리배도 무료로 탈 수 있는데 더워서 탈 수가 없다고 하더라. 공사 중이라 오리배 발견은 못했지만 오리배 타다가 도마뱀 만나면 무서워서 못 탈 것 같으니 아쉽진 않다.
자, 오늘의 큰 일정(밥 먹기, 산책하기, 컨디션 조절하기, 날씨 체크하기 정도) 끝냈으니 일단 숙소 지역으로 컴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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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남으면 야시장도 가려했으나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다. 숙소 근처에서 미리 사버리고 잊어버릴 자젤 구레한 쇼핑을 해치우고 마트에 가서 간식을 구매했다. 나는 이 동네마트의 할인 카드도 가지고 있는 자. 하핫! 그리고 숙소에서 잠시 쉰 후, 언니와 첫 마사지를 받는다. 힘들지 않은 첫날이었지만 몸이 노곤노곤 녹아내린다.
내일 오전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주말 시장 쇼핑, 오후엔 쇼핑몰 쇼핑 일정이 연달아 있다. 주말일정, 동선, 초반 체력.. 모두 고려한 스케줄이다. 바쁜 내일을 예고하며 간단한 내일 일정 브리핑을 마친다.
일단은 엄마와 언니.. 모두 표정이 좋다.(좋아야지 그럼... 내가 낸 돈이 얼만데... 암..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