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아 아센, <파노라마>
작년에 책을 출간하면서 인스타그램을 공개로 돌렸다. 그전엔 내 친구들, 그러니까 진짜로 나랑 전화도 하고, 만나서 밥도 먹고, 생일을 챙기고, 그랬던 친구들만 내 사진과 일상을 봤다. 하지만 출간을 준비하면서 출판사에서는 내 정보 중 하나로 인스타가 공개되기를 바랐다.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 정면 사진, 너무 내밀한 고백이 들어갔던 글은 비공개로 돌리고 책 리뷰를 적었던 몇 개의 피드만 남긴 채 인스타그램을 전체공개 모드로 전환했다. 그때 내 팔로워는 60명이 채 안 됐다. 그 사람들은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줌마 친구들의 집합체였다. 나는 그들과 정말로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홍보의 수단으로 내 인스타가 사용되려고 하는 순간부터 내 팔로워는 아주 비루한 숫자가 되었다. 나에게 잘못 CC가 걸려서 수신된 출판사 대표의 홍보 방안 분석 메일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작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적어서 작가 개인의 인스타그램 홍보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나는 그 개인적인 의견에 상처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작가'가 되려고 하면서 개인 홍보 수단 하나 마련해놓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했다. 변변한 자기 PR 수단도 없으면서 책을 쓰다니! 부끄러웠고, 자주 주눅 들었다. 그때부터 거의 매일 읽고 있는 책 사진을 올리고, 책리뷰도 자주 업로드했다. 해시태그도 줄줄 달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맞팔을 했다. 오늘 이 글도 아마 인스타에 올릴 거다. 지금 내 팔로워수는 227명이고, <친구공개> 모드일 때보다 팔로워가 거의 4배 늘었지만, 홍보 측면에선 어디 갖다 비비지도 못하는 숫자다. 다 확인하지도 못하는 지인들의 스토리와 그들의 일상과 내 소비패턴을 분석한 광고들이 빠르게 흘러간다.
인스타그램을 전체공개로 돌린 지 1년이 된 지금도 나는 무명이다. 내 베란다와, 키우는 식물들과, 자주 가는 장소와, 내가 읽었던 책들은 모조리 온라인에 공유되어 있다. 누구든 그걸 본다.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도.
<파노라마>는 온라인 전시행위, 개인의 '투명화'에 대해 고찰하고 쓴 장편소설이다. 오늘 국제도서전에서 릴리아 아센의 북토크가 열리니 그는 한국의 <어떤책들> 부스에 앉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각자의 내면과 육체와 의견을 공개했다."
"화장품이나 음식, 건조기, 헤어드라이기를 팔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끝나면, 커플과 결혼사진 같은 것들을 팔았고, 신시장 개척을 위해 아이를 낳았다. 초음파 사진부터 출산, 아이의 첫걸음마, 첫 다이빙까지 모조리 공개했다. 누구도 자기 아이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글을 적게 쓴다.
대신 사진을 찍는다.
책 읽을 시간에 사진의 색감을 매만져 피드를 올린다.
그러고 나면 '뭐라도 한 것'같은 성취감을 얻어 긴 글을 쓰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
브런치 글은 두 달 전 날짜에 멈춰 있다.
소설은 지지부진하게 나아가다 말다 한다.
나는 현대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걸까.
사실 누구도 긴 글을 읽지 않는지도.
내 일상엔
혐오가 뒤범벅되어 있다.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혐오가 뒤죽박죽으로 전시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폭력이 섞여있다.
"강간, 학대, 권력남용, 폭행 등 인간과 동물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다시 말해 벽으로 가려진 곳, 집 안, 문 닫힌 방,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학살당하는 장면을 누구도 참을 수 없게 되면서 도축장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 이전에는 가려져 있던 인간과 인간성 사이의 괴리"
"나는 책을 좋아했다. 문제는 책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켜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거기에는 측면 버튼도, 절전 모드도 없었다. 두세 페이지를 집중해 읽어도 짜증이 나도록 심장이 뛰었다. 문장들은 너무 길었고, 너무 말이 많았으며,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읽고 이해하기 위해 내가 노력해야 했다."
"나는 특징 없는 우리의 연립주택이, 현관 입구의 고양이 조각상과 그의 조개껍데기 소지품 함이, 우리 집 전화기가, 그가 간직하고 있던 떠나 버린 엄마의 사진이, 그의 침실 카펫이, 내 방의 벽지가, 시시한 우리의 하루하루가, 인스타그램에 절대로 올리지 않을 그 모든 것이 수치스러웠고, 그래서 이제 나는 어느 집 현관에 놓인 조개껍데기 모양의 소지품 함을 볼 때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폭력을 희구하고 있었던 걸까. 소설 속에서 사생활이 전부 공유되는 세상이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적어도 내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집에서 소리를... 지르고, 아이를 윽박지르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는 부분들은 얼룩져 있었고 대개 수치심을 유발했다. 손자국이 마구 찍힌 찬장 문이나 더러운 그릇이 쌓여 있는 설거지통 같은 것들. 숙제 안 하고 빈둥대는 아이에게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 질렀던 시간들.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2시간 연속으로 먹방 영상을 멍하니 보는 내 모습 같은 건 인스타에 없으니까....
나는 인스타의 셀럽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을 구경하느라 잠을 설쳤고 때로는 과거의 나 자신-젊었던-마저 부러워했다.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 책엔 부유층에 대한 혐오가 은근히 깔려 있었고, 그들에 대한 이해가 납작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물론 나도 그들-이라고 지칭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에 대해 잘 모르지만). 게이나 결혼이나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기대 글을 쓴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도록 내 얘기 같은 부분도 있었다.
"오직 책만이 나를 위로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문장으로 나를 안아주고 침묵으로 나를 감쌌다. 세상에는 지옥과 적대의 땅이 있는가 하면, 안식처도 있고, 다정한 작은 섬들도, 절대적인 사랑과 충직한 동반자도 있다는 사실을 책으로 알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 그러니까 작가들의 상상력에 흥분해서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종종 몇 살부터가 노인인지 자문해 왔는데, 어쩌면 자신의 가족 중 하나를 잃은 날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아직 이 책도 한 번밖에 읽지 못했다. 아직 충분한 이해와 합의에 가 닿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여전히 나는 인스타그램에 내 일상을 전시한다. 오늘은 문지혁의 <초급한국어>를 읽었다고 책 사진을 올렸고...' 할 일을 해냈다'라고 여긴다.
잠 안 오는 밤엔 인스타그램이 추천하는 친구 목록을 따라간다. 누군가에게 가 닿길 바란다.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라든가.
나는 밀실을 희구하고, 동물이 죽어가는 컨베이어벨트를 외면한다. 하지만 화분에서 잘 자란 베고니아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린다. 오늘 읽은 책을 올린다. 기우뚱거렸던 순간을 잘라 낸 요가 수련 시간의 영상을 올린다. 내 삶의 가장 매끈하고 단정한 부분을.
"도시 사람들은 이런 걸 이해 못 해. 유리 감옥 속에서 안락하게, 세상의 거친 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지. 죽음도, 인간의 숙명도, 기도하는 것조차도 뭔지 몰라. 신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나의 신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기도하는 법을 잊었을까.
내 글은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