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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워터 Aug 0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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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9번의 일


소설을 공부한 이래로 나는 내가 쓰는 문장이 타인을 맥락 없이 훼손하거나 부당하게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자고 다짐해 왔다. 그것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은 고사하고 낭만적인 포부 하나 없는 내가, 몇 년째 지난한 공부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대책 없는 내가, 내 글에 부여하는 최소한의 방향성이었다.

그 방향성이 거세게 흔들린 적이 있다. 이 년 전 여름이었다. 당시 어느 중소기업의 말단 사원으로 이 년 가까이 근무 중이었던 나의 연인은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는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가 맞지 않았던 데다가 언젠가부터 상사와의 관계도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도 보고 사과도 하고 박카스를 건네며 애원도 하고 다른 상사에게 도움도 청해보았지만 상황은 일 년째 제자리였다. 사회생활이란 본디 그렇고 회사가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이 회사를 떠나는 게 맞다는 식의 대답이 지루하게 돌아왔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자꾸만 말라가는 그를 보며 나는 퇴사를 권유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2년의 근무 기간을 모두 채워야 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금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경제적 불안이 컸던 그가 천만 원이 넘는 지원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집념과 오기가 강해지는 듯했고 그 모습을 보는 동안 나도 함께 괴로웠다. 그 일의 끝에는 남는 것보다 잃는 것이 분명 많을 거라고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계가 달린 일에 내가 연인이라고 한들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세 달만 버티겠다고 매일 그가 다짐을 이어가던 어느 날, 일은 터지고 말았다. 그가 그동안 자신을 괴롭게 했던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주말 밤에 그들은 서로 멸시와 조롱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나의 연인은 지금껏 하지 않았던 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억눌렸던 감정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충격받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절로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그의 탓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 지경이 되기까지 그가 앞서 홀로 겪은 시간들이 있었고, 회사는 그 문제를 등한시했다. 나는 그가 더 위험한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워 그의 옆을 내내 지켰다. 그의 눈빛은 초점 잃은 병든 개의 것과 같아 보였고 당장이라도 예상치 못할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매우 약해 보이면서도 그 안에 숨어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를 어디로 이끌지 나조차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동의를 얻은 후 장문의 메시지를 회사 측에 보냈다. 극심한 불안을 겪고 있으니 자꾸 전화해서 회유하고 자극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실상 절절하고 단호한 사정에 가까웠으나 그 안엔 나조차도 모르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가 저지른 경솔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회사 내에서 이렇게 망가져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회사 내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엉망이 되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저지른 일은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우리는 얼마간 그 일에 함께 연루되었다. 그때는 그의 심장이 내려앉으면 내 심장도 같이 내려앉았다.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고 그건 연인 간의 낭만적 사랑을 넘어 바닥에 떨어진 인간 사이에 겨우 남은 깊고 질긴 유대감에 가까웠는데 앞으로도 그런 경험은 다신 없으리라 생각한다.

​​

김혜진 장편소설 『9번의 일』 을 읽은 은유 작가는 "노동이 공공연히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 세상"에 필요한 소설이라고 해당 도서를 추천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 년 전 여름을 떠올리게 되었고 마음 깊이 공감하며 끝까지 따라 읽었다. "두 가지 마음이 들끓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걸지도 몰랐다.”(224p)는 소설 속 문장이 보여주듯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은 애사심을 가진 주인공이 어떻게든 회사를 믿어보려고 하고 자신의 행동을 개선하면서 퇴사를 미루고 버텨내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주인공은 점차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다. 오로지 자신의 것, 자신의 자리만을 생각하는 지독하고 왜소한 소시민으로. 나는 주인공의 얼굴에 그의 지난 회사 사람들의 얼굴을 덧입혔다. 열심히 살고 있었고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나의 경솔함을 자책하며 지난 나를 원망한 적이 많았다. 회사 내 간부로부터 그 여자애는 뭔데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여기 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그 말에 반박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말들이 나를 오랫동안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는 때때로 필요하다. 어떤 사람의 편을 제대로 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조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휘말리지 않을 힘도 길러야 한다.​


소설 마지막에 다다라 송전탑의 너트를 풀어 해체하고 분리시키며 "그동안 자신이 세워 올린 것들을 무너뜨리면서. 이 일을 길게, 아주 길게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지난날의 나를 긍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무너졌고 다시금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부당한 것에 투쟁하는 행위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그런 걸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이란 무엇인가. 김혜진 소설가는 여러 소설에서 일에 관해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오랫동안 이어가는 와중에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인간에게 일은 무엇이고, 회사는 무엇인지. 나 역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때 그 일이 왜 일어났고 그가 왜 그렇게 변해갔는지 여전히 명확히는 모른다. 회사는 좀처럼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실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이 회사에 자기 몸을 끼워 넣어 살고 있고 나도 그게 ‘맘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을 하고 회사를 다니는 내내 이런 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고, 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에 관해 실시간으로 생각하는 건 쉽지 않으므로 이 소설을 통해 각자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아니, 그런 시간이 몹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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