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가 여행의 반
독일 여행은 처음이었다. 독일어를 배운 적도, 공부한 적도 없었다. 독일 와인을 많이 마셔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독일이냐고 주위에서 물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인기가 덜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올해 초까지만 해도 독일에 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동안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고, 작업하던 책 마감이 다가왔고, 그렇게 올해가 반이나 훌쩍 지나가버렸다. 책을 끝내고 나니 허전함이 확 몰려왔고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당장 실행하기에는 무리였다. 이탈리어도 아직 한참 부족해서 좀 더 공부를 한 다음에 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처음 맛 보여주신 모젤 와인이 생각났다. 유럽 주요 와인 생산국 중에서 안 가본 나라가 독일이었다. 또, 친언니 (없지만) 보다 더 마음 맞는 언니가 같이 가준다고, 가자고 했다. 겉으로는 센 척 하지만 사실 혼자서는 여행도 못 가는 바보를 구제해준 언니 덕분에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베를린도 아니고 뮌헨도 아니고 프랑크프루트행 항공권을 사게 되었다. 비행기표를 예약하자마자 동선을 짜고 호텔을 알아보았다. 요즘에는 예약사이트에 워낙 많은 숙소가 올라오는 데다가 트립어드바이저와 같은 사이트의 평가와 비교해서 보면 얼추 그림이 그려진다. 구글맵에서 동선도 쫙 그려주니 가고 싶은 도시나 마을을 엮어서 이동 시간 계산하기도 너무나 편하다.
독일의 양대 와인 산지를 꼽으라면 모젤과 라인가우다. 생산량은 모젤이 더 많지만 역사적으로 라인가우 와인이 좀 더 대접받았다. 사실 어느 쪽이 더 좋으냐를 따지기에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모젤 와인이 작업실에서 고독하게 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면 라인가우 와인은 멋진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호텔 로비 같은 곳에 작품이 걸리는 그런 작가라고나 할까?
독일 와인 산지를 안바우게비트Anbaugebiet라고 하는데 현재 13개 지역이 있다. 이번에는 이 중 모젤과 라인가우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와인을 마실 때 보통 가벼운 와인부터 시작해서 점점 무거운 와인을 마신다. 음식도 마찬가지지만 크레셴도가 기본이다. 따라서 더 가벼운 와인이 나는 모젤에 먼저 가는 것이 순서였다. 모젤 강이 시작되는 코블렌츠에서 시작해서 강을 따라 (실제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선이었다. 모젤이 흐르는 방향은 반대다.) 남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명한 와인 산지가 있는 마을들을 스쳐가는 여정이었다. 라인 강이나 모젤 강을 따라 유람선을 타고 마을들을 경유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와이너리 투어회사에서 승합차로 데리고 다니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들이 정해준 노선을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가기 위해 렌터카를 택했다. 모젤 강을 따라 풍광을 즐기는 낭만가도도 인기 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니만큼 포도밭을 보면서 운전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모젤 강변에 있는 유명 산지와 라인가우 산지를 전부 가기엔 8박 9일이 너무 짧았다. 물론 다 갈 필요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새로운 곳을 느끼고 즐기지 못한다면 뭣하러 여행을 가겠는가?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많은 것을 보면 좋지만 충분히 받아들이고 기억할 만한 여유가 생길 정도로 균형을 잡으려면 계획은 필수였다. 너무 촘촘한 계획 또한 재미를 죽일 수 있으니 계획은 준비하되 잘 안 풀려도 즐길 수 있도록 대안과 여백도 넣으면서...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시음하며 생산자를 만나보기도 하려면 대체로 미리 방문 약속을 해야 했기 때문에 동선을 정확하게 정해야 했다. 와이너리를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돼 있었고, 원하는 시간이 마감된 경우도 있어서 가능한 약속 시간에 맞추어 일정을 짜다 보니 왔던 길을 다시 가는 동선의 비효율도 있었다. 또, 미슐랭 식당을 일정에 넣다 보니 저녁 먹고 나서 이동하기에는 피곤할 것 같아 아예 식당 옆으로 숙소를 바꾸기도 했다. 시음을 하더라도 운전 때문에 한 모금도 마실 수는 없었지만 언니와 나 모두 술이 약해서 와인은 저녁 먹으면서 마시기로 했다.
아무튼 떠나기 며칠 전까지 계속 조정했던 일정은 다음과 같다. 도시와 마을은 볼드체로, 관광 명소나 축제는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1일 차
저녁 프랑크프루트 도착
코블렌츠Koblenz (공항에서 바로 기차로 이동)
숙소 체크인
모젤 시작
2일 차
오전 코블렌츠에서 렌터카
→ 차로 15분
11:00 와이너리 방문 예약
→ 차로 40분
엘츠 성Burg Eltz
점심, 성 투어
→ 차로 30분
오후 코헴Cochem
숙소 체크인
동네 와이너리 방문, 저녁 식사 등 자유
3일 차
오전 체크아웃
→ 차로 40분
퓐더리히Pünderich
10:30 와이너리 방문/시음 예약
→ 차로 40분
오후 베른카스텔쿠에스Bernkastel-Kues
인근 와이너리 방문 등 자유
→ 차로 20분
피슈포르트Piesport
숙소 체크인
로마 시대 양조장 구경
인근 와이너리 방문 등 자유
→ 숙소에서 도보 10분
19시 미슐랭 ** 식당 (예약)
4일 차
오전 체크아웃
→ 차로 20분
베른카스텔 쿠에스Bernkastel-Kues
모젤 와인 축제
→ 차로 15분
오후 브라우네베르크Brauneberg
와이너리숙소 체크인
→ 도보 20분
14:00 와이너리 방문/시음 예약
5일 차
오전 모젤 와인 축제
→ 차로 1시간 40분
라인가우로 이동
뤼데스하임Rüdesheim
오후 숙소 (아파트) 체크인
→ 도보 3분
13:30 와이너리와 포도밭 투어/시음 예약
요하니스베르크 성Schloss Johanissberg
18:00 저녁식사 예약 (부설 레스토랑Schlossschänke)
20:00 라인가우음악제RMF 요하니스베르크 성 공연 관람
6일 차
숙소 체크아웃
10:00 요하니스베르크 성 와이너리와 포도밭 투어/시음 예약
오후 폴라츠 성Schloss Vollrads 방문/시음
와이너리 방문 등 자유
→ 차로 30분
비스바덴Wiesbaden
숙소 체크인
7일 차
오전 자유
→ 차로 30분
오후 엘트빌Eltville
에버바흐 수도원/와이너리Kloster Eberbach
부설 숙소 체크인
시음/포도밭 투어
19:00 부설 식당 예약
8일 차
오전 체크아웃
→ 차로 50분
오후 프랑크프루트
숙소 체크인
렌터카 반납
미술관 (도보)
9일 차
오전 체크아웃
오후 공항 이동
구글 지도로 본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총 이동 시간은 6시간 반 정도였으니 아무리 헤매더라도 일주일 동안 10시간 안 되는 수준으로 잡았다.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 일정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했던 적도 물론 있고 계획에 없었지만 너무나 즐거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계획하지 않았지만 얻어 건진 사건이 가장 인상 깊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추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기 때문에 몇 배 강렬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기보다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