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요 그란데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배경으로 설정되었던 곳이 산타 리타 힐스 Sta. Rita Hills다. 영화에서는 산타 바바라라고 부르는데, 행정구역 상으로는 산타 바바라 카운티에 속하고,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 AVA의 일부다. AVA는 미국 와인 생산 지역 American Citicultural Area, 즉, 와인업계에서 사용하는 군읍면리 같은 공식 명칭으로 프랑스 AOC와 비슷한 개념이다. 산타 리타 힐스 AVA는 2001년에 생겼다. 유명세로는 나파 밸리를 따라갈 수 없지만 피노누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새 방앗간 같은 지역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와이너리를 찾아다니며 숨은 보물을 찾는 즐거움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씨 스모크 Sea Smoke 와이너리는 방문객을 받지도 투어를 진행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는 와인 위주로 알아보다 아로요 그란데 Arroyo Grande 지역에 있는 탤리 빈야드 Talley Vineyards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로요 그란데 AVA도 산타 리타 힐스처럼 위도상으로는 꽤 남쪽이지만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과 안개 덕분에 기온이 높지 않아 피노 누이와 샤르도네 같은 부르고뉴 품종이 잘 자란다.
탤리 빈야드는 이름에서 나타나듯 포도밭들을 끼고 양조장이 있었고, 주인장이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식사가 제공되는 시음과 투어도 제공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식사까지는 아니고 안주 정도 나오는 시음과 투어를 예약해두었다. 서울에서 미리 예약과 결제를 해놓고 가니 편한 점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점심도 못 먹고 (빈 속에 시음하다 인사불성이 될까 봐 떨면서) 갔다.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은 방문객을 받고 투어를 하는 곳이 많고 마케팅에 적극적이다. 그 덕분에 접근성이 좋지만 여러 가지 기념품까지 만들어놓고 파는 것을 보니 농업인지 상업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와인만 맛있으면 되지만.
아도비 벽돌로 만든 벽난로가 있어서 아도비 룸이라고 부르는 아늑한 방에서 진행될 시음을 위해 테이블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시음용 잔, 물, 시음 노트 필기용 전용 메모지까지 준비되어 있었고, 살라미 등 사퀴테리와 치즈, 올리브, 크래커로 구성된 안주는 제대로 만든 맛있는 것들이었다.
샤르도네 중 최상급 라인이며 단일 밭에서 나는 포도로만 만든 올리버스 샤르도네는 부르고뉴, 그중에서도 뫼르소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잘 익은 사과와 살구 향이 진하고 상큼하면서 부드러운 화이트였다. 로즈마리스 샤르도네가 좀 더 맛있었지만 이미 품절이라 시음 때 맛본 한 입이 아마 평생 마지막일 것이다. 그 빈티지를 사놓은 사람이 나에게 맛 보여 줄 일은 없으니 말이다.
기본 등급 샤르도네도 깔끔하면서 과일향이 풍부했다. 20달러 좀 넘었으니 가성비도 괜찮았지만 서울에 들고 온 건 올리버스 샤르도네였다.
우리는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양조장에서 가까운 포도밭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수확이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구경을 시켜줄 여유가 있었겠지만 수확 모습을 보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Ce qui nous lie>에서 처럼 포도 던지기 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익은 포도를 따서 모은 다음 선별해서 발효조에 넣을 때 와이너리를 가득 채울 향이 궁금했다.
그래도 발효조는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발효 중인 와인에서 강렬하게 올라오는 으깨진 포도 냄새는 김장할 때 나는 양념 냄새처럼 재료들이 아직 어우러지지 않은 생생하면서도 압도적인 향이었다.
와인 양조에서 피자주 pigéage, 또는 펀치 다운 punch down이라는 과정은 발효 중 표면으로 떠오르는 포도껍질, 줄기, 씨 등 건더기를 으깨면서 아래로 밀어내려 색, 타닌, 향, 그리고 맛이 더 잘 우러나도록 하는 과정이다. 주로 레드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양조 기법이다. 티백으로 차를 우려낼 때 티백이 위로 떠오르면 뜨거운 물속에 잠기도록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감자 으깨는 조리도구와 약간 비슷하게 생긴 저 도구로 피자주를 하는 것이다.
부르고뉴 스타일을 지향하는 와이너리가 아니랄까 봐 오크통도 부르고뉴 산을 사용한다. 오크통 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 와인 가격이 쌀 수는 없는 이유를 알겠다.
포도밭과 양조장 투어를 마치고 다시 아도비 룸으로 돌아와 땀을 식히고 레드 와인 시음으로 들어갔다. 오후 기온이 25도를 넘는데 밭을 걸어 다니다 오니 더워져 레드가 그다지 당기지 않았지만 새콤달콤한 딸기, 자두 향이 가득한 피노 누아를 홀짝거리다 보니 어느새 술이 취해 있었다.
두 명이서 팁까지 130달러 정도였으니 꽤 괜찮은 시음 투어였다.
정원과 포도밭을 좀 더 걸으며 술을 깬 다음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킨지 Kynsi 와이너리로 갔다. 하지만 이미 코와 입이 둔해져 제대로 된 시음은 힘들었다. 기억나는 것은 전날 갔었던 샌포드 와이너리를 부부가 운영하다가 남편이 바람이 난 다음 이혼하고 아내에게 소유권을 넘기고 새로 설립한 곳이 킨지라는 것이다. 물론 탤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남자들이 이혼하면 개털 되기 십상이라는 사실이 와인보다 인상 깊었던 곳이다.
부엉이 트레이드마크가 귀엽고 직원도 친절했지만 와인 맛은 섬세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짧은 시음과 넉넉한 팁으로 방문을 마무리하고 잠시 포도밭을 둘러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것 같으면서도 거친 아름다움이 있었던 꽃은 스패니시 라벤더라고 했다.
그리고 시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