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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청춘

by shini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새파랗던 나는 암 병동에 들어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시들어가는 과정을 매일 관찰하게 되었다. 예상되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무력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죽음으로 가는 과정 중에 약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때론 일련의 행위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곧 그들의 희미한 눈동자를 닮아갔다. 어쩌다 새벽에 긴급콜이 울리는 날엔 역류한 피를 뿜고 눈을 감는 남자를 향해 두려움에 떠는 아이 앞에서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사망선고를 웅얼거렸다. 반복되는 밤샘 당직으로 몽롱해진 나는 남은 아이를 위로할 힘이 없어 그저 어깨를 토닥일 뿐이었다. 언젠가 그곳을 나오면서 나는 그때를 내 생 중 암흑기로 칭했고 마주했던 죽음들과 따라붙은 무력감을 의식 밑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묻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죽음을 엿본 뒤 세월이 흘러 구덩이 속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가 움트고 있었다면 그건 거짓말일까.


나의 불안은 대부분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것을 아직 이루지 못한 현실을 인식하면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나는 늘 미래에 무언가가 되고 싶어 했기에 현실은 매번 ‘그것이 되어가는 과정’에 머물렀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과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과거의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의 과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결국 우리가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상일 수 있다. ‘등대로’에서 제임스는 긴 세월 동안 그토록 가고 싶었던 등대가 살풍경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견고한 탑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인생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어떤 목적을 이루며 마무리가 될 것 같지만 주변의 죽음을 보면 삶은 그저 과정 중에 끝이 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정도 의미를 잃는다. 삶을 <과정→목적>으로 바라보면 자꾸 목적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삶이 앞둔 과녁이 그저 죽음뿐이라면 어떨까.


생장과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 가진 것을 내주어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은 누군가에겐 허무함을 안겨줄지 모르지만 나에겐 거리에 따라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삶은 알 수 없는 질문의 연속으로 우리를 무력감에 빠뜨리며 순간의 행복은 뒤늦게 반짝인다. 죽음은 삶의 유한성을 부각했고 좌절감이 나를 잠식할 때마다 나는 삶의 속성을 떠올리며 스스로 규정했던 한계를 지워갔다. 우리는 기억을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미숙한 감정을 끄집어내어 화해를 청했고 조금씩 성숙한 자아로 다듬어갈 수 있었다.


품고 있는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었을 때 우리는 완전한 정지의 상태에 이른다. 어차피 원자로 흩어져 우주의 먼지 한 톨로 돌아갈 운명이라면 그전까지는 갓 돋은 새싹이 처음의 햇볕을 접할 때처럼 싱그러움 가득 안고 반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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