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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Feb 09. 2024

<137호>서평: 가난을 이해한다는 것

편집위원 야자수

구겨진 하얀 종이 배경 위에 '서평: 가난을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 중 한 구절이다.


주인공인 ‘나’는 빚더미에 내몰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잃고, 하루하루를 슬픔 속에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공장에 새로 들어온 ‘상훈’과 하룻밤을 보내고 마음까지 나눈다. ‘나’는 연탄 한 장, 생활비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상훈’과 동거를 하게 된다. 그러다, 상훈은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공장에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상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상훈’이 좋은 옷과 대학 뱃지를 달고 오기 전까지는 그가  ‘있는 집 자식’이었던 것을 모른 채로.


“우리 아버진 좋은 분이야. 요즈음 세상에 보기 드문 분이지. 자식들에게 호강 대신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으셨던 거야. 덕분에 나는 이번 방학에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어(...) 실상 요새 사람들, 자식을 너무 연하게 키우거든”


상훈은 가난마저 자신의 스펙으로 만든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자신의 인생 서사를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건 중 하나다. ‘고된’ 경제 상황을 딛고 성공할 미래의 자신을 떳떳하게 만들어줄 스펙정도.

이어서 ‘상훈’은 선의를 담지만, ‘나’에게는 상처뿐인 말을 던진다.


“그래서 아버지가 기분 좋아하시는 낌새를 타 가지고 네 얘기를 했어. 이런저런 빈민굴의 비참한 실정을 말씀드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슬쩍 내비쳤지. 글쎄 하룻밤에 연탄 반장을 아끼자고 체온을 나누기 위해 남자를 한 이불 속에 끌어들이는 여자애가 다 있더라고 말이야. 물론 끌려 들어간 남자가 나였단 소리는 빼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집에 데려다 잔심부름이라고 시키다 쓸만하면 어디 야학이라도 보내자고 하시잖아.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해. 이건 끔찍할뿐더러 부끄러운 생활이야. 연탄을 아끼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이는 생활을 너도 부끄러워할줄 알아야돼


‘상훈’은 자신은 요즘 것들과 다른 경험을 했다며 우쭐해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끔찍하고, 부끄럽게 살고 있다며 그 삶을 청산하라 비난한다.정확히 "가난을 선망하고, 빈곤을 혐오"*하는 모순적인 태도다. ("가난을 선망하고, 빈곤을 혐오"하는 인용구는『연세』 130호 유자의 “차상위계층으로 연세대에서 살아남기”에 나온 표현이다. 해당 글에서는 중산층과 상류층이 느끼는 불안감 때문에 본인의 경제적 약자성을 강조하며 실제 빈자들의 삶은 지워진다는 의미에서 ‘가난을 선망한다’고 표현하였고, 동시에 일상적으로 빈곤을 혐오하는 표현을 쓰는 지인들을 보며 ‘빈곤을 혐오한다’고 표현하였다. 본문에서는 ‘상훈’이 가난을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해당 어구를 인용했다.) ‘상훈’은 가난한 삶을 타자화하고 하나의 집단으로만 그려낸다. 그렇게 ‘상훈’의 머릿속에 가난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 비난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만 남게 된다. 물론 ‘나’도 당연히 빚더미가 쌓인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상훈보다 자신이 더 ‘나’를 채찍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말 있지 않나. 똑같은 말을 누가 하냐에 따라 그 의미가 아주 다른 것.


이번 글에서는 가난과 빈곤을 대하는 나-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가난과 빈곤을 헤쳐나오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인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도 하다. 세상에 ‘가난’도 다양한 서사로서 존재하겠지만, 이번에는 두 개의 책 <힐빌리의 노래>와 책<쇳밥일지>으로 그 서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두 책을 읽고, 다시 적는 나는

이번 글을 정말 머리를 쥐어 뜯으며 적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내 책상 주변에 뜯긴 머리가 수두룩하다. 내가 과연 이 글을 써도 되는 걸까? 내가 어떤 자격이 있지?라는 고민이 계속 들었다. 왜냐하면 거칠게 분류하자면, 나는 넉넉하게 자라온 편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즉 내가 그 ‘당사자’인 글쓰기는 한편에서 수월하다. 내가 느낀 경험과 감정들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런 글은 설득력 있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아닌 글을 쓸 때는, 내 머릿속에서 온갖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과연 이 사람들을 납작하게 설명하는 건 아닐까?’, ‘내 글을 읽고 또 다른 누군가가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는 당사자성과 재현의 문제를 떠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경험을 흘려보내지 않고 차근차근 적어놓는 것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내 머릿속에서 임의로 나눠진 ‘빈자’와 ‘부자’의 굳건했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자본의 격차는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다름 아닌, ‘친구 만들기’였다. 코로나 학번이이라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면수업이 다가오자, 2~3만원이 드는 친구들과 한번 갖는 술자리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중고등학생때의 씀씀이는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있는 신0떡볶이, 편의점, 피자0쿨, 일년에 한번있는 놀이공원. 딱 그 정도였다. 고등학교때와 달리 대학교에서는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해야 했고, 밥약이라는 스케쥴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 ’밥약‘이라는 절차가 대학생활에서는 친분을 쌓아가는데 필요한 의례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고통스러웠다. 돈을 내지 않으면 관계를 쌓기 어려웠다.

돈을 쓸 때뿐만 아니라 돈을 벌 때도 이질감을 느꼈다. 연대생들이 갖고 있는 ‘연세대학교‘라는 이름값과 실제로 혹독히 훈련받은 학습능력. 이는 사교육시장에서 환영받는다. 오죽하면 ’설탭‘이라는 스카이 대학생 과외 선생님 프로그램이 있겠나. 시급이 높은 과외를 하려면 학벌로 대표되는 교육자본이 있어야 했다. 필자도 과외를 해본적이 있으나, 개인 자질 부족과 학부모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식당 서빙 알바 및 주방보조로 일했다. 일하면서 ‘연세대학생’인 필자는 왜 이런 알바를 하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면서 과외와 비슷한 금액을 벌려면 과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외와 알바의 차이는 ‘(예비)학위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 학위증 안에서도 사교육시장에서는 ‘등급’이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친구들 사이에서 본다면 사실 ‘과외’라는 돈벌이는 흔치 않다. 또한, 내가 알바한 프렌차이즈 식당에서 ‘연세대학생’인 필자는 왜 이런 알바를 하냐는 말도 들었다. 과외를 하는 대학생은 어쩌면 특수한 케이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씀씀이에서도, 돈벌이 방식에서도 여러모로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마주한 현실은 학위증이 필요한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두가지 모두를 경험한 부모님이었다.  35년간 금융업계 정직원으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퇴직하고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됐다. 평생을 앉아서 일하던 사람이 몸을 써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푸하하, 나중에는 다치지 않을까 하는 근심걱정.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아빠보고 일 못한다고 뭐라안해?

뭐라 하지~ 그냥 그렇게 일하는거지. 


그러던 와중 수강하던 수업에서 교수가 한 말은 나에게 착잡함을 안겨주었다. 한 학생이 발표때 스웨터를 입고와서 일침을 날리셨다. “세미정장이라도 입고와야지. 나중에 회사에 취업해서 발표할 때를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작업복’을 안 입는다.” 나는 교수가 왜 그런말을 했는지 너무 이해가 간다. 어쩌면 이 대학교에서 대부분은 정장 입는 직업을 원할 거고, 나 자신도 그렇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말이 이상하게 불편했고, 찝찝한 마음상태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강의실 안에는 부모님이 작업복을 입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주말마다 작업복을 입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아버지의 퇴직이 다가오자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샌드위치 전문 생산라인 공장과 톨게이트 캐셔로 일하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공장에 가서는 몽골에서온 이주 노동자와 일하고, 톨게이트에서는 일주일에 두어 번은 야간근무를 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웃겼던 건, 엄마가 돈을 버는 목적이 어머니의 취미인 골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라운딩에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 7만원에서 10만원의 돈이 필요했는데, 엄마는 그 돈을 벌기 위해 일했다. 그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보통 ‘골프’라는 운동이 가지는 이미지는 여유로운 집안이 즐기는 여가활동이지만, 엄마는 그 관계가 도치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노후를 즐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일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이 든다. 결국 노동 강도를 버티지 못해 일을 그만두고, 돈이 많이 안드는 여가를 찾으시긴 하셨다.


단순히 은행원과 전업주부로 지냈던 부모님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에게 닥친 노동의 현실은 이전과는 달랐다. 낯선 육체노동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대학생인 필자에게 육체노동은 그저 대학생 때 잠깐하는 노동일 뿐 계속 업으로 삼고싶지 않은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나중에 저런 시간이 오게 될까’ 하는 많은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좌우지간. 사실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다. ‘명문대’라고 불리우는 이 학교에서 누군들 격차를 안 느꼈을까. 오묘한 격차를 느낀 순간들은 지금까지의 내 삶을 계속 곱씹게 했고, 이런 차이를 겪고 있을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이 이해하고 싶어졌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가난’을 어떻게 바라고 있었던 걸까? 연세지 130호에 유자가 적은 것처럼, 내가 가난을 선망하고, 빈곤을 혐오하는 건 아닐까 수천번 고민이 들지만, 찝찝한 마음을 안고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큰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책 두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책 <쇳밥일지>, <힐빌리의 노래> 소개

두 책의 저자는 사는 곳은 다르지만 노동자 계층의 남성으로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국 지방에 사는 노동자 계층 남성의 이야기를 담은 <쇳밥일지>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남성의 이야기를 담은 <힐빌리의 노래>.  두 책은 각자의 출생, 가족이야기부터 학창시절, 성인이 되고나서의 마주한 노동세계, 그리고 현재까지의 삶까지 전부를 촘촘히 담고 있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음’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성장생활이 담긴 이야기를 읽다보면, 가난은 불안함을 넘어 학습된 무기력과 자기비하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곁에는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는 몇명이 있었고, 결국에는 변호사/프리랜서 글쟁이가 된다.

또한 두 저자들은 수도권/대학생/여성으로 살고 있는 필자기준에서 가장 심리적/물리적으로 먼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생활세계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이 어떤 풍경 속에서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사람이 주변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던져주는 ‘가난’의 생활세계를 이해하고, 그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성공’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기준은 정말 개인에게 달려있는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하단의 내용은 자세한 줄거리가 소개되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필자의 필터를 거친 하나의 요약일 뿐이다. 책을 직접 읽으며, 날것 그대로의 문장으로 두텁게 기술되어 있는 그들이 느낀 그대로의 삶을 느껴보길 바란다.



쇳밥일지/ 천현우/2022/문학동네
쇳밥일지 책표지



수많은 여자가 엄마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내게 엄마는 심여사뿐이었다.(35p)

마산 출생 천현우에게는 친부-친모가 있지만 실은 유일한 ‘어머니’ 심여사 손에 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어릴 때 잠깐 친부와 의붓어머니 심여사와 같이 서울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바람으로 인해 심여사는 8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는 떠돌아니듯 초등학교를 옮겨다녔으며, 양육자도 계속 번갈아가며 바뀌었다. 저자는 친부로부터는 방임, 친모로부터는 가정폭력, 동년배들로부터는 학교폭력을 겪어야만했다. 결국은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유일한 어머니 심여사와 함께 살게 된다. 

 


대다수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요소들이 내겐 기간제 상품이었기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도 취업을 해야 했다.(17p)

천현우는 취업을 목적으로 창원시의 실업계고등학교, 통신과(인터넷 케이블 내선 관련 기술을 배우는 과)에 진학했다. 월세도 내기 힘든 현실이니 대학 진학은 선택지에조차 넣지 않았다. 결국 고3이 다가오자, 저자는 심여사의 고집으로 창원기능대를 다니게 된다. 하지만 그는 등록금으로 내야하는 120만원 조차 낼 수 없어서 몇년동안 키워왔던 게임 아이템과 캐릭터를 팔게된다. 그에게 게임은 남다른 존재였다. 중학교시절 게임중독교육을 받을 만큼 게임을 과도하게 했지만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았다. 되려 저자에게 게임세계는  ‘노력의 흔적’을 남기고 ‘건강한 교우관계’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실세계에서는 돈이 없어 현장체험학습과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였지만, 게임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친구들과 밤새 떠들고 수많은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120만원을 마련해 입학한 대학은 그 금액만큼 소중하지 않았다. 왕복 2시간 반의 통학, 하루에 꼭 써야 하는 교통비와 식비 4000원. 그뿐이었다.  억지로 들어간 대학이니 잘 맞을 리 없었다. 낭만은 찾기 어려웠다. 대학은 2년간 취업을 하거나 편입을 준비하는 군대 같은 공간에 가까웠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견딜 수 없던 그는 돈이라도 벌 수 있는 공장 알바를 하려고 대학생임을 속이고 방학동안 일하게 된다. 주야교대로 쉴 틈  없이 일하고, 다시 심여사의 병원비로 돈을 쓰기를 반복한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찾아오는 군 입대가 다가왔다. 운좋게 대학주변 공장지대에 위치한 의료기기 제조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계속 일하게 되었다.



막연하고 느슨한 신뢰로 이어진 세계. 법보다 감정이 우선하는 그곳에선 돈을 은행처럼 냉철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투자 역시 전망보단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98p)

그에게 있어 가난의 굴레는 벗어날 듯 벗어날 수 없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편입 준비를 결심하게 된다. 그 이유는 주변인의 비아냥. 게임 세계 속에서만 만났던 친구 사수생 ‘허세’의 인서울 대학 합격을 축하할 겸  다같이 처음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된다. 어색함과 반가움은 잠시, ‘허세’는 한숨에 ‘찐따’(저자 본인)-그들은 게임속에서 서로를 이렇게 불렀다. 그 외에 ‘돼지’, ‘오덕’이 있다.-에게 선을 넘는다. 천현우는 ‘허세’에게 아직은 학생인데 밥사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냈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래 너는 돈 벌어서 좋겠다. 그래갖고 대기업 갈 수 있긋나”였다. 그때부터 저자는 편입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 다짐도 오래가지 못했다. 산업기능요원 소집 해제 몇십일 전날, 인생에서 가장 짙은 회색빛 미래가 드리워져 왔다. 심여사는 친해진 지 1년밖에 안된 사람에게 좋은 투자처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사채업자를 통해 1억을 어렵사리 긁어모아 투자했는데,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심여사는 ‘나’의 편입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랬던 것기에 더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집에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그 돈은 여윳돈이 아니라 한달 월세임을 서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바닥은 애초에 논리적인 근거에 의한 ‘전망’을 보는게 아니라 ‘막연하고 느슨한’ 관계에서 충동적으로 돈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월급 140만원으로 도합 5년은 꼬박꼬박 갚아야하는 돈이었다. 



내가 니 칼럼은 전부 챙겨보거든. 근데 그 왜, 우리 판때기에서만 쓰는 말들이 있잖냐?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다 그대로 다 실을 순 없잖어.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란 말이지. (..) 우리가 그리 욕해도 결국 가진 놈들은 먹물이잖냐? 그 먹물들이 원하는 양식미라는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우리 얘기를 먹물들 언어로 번역해야해. 좀 아니꼬워도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지.(283p)

빚을 갚기 위해 여러 하청업체를 다닌다. 그 세상은 또 하나의 차별이었다. 하청직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충분한 휴게시간과 휴게실이, 직고용 노동자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졌다. 저자는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문틀을 끼는 일을 하다가 문득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배는 나오고 머리는 벗겨진 50대의 포터 아저씨와 용접일을 다니며 저자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첫째로 용접의 재미를 알게 된다. 세상의 편견대로 용접이 힘든 일이라는 걸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해보니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섬세한 작업임을 느낀다. 정말 다행인건 저자가 무언가에 진심으로 몰두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점이다. 국비지원으로 학원을 다녔고, 재수로 인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위해  밤낮없이 납땜질을 하면서 자격증을 땄다. 

둘째로, 세상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된다. 천현우의 세상살이에 대한 불만과 동정심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포터아저씨는 ‘너는 잘 살 것 같다’며 책 10권을 건네준다. 그 안에는 복잡한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경제와 정치, 사회 서적이 들어있었다. 애초에 글을 조금씩 읽어오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이후에 그는 행동경제학 팟캐스트를 들으며 자신이 겪은 상황을 ‘먹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쓰게 된다. 그가 페이스북에 적은 일기는 널리널리 펴져, 한 교수로부터 출판제의를 받고, 결국 그는 ‘지방청년남성’의 삶에 관한 칼럼을 쓰는 글쟁이가 된다. 쇳밥과 먹물 사이에서 말이다.



힐빌리의 노래/J.D밴스/2017/흐름출판
힐빌리의 노래 책표지


나를 키워준 외조 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을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자그마한 우리 고향 동네에서 작년에만 수십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22p)

해당 책 19p에 따르면, ‘힐빌리’는 미국의 쇠락한 철강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 일컫는 말로, 이를 지칭하는 여타 혐오표현도 존재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는 종종 ‘부유한 백인’-’차별받는 흑인’으로 나뉘어 그려지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더 세부적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힐빌리의 주요 거주 지역인 러스트 벨트는 50년대 미국의 호황을 함께했지만, 철강회사 암코가 사라지면서 동네 전체의 경제수준이 하락한다. 밴스의 외조부모는 호황기를 맞았지만, 1984년생 저자 J.D. 밴스는 하락시기에 태어나고 자란다. 번화가였던 곳도 마약 밀매상들이 드나드는 빈 건물로 바뀌고, 버려진 창고와 공장, 노후한 공원 밖에 남지 않는다. 원래는 암코에 재직하던 친인척의 후원으로 운영됬던 지역 내 교육환경도 암코의 후원이 끊기고 나빠졌다. 

저자 J.D. 밴스의 ‘힐빌리’ 대가족은 모두 괴팍하고 불같은 성격이나 의리빼면 시체인 사람들이다. 다들 살면서 한번쯤은 살인시도, 살인, 자녀학대, 약물남용을 한다. 심지어 할모(저자가 외할머니를 부르는 애칭으로, 책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다.)는 항상 총을 들고 다닐 정도로 괴팍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가족을 욕하거나 창피를 준 사람에게는 총을 겨눠 협박하더라도 사과를 받아내는 의리있는 모습을 모인다. J.D.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악인’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자긍심을 가진다. 이는 범죄를 옹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을 자신과 함게 더불어 살아가야할 존재들로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힐빌리를 성격이 아닌 사회경제적 지표로 설명한다면, 빈곤, 마약, 낮은 건강 척도, 낮은 대학진학률, 높은 복지 수급자 비율, 낮은 고용률로 설명할 수 있다. J.D.주변에는 대학과 고등학교를 수료하지 못한 대부분의 친척과 조부모, 약물 중독자인 엄마,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창생들, 대학진학을 기대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흔했다.




간호사 면허 갱신을 위한 소변 검사 때문에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치고는 너무나 당당했다. 엄마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다시 마약을 복용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놓고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했다.(219p)

힐빌리의 성격과 사회경제적 지표만보면 ‘불행’의 단상의 총집합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자를 더 괴롭게 한 것은 정신적 빈곤이었다. J.D.는 어려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집과 실제로 사는 집이 달랐다. 할모와 할보가 사는 집에서 안정감을 느꼈지만, 엄마는 할모와 할보의 간섭이 싫어 딸 린지와 아들 J.D.밴스를 데리고 멀리 이사를 왔다. 셋은 고정적으로 살고, 누나와 J.D.는 수시로 바뀌는 아버지와 그의 자식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했다. 

엄마는 이른 나이에 임신하여 꿈을 포기하고, 간호사로 일했지만 계속된 약물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항상 자신과 누나를 향해 폭력적인 언어를 구사했고, ‘아빠’가 바뀔때마다 집안의 접시란 접시는 다 깨부술정도로 싸운다. (계속 바뀌는 아버지때문에 성도 바뀌었기에 친척들마저 풀네임으로 부르지 않고 ‘J.D’라고 철자만 말할 정도다.) 심지어 동성애자인 이웃은 언제나 엄마에게 친절하게 대했지만, 분노조절이 힘든 엄마는 그녀에게 “날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친구처럼 군거잖아!”라고 고함칠 정도로 제 스스로 앞가림하지 못했다. 그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J.D.는 아무런 이유없이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다. 성적은 당연히 좋을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엄마를 아주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애증의 관계로 묶여 살아가야 했다. 심리상담을 받던 J.D는 자신의 사정을 완전히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마약을 하고 분노조절장애라 우리에게 폭언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 순간 엄마는 일자리를 잃고 아동학대로 소송을 받고 자신은 위탁가정으로 넘겨지기 때문이다. 

J.D.밴스는 중학교때까지 주거지를 계속 옮겨가며 살아야 했다. 엄마와 살때는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주말에는 할모,할보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J.D.는 계속 엄마와 지낼 수 없다고 판단해 친부 밑에서 잠깐 살아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자신을 양육비 때문에 포기했다는 그 사실과 어색한 관계를 극복할 수 없어 다시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럼에도 엄마는 마약을 끊지 않고 아들에게마저 소변검사를 요구했고, J.D.는 엄마가 밑바닥까지 갔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고등학교때부터는 할모집으로 옮기고 한 집에서 싸움이나 불안정함 없이, 그리고 외부인 없이 안정적으로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어릴적 그랬던 것 처럼, 내가 내린 결정이 앞으로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힉습된 무기력’이라고 일컫는다.(...)집에서 내가 학습된 무기력을 배웠다면, 해병대에서는 학습된 의지를 습득하고 있었다. (271p)

J.D. 밴스의 인생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할모다. 언행이 거칠고 성격이 괴팍하지만 손주를 끔찍이 아꼈다. 어릴적 학교에서 싸우고 돌아온 J.D.에게 싸울때는 싸워야 한다며 싸움의 기술을 알려주고, 고등학생때는 항상 공부 열심히 하라며 비싼 공학용 계산기를 사주는 등 ‘아메리칸 드림’을 꼭 이룰 것을 강조했다. J.D.는 자기자신에게조차 기대가 없었지만 자신을 믿어준 어른이 있었다. 할모가 정말로 J.D.의 ‘천재성’을 믿었다기보다는 노력과 교육의 중요성을 믿은 것에 가깝다. 철강회사 정비공이었던 할보가 했던 육체노동도 신성한 일이지만, 그건 본인들의 세대의 일일뿐, 자신의 손주는 그와는 다른 일을 해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상위 계층을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타기 위해서는 대학이 필수 조건이었다.

할모의 집에서 안전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고, 바로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가려했으나 바로 입학하기에는 금전적으로, 생활적으로 혼자 살 준비가 안됐다고 여겨 해병대 입대를 결정한다. 해병대에서의 굳은 훈련 경험은 노쇠한 할모를 돌볼 수 있는 돈, 누군가에게 멋진 한 끼를 대접할 수 있을만한 돈,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예컨대 계좌 개설 방법, 건강한 음식을 먹는 법, 옷과 외모를 단정히 정리하는 법 , 해군연방신용조합에서 이자율 낮은 대출받는 법, 수표장 쓰는법,금전적 지원 서류 쓰는 법, 무언가를 목표로 잡고 계획을 짜고 실행하는 법, 등등. 그리고 어릴적 할모로부터 지겹게 들은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291p)”라는 충고가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정부의 학비 보조금, 저금리 학자금 대출, 저소득층 장학금과 같은 제도들이 결코 완벽하지 않으나 내가 최악의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 운명에 굴복할 뻔했던 건 절대 정부의 잘못이 아니었다. (...) 성공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먼저 우리 선생님들 처럼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충분히 인지해야 할것이다.(390p)

생계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 로스쿨 대학원 입학하며 힐빌리의 이방인이자, 아이비리그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유명 로스쿨은 주립대학교가 아닌 유명 사립 대학교 출신만 받는다는 얘기가 흉흉했지만 어쩃거나 J.D.는 운과 노력이 잘 따라줬다. 아이비리그에서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중상류층에 속했고, 이는 단순히 돈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과 자신 사이에 큰 격차가 있음을 매순간 느낀다. 예컨대 J.D.의 어릴적 최애 식당이그들에게는 그저 공중위생을 위협하는 식당이었다는 것, 혹은 처음간 파티에서 sparkling water가 탄산수가 아닌 글자 그대로 ‘반짝이는 물’인줄 알았다는 것. 자신의 고향 힐빌리에서는 부자들을 비꼬지만 실제로 낮은 이혼률과 높은 대학진학률, 안정적인 집에서 자라 높은 회복탄력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로스쿨에서 배운 각종 사회과학용어는 자신의 유년기에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J.D.는 벼랑 끝에서 서 있는 자신을 결국에 떨어뜨리는 건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도 중요함을 강조한다. 백인 노동 계층은 자신들의 ‘빈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상류층을 비꼬며, 미국에서 가장 염세적인 집단이라고 한다. 쉬운 일자리가 주어져도 연락도 없이 결근하기 쉽상이며, 푸드 스탬프(기초 생활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식음료 구매 바우처)조차 사재기로 되팔아 현금을 버는 등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복지여왕’의 실상을 드러낸다. 

책의 마무리에서는 J.D.밴스는 결국 정책연구원이되고 사랑하는 아내 우샤를 만나는 미래를 맞이한다. 하지만 엄마는 끝끝내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엄마에대한 실망과 희망의 반복이 결국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엄마를 어떻게든 돌보고,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의 현재 모습만 보면 명문 로스쿨 출신의 백인, 남성, 이성애자, 개신교도, 실리콘 밸리의 사업가로만 비춰지기 때문에 그의 과거를 으레짐작하기 쉽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쩌면 이런 삶을 살아왔을거라는 단편적인 판단. 하지만 실상 그 내면은 꽤나 복잡하다. 이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들으며 느끼며 자랐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확장과 비평

‘두텁게 설명된 가난’이라 읽어볼 만해요

두 책은 자기역사쓰기 형식의 글이다. 자기역사쓰기 형식의 글이 갖는 힘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있어 그 맥락을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할 수 있다. 물론 어렸을 적 이야기까지 담고 있기에 어느 부분은 실제로 뱉은 말과 다를 수도 있고, 사건의 순서가 안맞을 수도 있다. 흐릿한 기억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개인이 느낀 감정이 합쳐진 ‘진실’이라는 점에서 이 책들이 주는 울림은 배가 된다.

이는 빈자의 생애에 관한 서평을 쓰고자 시작했을때 내가 망설인 이유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필자가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혹여 내 잣대대로 그들의 삶을 재단해서 보여줄까봐. 그들이 힘겹게 소화해서 토해낸 삶을 내 시선대로 박제할까봐. 즉, 그 빈곤의 삶을 타자화시킬까봐.

타자화된 빈곤은 우리 삶 주변에서도 흔히 보인다. 유니세프 광고에서 보이는 기아 아동들의 삶. 그 아이들은 항상 선진국 자원봉사자 품에 안겨있다. 그들은 시혜의 대상이며, 의존적인 대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그 어떤 삶의 기쁨조차 모를 것처럼 우중충하게 재현된다. 또 다른 논란으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전세계 상을 휩쓸고 극찬을 받았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가난 전시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극중에서 기우네 가족은 미꾸라지 같은 ‘영악함’을 통해 사장의 집으로 들어가고, 이후에도 빈자(기우네 가족)-빈자(원래 지하에 있던 아저씨와 가정부)의 대결구도를 통해 전개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결국엔 균열도 가지 않은 계층구조만 견고하게 남았다. 여기서 빈곤 전시에 관한 논란은 가난한 사람들의 악한 도덕성만을 강조했다는 점, 그리고 ‘냄새’와 같은 빈곤혐오를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걸 굳이 똑같이 재현하는게 영화로서 무슨 의미가 있냐는 점이다. 혹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트라우마를 느낀 사람은 이 영화를 즐기는 전세계인들은 영화관에서 편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괴리감을 느낀다는 글도 있었다. 이후에도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여 영화 주요 촬영지였던 서울 마포구의 아현동를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등 ‘가난 전시’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물론 극 중 내용이 영화 감독의 의도였다고 할지라도,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입장에서 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자화된 빈곤을 볼 수 있는 곳은 노동인권교육에서 유명한 만화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왼쪽 엄마를 보며 좋은 교육이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오른쪽 엄마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채효정은 ‘좋은 부모’도 ‘반노동적’ 관점을 대변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오른쪽 엄마는 환경미화원을 노골적으로 낮춰보지만, 왼쪽 엄마 또한 그를 ‘우리가 성공해서 도와야할 존재’, 즉 시혜와 복지의 대상으로 그린다. 이에 관해 “‘중산층 진보’가 만들어낸 체제 순응 진보주의자”를 대변하는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부자가 되어 빈자를 돕는다’라는 논리가 아닌 빈자들 스스로 하여금 “긍지와 자부심을 주는 교육, 지배당하지 않을 기술과 저항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앞서 설명했던 유니세프 광고, 영화 <기생충>, 노동교육만화 ‘좋은 부모, 나쁜 부모’ 의 의도는 좋았을지라도, 누군가를 ‘전시’하는 것과 두텁게 이해하고 설명해내는 것은 분명 다르다.

두텁게 설명된 ‘가난’은 독자들로 하여금 빈자들이 항상 무기력하고, 의존적이고, 우울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물론 그럴때도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살고, 자신 주변인들을 긍정하고 살며, 자기 노동을 당당히 여기며 살아간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대응 매뉴얼도 없는 의료기기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다가 퇴사할 때 즈음, 중3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매뉴얼을 만들며 느낀 천현우의 효능감도 모른채 지나가게 된다. 괴팍하긴해도 자기 가족을 건드리면 총을 들고 쫓아가서라도 사과를 받아내는 의리 가득한 힐빌리 가족들에게 느끼는 J.D.밴스의 자긍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삶이 팍팍해도 한 줄기의 로맨스를 경험한 그들의 설렘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개천에서 용난 사람들의 자기계발서’로만 읽으면 안돼요.

우려되는 지점은 독자들이 두 책을 ‘개천에서 용난 자기계발서’ 혹은 개인적인 극복-성공 서사 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좋은 교육 환경이 아님에도, 그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사회에서 화이트 컬러로 분류되는 직종(변호사/뉴미디어 기자)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들의 인생 중심에는 그들을 ‘성공’하도록 하게 해준 조력자(할모와 포터아저씨)가 존재했다. 할모 당신도 중등교육 졸업장이 없지만, 교육의 힘을 강조하며 J.D.밴스를 끝까지 도와준다. 포터아저씨도 고등교육 졸업생은 아니지만, 저자가 겪은 ‘불평등한 세상’을 정치적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안목을 길러주고 그를 응원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는 존재, ‘잘될 것 같다’며 끝까지 응원해주는 존재를 만나기는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과의 만남은 흔치 않은 우연에 불과하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이런 조력자를 누구나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존재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을뿐더러,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 

이 책으로만 사회구조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수는 없다. 심지어 사회구조적인 얘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기에 그 숨은 의미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구조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생활세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먼저다. TV에 기아후원광고로 박제된 영상으로만 가난을 이해해선 안된다. 타자화된 빈곤은, 몰이해를 낳고, 혐오를 낳고, 구조를 못본채 ‘노력하지 않은 개인’만 남기게 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가난, 빈곤, 불경기, 고물가라는 단어가 넘쳐나고 있는 요즘 너나없이 빈곤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은 다른 빈자들의 생활을 논외로 만들어 버리기 쉽상이다. 각자도생의 삶은 다른 삶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의 삶을 두텁게 이해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들의 생애를 읽으며 내가 당연히 생각해 왔던 생활 환경, 도덕, 가치관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대학교라는 미래가 당연히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 어디선가 내가 마주칠 사람들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을 읽고 빈자들의 삶을 이해했냐고라고 물어본다면, 완벽히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할 것이다. 애초에 두권의 책은 필자와는 아주 다른 생활세계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텍스트로만 접한 폭력의 현장, 쉽게 맡을 수 있는 마약 냄새, 속쓰리게 겪은 배고픔, 그들이 공장에서 맡은 흄(Hume)의 냄새, 들이마시던 먼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생활세계를 알고 싶었다. 텍스트로나마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거쳐온 삶의 궤적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 두권의 책과 필자가 만난 지점을 글로 풀어 써냈다. 가난을 글로 다시 써내는 과정에서 내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돌아보고 타인의 삶을 두텁게 만나보는 경험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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