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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Feb 09. 2024

<137호>기고-언더스탠딩, 언프리토킹

편집위원 빈칸

노란 테두리, 가운데 흰색. 오른쪽 위에는 미국 국기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에는 '언더스탠딩, 언프리토킹'이라 적혀있다.

안녕하세요, 편집위원 빈칸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지금 여기는 미국입니다. 정확히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예요. 여름에는 한국과 14시간 시차가 나고, 일광 시간 절약제(Daylight saving time,  해가 떠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표준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는 제도. 낮이 길어지는 봄에 1시간 앞당겼다가 낮이 짧아지는 가을에 되돌린다. 유럽에서는 서머타임이라고 불린다.)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오면 한국과 15시간 차이가 나는 곳이죠. 저는 지난 8월, 인천공항에서부터 13시간을 날아와 한국에서 1만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이곳에 도착했어요. 그래도 한국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지금 이곳의 한인 복지관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거든요.

미국에까지 왔으면서 한인 복지관에서 인턴십을 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더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오늘 이 글에서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왕창 해볼 예정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밝히자면, 저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가서 영어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 4박 5일로 태국 여행을 가서 메뉴를 주문하거나(I want this. Thank you!) 툭툭 기사와 가격 흥정을 했던 것(No! Two hundred is too expensive! One hundred. One fifty? Okay.) 정도를 빼면 말이에요. 그 외에는 조기유학도 어학연수도 교환학생도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도(어쩌면 그래서) 한 번도 제 영어가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올 8월, 미국에 나가게 되기 전까지는요.


영어는 원어민처럼 해야지!

미국에서 영어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한국에서 해왔던 영어가 어땠는지부터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영어를 15년이나 했는데도 미국에 가고 나서 영어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던 건 한국에서의 영어가 아주 독특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한국에서 영어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첫째로는 원어민 같은 발음이, 둘째로는 틀리지 않는 문법이 필요했다.

발음부터 얘기해 볼까. 나는 해외에 나간 적은 없지만, 영어학원을 일찍부터 다녔다. 한국 나이로 7살 때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부모님이 제일 흡족해하셨던 건 이거였다. ‘원어민 같은’ 발음! 아빠는 지금까지도 종종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 그때 제니퍼 선생님이 네 발음을 딱 다 완성해 놨었는데. 넌 진짜로 그 선생님께 감사해야 돼.”

스피킹이 자취를 완전히 감춘 수능 영어 수업에서도 원어민 같은 발음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존재했고, 동경의 뒷면에는 한국식 악센트가 가미된 영어를 깔보는 시선이 있었다. 영어 선생님이 한국식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예컨대 f 발음을 ‘원어민 같은’ f 발음이 아니라 미묘한 ㅍ과 ㅎ의 사이로 하신다든지, 혹은 r 발음이 ‘원어민 같은’ r 발음이 아니라 으어얼, 이라든지–를 구사한다면, 그 선생님은 꼭 아이들 사이에서 성대모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선생님이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상관없었다. ‘잘 되지도 않는데 발음을 굴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거였다.

유튜브 쇼츠를 하릴없이 내리다 보면 간간이 영어 잘하는 법과 관련된 영상이 뜨는데, 그런 콘텐츠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는 영어로 “Can I get one iced Americano?”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발음은 이렇게 하시면 되는데요, [캔 아이 겟 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정직하게 하지 마시고, [캐나~ 겟 원 아이스다뭬리카너?]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굴리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선 늘 원어민의 악센트, 그중에서도 미국에 사는 백인이 쓸 법한 악센트에 가까워지는 게 중요했다. 영국 영어나 호주 영어는 알아먹기 어려운 영어였고, 미국에 사는 흑인의 악센트는 들을 일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원어민의 영어도 가리는데, 한국식 악센트가 섞인 발음은 오죽할까.

한국식 영어의 한 축에 원어민 같은 발음이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완벽한 문법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험과 직결되는 문법. 수능 영어나 토익 같은 시험을 쳐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풍경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단수냐 복수냐. 관사는 a를 붙여야 하나 the를 붙여야 하나. 이 문장의 시제는 뭐냐. To 부정사를 써야 하나 동명사를 써야 하나. 관계대명사가 뭘 수식하고 있느냐. 이런 것들에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긋고, 슬래시(/)를 그어가며 절을 나누고, 뭐가 뭘 수식하는지 화살표로 나타내고. 시험에서 틀리지 않으려고 교과서의 본문을 달달 외우고, 똑같은 문장을 계속 반복해서 쓰는 친구들도 많았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서의 영어는 좋은 발음으로, 절대 틀리지 않는 문법을 구사하는 것이 중요도 1순위였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어가 디폴트고, 영어는 멋지게 잘 선보일 수 있으면 가산점이 주어지는 요소였으니까. 그러니까 영어는 ‘원어민처럼 할 수 있다면 자랑스러운 것’인 동시에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런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대학에 다닌 나에게, 원어민 같은 발음을 구사할 수 있고, 문법 시험에서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던 나에게 영어는 나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분명 그랬다.


언프리토킹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주문하기 전부터 “Hi, can I get one peanut butter sundae(안녕하세요, 땅콩버터 선데이 하나 주시겠어요)?”라는 문장을 무의식중에 세 번쯤 되뇌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자신 있게 이 문장을 내뱉었는데 직원의 대답은 “쓰ㅔ릘?”이었다. 당황해서 “Sorry? (네?)”라고 했더니 직원이 “Settled?”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해줬다. 두 번째로 들으니까 단어가 들리기는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Settled? 정착했냐고? 이 사람 지금 나한테 미국에 정착했냐고 물어본 건가? 지금 내가 아시안이라고 이런 걸 물어보나? 뭐지? settle이 아닌데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게 아니라 settle이라는 메뉴 옵션이 있나?’ 약 1.5초간의 짧고 굵은 정적 뒤에 내가 겨우 “Sorry, what does settled mean(죄송한데 settled가 무슨 뜻인가요)?”하고 묻자, 직원은 “Are you done(다 주문하신 건가요)?”하고 바꿔 말해주었다. 어휴, 드디어 알아먹었다는 그 안도감이란. “Yes, that’s all(네, 그게 다예요).”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사실 안도감이 지나가고 나서는 창피함이 몰려왔다. 다 주문했냐는 말도 못 알아들어서 버벅거리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런 비슷한 일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스스로가 조금씩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갔는데, 같이 간 사람보다 영어를 읽는 속도가 느려서 그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 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65% 정도만 알아듣고 나머지는 대충 짐작만 하고 있을 때. 그래서 어색하게 하하 웃고만 있을 때. 한국어로 떠오른 단어가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아서 대화 도중에 머리를 싸매게 될 때. 어떻게든 있는 영어 없는 영어 끌어다가 최대한 때워 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자꾸만 정적이 길어질 때. 그 와중에도 발음이 순간 이상하게 나오거나 문법이 틀리면 속으로 움찔거리게 됐다.

15년이 넘게 영어를 했는데도, 그리고 한국에서는 영어 잘한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는데도, 여기서 내 영어는 내 마음에 쏙 들게 나오질 않았다. 내 영어는 한국어만큼 속 시원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할 때의 나 자신과 영어를 할 때의 나 자신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국어로 말할 때 나는 ‘내 할 말은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영어로 말할 때 나는 혹시라도 말실수할까 봐, 말할 타이밍을 놓칠까 봐 항상 긴장했다. 나는 자꾸 더듬거렸고 할 말을 못 찾았다.

미국에 갔던 이유 중 하나는 영어로 프리토킹을 할 수 있길 바라서였는데, 영어를 하면 할수록 나는 영어라는 언어 속에서 한국어만큼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칭찬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초라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배고프고 졸리고 힘듭니다

첫 출근 날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분명한 것은, 생각보다 영어가 많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분명 한인 복지관이었지만, 이곳에서의 공용어는 영어였다. 슈퍼바이저 선생님은 영어가 모국어였다. 첫날이니 자기소개 이메일을 보내야 했는데 그것도 영어로 해야 했다. 받은 메일함에도, 보낸 메일함에도 전부 영어뿐이었다. 슈퍼바이저 선생님께서 살펴보라고 주신 자료는 미국 이민국 홈페이지의 링크였는데, 당연하게도 영어로 되어 있었다. 물론 한국 어르신들이 방문하시면 사무실에서 한국말이 들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 눈앞에는 영어로 된 받은 메일함과 영어로 된 스프레드시트와 영어로 된 복지 서비스 신청 화면이 있었다. 한국 분이 아니신 경우도 ⅓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100% 영어로 응대하거나 전화를 걸어야 하는 때도 많았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난 뒤에 느낀 것은 아주 강렬한 허기였다. 분명 점심을 열두 시에 먹었는데, 네 시쯤 되니 배가 너무 고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 밥 밥 밥 밥을 되뇌며 걸어왔더랬다.

어느 정도 인턴 생활에 적응되자 배고픔이 그렇게까지 강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피로했다. 한국어로 된 자료는 쓱 훑어보고 중요한 내용만 읽는 게 가능했는데, 영어로 된 자료가 오면 훑어보기가 안 됐다. 단어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으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 파악해야 했다. 이렇게 자료를 읽다 보면 없던 졸음도 찾아왔다. 영어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더 심했다. 부끄럽지만 영어로만 진행하는 줌 세션을 듣다가 존 적이 적지 않다(...).

영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출력의 과정은 더했다. 한국어로 말할 때는 내가 하는 말이 내 생각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영어로 말할 때는 말이 생각을 앞질러 가기는커녕 내 생각을 말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자꾸 뒤돌아 확인해야 했다. 글을 쓸 때는 한국어로 먼저 써본 다음 영어로 번역하는 게 영어로 바로 쓰는 것보다 빨랐다. 나에게 한국어는 힘들이지 않고도 금세 할 수 있는 당연한 언어였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았다. 영어는 꺼내 쓰려면 배고프고 졸리고 힘이 더 들어가는 언어였다.   

       

영어는 한국인의 마음을 몰라줘

꺼내 쓰려면 배고프고 졸리고 힘이 더 들어가는 게 영어여도, 이 언어를 계속 공부하면 내가 원하는 말을 100% 다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어로 말할 때도 한국말로 표현할 때와 비슷한 넓이와 깊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 착각이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영어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한들 애초에 번역되지 않는 한국말들이 있었다.

신기한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영어에는 신기하다는 말이 없었다. Wonderful! 이거 아닌데. Amazing! 이것도 과하고. It’s new to me! 아, 새롭기만 한 게 아니라 신기한 거라고요. I’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before! 살면서 이런 건 본 바가 없다니, 한국말로 이렇게 말하면 너 말 웃기게 한단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해서 입에 안 붙었다. 나는 그냥 “헐, 신기하다.”를 말하고 싶은 건데 그 정도 온도와 질감의 말이 영어에는 없었다.

영어로는 눈부시다는 말도 못 했다. 햇빛이 강해서 “어우, 눈부셔.” 해놓고 옆에 있는 사촌 동생에게 눈부시다는 말은 영어로 뭐라고 해? 물었더니 “I can’t open my eyes!”라고 하거나, “The sun is too shiny!” 정도가 최선이랬다. 하! 나는 “아우 눈부셔! 눈을 못 뜨겠네. 해 이거 쨍쨍한 것 좀 봐봐.” 하고 싶은 건데 영어는 한국인의 마음을 몰라줬다.

뜨끈한 국물을 먹으면 “으어, 시원하다!” 하고 싶은데 영어로 직역하면 “Wow, this is so cool!”이었다. 감칠맛이 난다고 하고 싶은데, 영어사전에 검색하면 “It is tasty.”라고 그랬다. 음식에 깨가 들어가서 고소한데 이걸 영어로 뭐라 하나 싶어서 검색해 보니 그 고소가 그 고소가 아니었다(소송의 나라답게 ‘sue’가 검색창 최상단에 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영어에 익숙해지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리 애써도, 영어로는 한국말로 표현되는 내 세계를 100% 보여줄 수가 없었다. 일상 대화는 어느 정도 하겠는데, 누군가가 무언가 학술적인 의견을 교환하고 싶거나 누군가를 웃기게 하는 일은 영어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영어는 나를 이따금 초라하게 했고, 자주 피로하게 했다.           

원어민이 아니라 ESL

내가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복지관에서는 영어를 가르칠 튜터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반년 정도 영어학원 선생님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튜터로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담당 코디네이터 선생님께서 튜터 등록 폼을 제출하면 튜터링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받은메일함에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제목은  “ESL Tutor Registration”. ESG는 알겠는데, ESL은 뭐지? 나는 구글에 ESL을 검색해보았다. 검색 결과 ESL은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의 약자였다.

한국에서는 영어 튜터링이라고만 이야기했었는데, 여기서 내가 가르쳐야 하는 영어는 ‘제2 언어로서의’ 영어였다. 한국에서의 영어가 ‘원어민같이’를 추구하던 것과는 반대였다. ESL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그래,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고 나는 원어민이 아니야.” “영어는 나에게 제2의 언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영어는 제2의 언어였다. 이 문장은 분명히 동어반복이지만, 그래서 너무 당연하지만,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ESL 튜터로 등록을 마친 뒤에는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었다. 실제 러너와 매치되기 전에, 12시간짜리 온라인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교육을 듣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혹시 이것보다 더 짧은 건 없냐고 담당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일리노이주에서 수강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교육이 이 12시간짜리 교육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즐길 수 없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는데, 다행히도 교육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의 영어 튜터링은 성인, 그중에서도 타국에서 온 이민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을 왔는데, 영어가 장벽이 되어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표였다.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을 때는 그 학원 브랜드의 교재를 따라서 수업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온라인 교육에서 제안된 수업의 내용은 조금 달랐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911에 긴급상황 보고하기. 은행에서 업무 보기. 직업소개서 읽기. 아이의 학교 수업 도와주기. 미국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알아야 911에 전화를 할 수 있었고, 내 돈을 관리할 수 있었고, 직장을 구할 수 있었고, 아이를 도울 수 있으니까. 많은 이민자에게 영어는 생활의 문제였고 더 나은 삶의 문제였다.       

   

Broken English?

계속해서 온라인 교육을 이수하던 중에, 하나의 댓글과 마주쳤다. 교육 영상에 누군가가 달아놓은 것이었다. 그 댓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Our goal is not perfection, but understandability. 우리의 목표는 완벽이 아니라 이해다. 그 댓글을 읽는 순간 꼬여있던 부분이 하나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한 발음을 구사하지 못해도 괜찮다거나, 문법을 틀려도 괜찮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그게 애당초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완벽한 발음? 필요없다. 완벽한 문법? 중요치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는 원어민 같은 발음이나 틀리지 않는 문법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100%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100%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미국에는 (주로 이민자가 구사하는) ‘완벽하지 않은 영어’, ‘자꾸 틀리는 어색한 영어’를 칭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Broken English. 직역하면 고장 난 영어, 부서진 영어라는 뜻이다. 이 단어 역시 영어의 목표가 완벽을 기하는 데 있다고 가정한다. 즉, 어떠한 기준을 100% 충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기준은 미국에 사는 백인 원어민의 영어와 비슷한가 아닌가다.

사실 한국에서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내 영어가 원어민의 영어와 가까워질 수 있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영어를 할 때는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맞히는 게 중요하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게 중요했으니 평가자의 채점 기준을 충족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지내며 영어를 하다 보니 이 단어가 아니꼬워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잘 전달하면 됐지, 이게 왜 고장이라는 거야? 원어민의 영어와 유사한가 아닌가는 실제 생활에서는 중요치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할 수 있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까, 70퍼센트 정도 되는 영어는 100에서 30만큼 깎인 영어가 아니라, 0에서 70만큼 쌓아 올린 영어였다. 그러니 누가 감히 100이 아닌 영어를 Broken English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건 고장 난 영어가 아니라 쌓아 올린 영어, Built-up English였다.        

  

헬로?

복지관에서 어르신들께 전화를 돌릴 때, 이름만 보고는 한국 분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 분께 전화를 드릴 때는 “안녕하세요~ 여기 ○○복지관인데요~”하고 전화를 시작하곤 하는데, 이렇게 이름이 헷갈릴 때는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전화를 걸어 보고, 그분이 “여보세요?”라고 하는지 “Hello?”라고 하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걸었는데, 한국식 악센트가 들어간 “헬로?”가 들렸다. 발음만 가지고 이분의 영어 fluency를 판단하는 게 무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도 “Hello, this is…”로 통화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여보세요?”가 들리면 한국어로 응대하는 식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헬로~ 여보세요~”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면 그때부턴 맘놓고 한국어로 전화 안내를 드리면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은, “헬로?”에 “Hello?”로 답을 했더니 전화를 뚝 끊어버리시는 분이 있었다. 오전에 전화했을 때 뚝 끊으셨어서, 오전에 일을 하시나 보다 생각하고 오후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안녕하세요~”로 인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화를 너무 살갑게 받으시는 거였다. “Hello?”라고 하면 전화를 바로 끊으시는데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아이구 안녕하세요~” 하고 홍홍 웃으시는 어르신분들을 그 뒤로도 종종 만나 뵐 수 있었다.

나중에 복지관 선생님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거 어르신들이 보이스피싱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예요. 영어로 뭐라고 하면 정확한 상황이 파악이 안 되니까.”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일본어나 중국어, 독일어나 프랑스어처럼 간단한 인삿말은 알지만 잘은 모르는 언어로 전화를 받는다면? もしもし? 喂? Allô? Hallo?로 시작하는 전화는 도무지 받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전화는 대면으로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달리 제스쳐나 표정으로 뜻을 추리할 수도 없고, 글처럼 나중에 뒀다가 누구한테 해석해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시니어

문득 이게 궁금해졌다. 아니, 지금이야 각종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곧바로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되고, 심지어는 각종 영어 공부 앱들이 즐비하지 않나. 그런데 복지관에서 만나 뵙는 많은 어르신은 미국에 오신 지 50년도 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이분들은 그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여기서 살아오신 거야?

이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소셜 서비스 팀 디렉터 분께서 CLESE(Coalition of Limited English Speaking Elderly: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시니어 연합(필자 의역))라는 단체의 연간 미팅에 참석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해주셨다. 이민자에게 영어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던 참에 ‘Limited English Speaking’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단체의 미팅에 참여할 수 있다니! 나는 바로 참여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다음날 점심 그 미팅에 참여하게 됐다.

미팅 장소에 도착하자 사무총장님께서 이 단체가 결성된 계기를 설명해주셨다. 이 단체는 이민자 노인들이 각종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CLESE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창립 계기와 관련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었다. 1989년 시카고시에서는 한 이민자 및 난민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질문은 이것. 왜 백인이 아닌 노인들의 복지 서비스 이용률은 이렇게 낮을까?

12개 민족의 노인들에게 10개 언어로 1,500건의 개인 인터뷰를 시행한 결과는 이랬다. 이민자 및 난민 노인들은 분명 서비스가 필요했다. 서비스를 받는 데 필요한 자격요건도 충족했다. 이들이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했던 것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이었다.

그러자 내가 지금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복지관이 어떤 곳인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복지관에서는 정말 많은 일들을 다룬다. 연장자를 위한 무료 교통카드 발급도 하고, 식료품 구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신청할 수 있고, 무료 의료보험 신청도 받는다. 매주 수요일마다는 가스비나 전기세 보조금을 지원받는 프로그램도 신청하고, 노인 아파트 신청서 작성하는 것도 도와드린다. 어르신들이 받은 편지도 해석해드린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미국은 동사무소가 없나?

그렇지만 여기서 지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어르신들에게 영어는 좀처럼 편안하지 않다. 간단한 대화는 가능할지언정, 이게 은행, 주거, 보험, 복지의 문제가 되면 어려워진다. 나에게 필요한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보이스피싱에 취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똑같은 업무를 보더라도 100%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을 듣는 것과 아닌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곳은 ‘한인’ 복지관이라 의미가 있는 거였다.           


Our goal is not perfection, but understandability

언제는 ESL 튜터링을 담당하시는 코디네이터분과 점심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미국에 오고 나니까 영어를 더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전에는 몰랐는데 여기 와보니까 영어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라고 말하니, 그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저도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 말을 걔네들이 이해 못 하면 그건 제 탓이 아니라 걔네 탓이죠. 걔네는 평생을 미국에서 영어를 해왔는데!”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바꿔서 생각해 보면, 한국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다 못 알아듣는 건 아니지 않나. 반대로 내가 하는 한국말을 외국인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라도 말을 천천히, 더 쉬운 단어로 하지 않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어느 한쪽의 책임이 될 수 없었다.

“Our goal is not perfection, but understandability”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not perfection’에 꽂혔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Our goal’과 ‘understandability’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듣는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의 몫이 있다. 그러니 나의 발음과 문법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였다. 반대로 내가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 천천히 이야기해 달라고, 더 쉬운 말로 바꿔서 이야기해 달라고, 내가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조금 기다려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애초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은 한국어에서든 영어에서든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내내 슬퍼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공용어는 한국어이고, 미국의 공용어는 영어이니 그 사이를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의 공용어를 새로이 정의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사람을 초라하고 움츠러들게 하는 언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해 나가려는 몸부림이 그 자리를 채웠으면 한다. 이게 너무 어려울 것 같다면,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 어떨까. Our goal is not perfection, but understandability. 우리의 목표는 완벽이 아니라 상호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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