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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l 03. 2024

<138호>그와 그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수습편집위원 우산

그.

     

 한 사람의 마음에 글의 세계가 꽃피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해 말해보자. 무의미한 지식을 마구 나열하던 사이로 마음 한 조각이 비집고 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그 순간 말이다.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순간, 여기 그 순간을 잡지도 못한 채 줄줄이 흘려보낸 어린 소년이 앉아 있다. 그는 분명 어수룩하고도 둔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눈앞이 흐릿하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 같이 기억의 편린을 들추어보자.


 그는 색이 다 바래 은색인지 회색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명찰을 왼쪽 가슴에 단 채 다 구겨진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학교에서 한순간도 욕을 참지 못하고 우습게 삐거덕거리는 반항아였다. 교실 밖의 돌마루가 익어버릴 정도로 더웠던 어느 여름날, 그는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중얼거리며 마구 씩씩댔다. “이따위 과제나 내는 교사는 분명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도 없다!”. 내뱉은 말이 그대로 돌아올 정도로 고요한 방이었다. 그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닫고, 불만을 토해낼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적어내는 게 본인에게 이로움을 깨달았다. 그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어 선풍기 줄을 당기고 펜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책상 위에 땀을 한 방울 두 방울 흘려가며 잉크의 흔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대던 펜촉은, 필통을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둑해진 후에야 마침표를 찍었다. 그 어린놈은 해가 졌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손끝의 감각에 몰입한 것이다. 이날을 ‘그의 세계가 태어난 날’ 정도로 이름 붙여주자. 그가 과연 자신의 첫 작품을 되새김질했을까? 아니, 그는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배가 찢어질 듯 고프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를 향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본래 뿌리내린 마음은 질기고 억세다. 물 한 번 주지 않아도 시들지 않는다. 제멋대로 뻗쳐나가 스스로 여기 존재함을 지독하게도 외친다. 그 울림은 끊임없이 몸을 두들기고 두들겨, 마침내 주인에게 닿는다. 그때 비로소 글의 세계가 피어난다.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을 가꾸고 키워나가며 한 명의 글쟁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연히 나만의 세계를 꽃피우는, 이렇게 아름다운 흐름이 또 있을까? 이런, 말이 샜다. 다시 그의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자.


 빈 교실에서 새 보금자리를 장만한 여린 마음은, 다음 날 해가 미처 뜨기도 전부터 애타게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여러분의 상상에 정확히 부합하게도, 그는 잉크 속에 피어난 뿌리가 안중에도 없었다. 원체 눈치가 없는 놈이었기에, 기묘했던 그날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 늦은 밤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 속에 화면 속 상대를 찍어 누르는 데에만 급급했다. 승리라는 두 글자가 데이터 쪼가리가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 찰나의 쾌감을 음미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동이 틀 때까지 눈이 시뻘게진 채 화면만 들여다봤다. 그러다 쓰러지듯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마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룸메이트의 고함에 허둥대며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처진 몸으로 기숙사를 나와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코를 고는 것, 그게 그의 한심스러운 일과의 전부였다.


 가을바람이 영 쌀쌀한 월요일 애국 조회 시간이었다. 갑자기 학생 한 명이 교단 위로 올라왔다. 얕은 생각만 덕지덕지 붙여놓은 쓸모없는 글들을 시시때때로 페이스북에 올리던 한 학생, 아니지, 그의 눈동자 속에서만 그렇게 보였던 까까머리 학생이었다. 학생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아직 면도도 채 하지 않았던 어린 학생은,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었다. 마이크를 잡곤 정돈된 목소리로 오백여 명 앞에 서서 우리에 대해 외치기 시작했다. 얼추 무너져 내린 학교의 가치와 어른들의 위선, 학생들의 비겁함 같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학생은 부조리에 분노하는 자신의 마음 자체를 모두에게 내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긴장해 파르르 떠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데, 학생의 목소리는 꿋꿋이 나아가 그 넓은 강당에 가득 퍼졌다. 풋내기 학생의 외침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마음에 깊숙이 박혔다.


 우리의 반항아는 어디에 있나.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껌뻑껌뻑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의자에 찌그러져 가만히 졸던 그는, 윙윙대는 스피커 소리가 이마에 닿는 순간에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누군가 그럴싸한 연설을 하는가보다 싶어 자세를 고쳐 앉고 이름 모를 외침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는 연설이 끝날 때쯤 어느새 학생의 울림에 홀려 옆 사람과 함께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애국 조회가 끝나고 아늑한 책상으로 돌아와, 그는 온종일 동급생의 외침을 되새김질했다. 신기했다. 페이스북에 선비질 하는 글이나 올리던 놈이 어찌 저렇게 멋있는 연설을 할 수 있는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빤히 바라보는 교사들의 얼굴에 침 뱉을 용기는 어디서 난 것인지, 자신의 위선에 대해 솔직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서 난 것인지. 한참을 감탄하다 기숙사에 돌아온 그는 곧바로 식당에 올라가 입안에 불고기를 쑤셔 넣었다. 기이하게도, 그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뒤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던 본인이 수치스러웠다. 그 마음을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허겁지겁 책상에 앉아 어질러진 물건들 사이로 빈 종이를 찾았다. 그것에 마구 잉크를 휘갈겼다. 그런 후에야 개운함을 느낀 그는, 새까맣게 잊고 있던 기묘한 날을 기억했다.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 조각을 발견한 건 덤이다. 이것을 어찌할지 난감해하다, 이왕 잘 키워보자고 다짐하며 물을 몇 방울 주었다. 그는 그렇게 그의 세상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들 (1)


 사실 나는 겁쟁이지,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들 웃음 속에 악의를 숨기고 살았다. 이를 확신하게 된 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누구보다 자기 아들을 사랑한다며 뒤로는 여학생들의 브라를 옷 위로 만져대던 미술 교사를 보았을 때? 친구 한 명을 절도죄로 매장하려다 결국 퇴학당한 동급생이 사람들 앞에서 웃음 지을 때? 몇백 명의 학생들이 익명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에게 비수를 꽂을 때? 모르겠다. 그냥 더 이상 사람들의 추함을 보고 싶지 않았다. 팔을 뻗기보단 움츠리는 걸 선택했다. 괜히 착하게 굴다 뒤에서 칼 꽂힐 수도 있고, 사건에 휘말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잊힐지도 몰랐으니까....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내 방으로. 가만히 돌인 척하고 있으면 무사히 졸업하지 않을까 하며 고등학교의 마지막 1년을 방 안에서 보냈다. 조용히 침잠하며....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는 나를 울타리에서 끄집어내어 밖으로 던져버렸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스쳐 지나가지 않고 이어진 관계들이 세 자릿수를 넘어갈 즈음이었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나는 타는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는 더 이상 만족할 수가 없다. 겉과 겉의 만남은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단순한 관계로는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더라도, 몇 시간씩 옳고 그름에 대해 핏대 높여 얘기하더라도, 심지어 서로의 슬픔과 기쁨에 공명하며 눈물을 흘려도, 우정과 사랑만으로는 상대의 벌거벗은 모습을 알 방도가 없다. 난 우리의 추함을 터놓고 싶다. 사람들이 꼭꼭 숨겨놓은 세상을 보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뱉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렇게 낯부끄러운 선언을 하고서야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잊을만하면 글을 뱉었다. 하얀 종이 위에 마음을 확 펼쳐놓고 맞는 단어들을 찾으면, 느꼈던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던 그대로 종이에 새겨졌다.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고. 그렇게 글이 하나둘 완성될 때면 몸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나에게 글은 숨겨놓은 세상 그 자체이자, 흘려보낸 마음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서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꾼다 한들 내 세계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몇 년간 쌓인 내 글들은 단 한 명의 독자도 얻지 못한 채 말라갔다. 간혹 친구에게 애원하듯 부탁해 읽어달라며 글을 건네면, ‘와~ 너 글 잘 쓰는구나~ ㅋㅋ 좀 치네’ 하는 대답만 돌아왔다. 읽고 읽히고 싶었다. 나는 나의 경험을 나의 목소리로 써 내려간, 세상에서 한 명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을 갈망했다. 그렇게 토해낸 마음이 가득 담긴 글을 읽고팠다. 속을 내보여 다른 이들의 마음과 섞이길 소망했다.


 해가 쨍쨍한 여름날, 내가 처음으로 종이 위에 마음을 뱉게 했던 연설가 친구가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께 책을 읽고 마음을 나누자고 했다. 독서 모임이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커뮤니티였다. 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시공간을 공유하는 집단, 모임을 통해 즐거움과 행복이 샘솟을 것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나 걸리는 점은, 나는 글쟁이를 원했다는 것. 서로의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책을 읽는 것은 전혀 달랐다. 전자는 상대의 마음 깊은 바닥까지도 엿볼 수 있었지만, 후자는 그저 유희로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기껏 들어간 커뮤니티가 자기과시와 친목질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과연 내가 원했던 관계를 찾을 수 있을지, 사람들이 선뜻 자신을 벌거벗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간 고민했다. 쉬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모임을 시작한다면 그 관계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긴 관계 내에서 깊은 교류를 원했다. 생각 정리를 마치고 DM을 보냈다.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처음으로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밖을 향했다.     


그렇게 그들을 처음 만났다. 고즈넉한 카페에서 우린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의 그들은 뭐랄까, 나와 썩 다른 존재들이었다. 난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마초를 추구하며 살았다. 다름은 틀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은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로웠다. 합리성을 맹목적으로 좇기보단 사람의 마음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서로를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의 나이브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이 무지갯빛이라 믿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보는듯했다. 그들 또한 나의 강박적이고 단정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억지로 사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만 찾아내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독서 모임은 물과 기름을 억지로 섞은 컵 같았다.


 읽음의 영역에서도 사람들은 본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더라도 글의 완성도나 작가의 매력에 대해 분석하려 했지만, 그들은 주인공들의 삶과 자신들의 추억을 엮어냈다. 시시때때로 부딪쳤다. 너는 왜 말을 그렇게 공격적으로 하냐, 너는 왜 이리 대가리가 꽃밭이냐, 이 작가는 지금 계속 똑같은 주제들만 가지고 자가복제만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그 짧은 순간을 섬세하게 그리는 아름다움을 모르냐, 날카로운 생각들이 오갈 때도 잦았다. 서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켰지만, 처음에 기대했던 독서 모임의 모습은 요원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네가 알지 못했던 즐거움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 다양한 가치와 행복에 대해 배울 때도 많았다. 나는 그들의 삶을 내 안에 녹여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많은 추억이 쌓였다. 사랑에 대해 몇 시간씩 그 아름다움과 슬픔을 노래하고, 써온 글을 돌려보며 주인을 맞추어 보고, 책에 담긴 여러 이야기와 삶을 이어 나갔다. 겨울 어느 날, 모임을 시작한 지 2년 반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함께 송년회를 열었던 하루를 떠올린다. 10여 명이 오순도순 모였다. 우릴 한 자리에 모아줬던, 그즈음에는 독일에 있어 미처 참여하지 못한 그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기도 하고, 갖고 온 양주를 나눠 마시며 도란거렸다. 기분 좋게 취했다. 취기에 몸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쯤, 다들 미리 챙겨왔던 책을 한 권씩 꺼내 편지와 함께 상대에게 선물했다. 솔직히 학창 시절에 마니토에게나 줄법한, 유치한 선물이었다. 근데 그 유치한 선물이 무척이나 고맙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정말 속상할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가 돼서야 그들에게 벌거벗은 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새하얀 밤이었다.


 나는 그들을 잘못 바라보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주었다. 세상은 이성과 능력만으로 바라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구석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타인의 삶에 대해 단정 짓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유쾌하고 따뜻했다. 그들은 나에게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었다.


 나는 소설이라곤 학을 뗐다. 머릿속에 등장인물들과 이야기들을 막 던져놓고, 어떻게 동아줄을 꼬아 놓으면 손님들이 사갈까 고민하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했다. 팔리기 위한 글을 써야만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펜을 잡는 사람들은 헐벗은 마음을 결코 담아낼 수 없다고 믿었다. 모임 톡에는 소설이 자주 공유됐지만, 나는 들어본 책이 한 권도 없었다. 호기심에 읽었다. 허구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읽고서야 또 한 번 생각이 짧았다는 걸 느꼈다. 세상에는 마음을 토해내고 싶어서 미칠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글을 하루라도 더 쓰기 위해 돈을 벌었고, 번 돈으로 다시 뱉어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써냈다. 그렇게 가슴을 후벼파는, 읽기 전의 나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문장들을 읽을 때면, 작가들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해 안달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꾸준히 찾아 읽는 작가들이 생겼다.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던, 몇 개의 문장들을 기록한다.

『구의 증명』 p.80. ‘사람 대접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p.54. ‘봄은 우울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편의점 인간』 p.98.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가 지는 곳으로』 p.196. ‘마음이 정처를 잃고 그를 위해 지나온 날들의 의미가 맥없이 끊어져 버리면 ‘왜’는 어느 때보다도 가열차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잊혀졌던 물음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소설은 이 질문의 근처를 아프게 배회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는 행복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공간은 무해했다. 일상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와중에, 이따금 가지는 모임은 숨통을 틔워줬다. 수많은 세상에 속한 우리가 같은 책 속에서 다른 경험을 녹여내며 함께 어우러지는 지난 몇 년은 보물 같았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졌다. 작가들이 토해낸 이야기들을 함께 음미하고 일상에 관해 얘기하는 시간은 분명 나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나는 더 많은 걸 원했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세상을 따와 나누기보단,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세상을 보고 싶었다. 선의와 존중으로 정제된 마음보다는, 날 것 그대로를 내어 보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들과 나는 너무 오래된 사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미 지나치게 친해졌다. 마음을 토해낼 시간에 차라리 즐겁고 행복한 것들을 공유하는 데 집중했다. 맛있는 비건 식당, 좋은 디저트 카페, 어렵지 않은 현대소설 따위의 것들... 상대를 애정하는 방법으로 존중과 배려를 택했다. 우리는 결코 선을 넘지 않고 젠틀하게 교류했다. 문득 알았다. 우리 모두 더 깊어지기보단 얕고 긴 관계를 선택했다는 것을.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만으론 욕망을 채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뒤섞여 웃고 울며 격렬하게 살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맘껏 내보이고 지껄이기보단 편하고 아늑한 방법을 택했다. 울타리를 좁히고 좁혀 비슷한 자들과만 소통하거나 방 안에 웅크려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마음을 토해내 글을 쓴다는 건 이미 지난한 일이 되었다. 나는 두려웠다. 텅 빈 광장에서 혼자만 마구 소리치는 자로 남기는 싫었다. 읽히길 바라는 글쟁이들과 글을 원하는 독자들을 찾아야 했다. 꽃이 지고 눈이 올 때까지, 조용히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렇게 두 번째 그들을 만났다.



그들 (2)      


 “글을 쓰는 행위와 자신만의 세계를 꽃피우고 가꾸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글쓰기는 단순히 글자를 모아 낡아빠진 관념 따위를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으레 느끼는 밑바닥의 구역감, 그 요동치는 감정을 긁어모아 마음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힘껏 토해내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행위이다. 인간은 마땅히 글을 써야 한다.”     


 난해하다. 다소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힘껏 토해내는 행위와 글쓰기가 실제로 같은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그 정도로 강렬한 감정과 경험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 느끼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은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이 글귀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될지도 모를, 어린 글쟁이들의 대화를 잠시 엿들어보자.     



<씀>     


루나    다음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거에 대해 나눠봅시다.


모모    먼저 말할게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계에 대해 먼저 얘기하면, 시간을 들여서 진정성 있게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다 알 수밖에 없어요. 한계가 있구나.... 그런데도 글밖에 수단이 없어요. 내가 그림을 그리지도, 영상을 찍지도 않으니 이거 말곤 표현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에게 글을 쓰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이다. 너무 하고 싶다기보단, 이거라도 해야 한다는 의미. 


코코    저에게 요즘 글이라는 건 설득인데요, 과거부터 가져온 경험이 나에겐 좋은데, 다른 사람들에겐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되게 속상해요. 그런 가치들을 같이 나누고 싶고 설득하고 싶고. 그중 하나가 자치인 것 같아요. 대학에 와서 느낀 게, 사람들이 되게 무기력해요. 재밌는 것도 안 하고 작당 모의도 안 하고, 다들 획일화된 느낌? 제게 자치라는 행위는 더욱더 다양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안서도 써보고, 관련해서 글도 열심히 써보고…. 어떻게 하면 이 가치에 동의하게 만들지, 고민하다 찾은 방법이 글인 거 같아요.


사과    내가 보이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이 제 글을 보면 제가 엄청나게 들켜버리는 느낌이 들어요. 주제에 상관없이 글을 읽기만 해도 저 사람이 내가 어떤지 속속들이 알 것 같고. 문장 하나하나를 전개하는 방식이라던가, 단어를 선택하는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쓴 이의 성격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듯하고. 대학에 와서는 남을 설득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떠올려야 하는데 이게 좀 어렵죠.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들킨다.’ 였지만, 지금은 다른 이들을 먼저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모모    아, 또 하나 말하자면 글을 쓰는 행위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글로 쓰고 나서, 이를 게시하는 것의 여부와는 별개로 내 생각은 같거든요? 근데 쓰고 나면 사람들 앞에 내 생각을 내보이는 것이기에 공격받지 않을까,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거죠.

라우 저는 읽는 사람의 여부가 그렇게 중요하진 않아서, 그 차원에서 벗어나서 말하자면 글은 내가 말보다 훨씬 고삐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매체인 거 같아요. 저는 가끔 퓨즈가 나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막 개인적인 일들까지 다 얘기할 때가 있는데, 집에 와서 엄청나게 후회하죠. 내가 말을 낳았는데 말이 계속 말을 낳고.... 나는 소외되고. 근데 글은 정제된 표현을 쓰고 퇴고할 수 있기에, 훨씬 나은 수단이라고 느껴요. 특히 글을 쓸 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상적으로 의미화를 시키면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루나    막상 제가 말을 안 했네요. 작년부터 느꼈는데, 글을 쓰는 건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 특이한데, 혼자 걸어 다닐 때도 내가 지금 어딘지 인지하지 못하고, 아예 다른 생각을 해요. 항상 미래나 과거를 생각하고, 당장 이 순간에 집중을 잘 못합니다. 근데 글은 동영상의 같은 구간을 계속 리플레이하면서 고칠 수 있는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쓰면 그게 내 현실이었구나 하고 확 다가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있다는 것, 나로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게 글을 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괴로움>     


루나    글 쓸 때 괴로웠던 적 있으세요?


코코    질문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루나    괴로움을 느끼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자기 성찰의 글을 주로 씁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나의 추함을 있는 그대로 응시해야 할 때 좀 괴로워요. 부정적인 면을 그대로 보기 위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이렇게까지 못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보통 문제의식을 느낀 후에 이에 대해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글을 썼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으려 하거든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 잘못된 걸 인지하면 글을 써야 한다는 충동을 종종 느끼는데, 이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해요. 보통 잘못된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는데, 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잘못을 만드는 사람들의 위치에 해당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기득권의 삶의 양식과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가치관이 계속 충돌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고 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그 모순성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모모    연세지를 예로 듭시다. 이번 호에서 내가 쓸 글의 주제를 확정하면 쓸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못하게 됩니다. 굳이 여러 후보 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애초에 후보가 하나 있어 이거에 관해 쓰든, 여러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던 세상에는 얘기해야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떠올리면,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주제가 너무 하찮게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건 중에서 고작 이걸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게.... 물론 이 주제를 글로 풀어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 그것도 필요한 일이지, 라고 다들 입 모아 얘기하겠죠. 그런데도 고작 이거.... 그 순간이 너무 쪽팔립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괴로움이 온다는 거죠.


사과    저는 제 글이 우글거리는 순간을 정말 견디기가 힘들어요. 최선을 다해 썼는데 다시 보니 글이 너무 형편없게 느껴질 때. 그래서 저는 글을 쓸 때 한 번에 쓰지 않고, 네다섯 번씩 다시 보고 고치고 계속 고쳐요. 사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연세지 활동을 하고 보니 특정 형식의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과거의 저는 타인을 관찰하면서 이와 관련된 것들로 글을 썼어요. 자료를 조사할 필요 없이 편하게 쓰는 느낌이죠. 근데 연세지에는 오랫동안 공부하고, 자료를 열심히 찾아봐야 완성도가 높아지는 형식의 글들이 많아요. 이런 글들을 마주쳤을 때, 재능보다는 엄청난 노력과 성실이 쌓여야지만 잘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저는 그렇게 노력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처럼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썼다면 괜찮았을 텐데, 저는 그렇게 해도 의지가 안 생긴다는 점에서 회의감이 들었어요.


희수    쓰고 싶은 것에 대해 표현을 하지 못할 때 괴로워요. 분명 나에게는 생각이 있고 글을 써야 할 당위성이 존재하는데, 차마 손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스스로가 이것밖에 안 된다고 느낄 때, 내 마음이 느끼는 것들을 온전히 글로 담아내지 못할 때 괴로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글을 쓰는 사람치고 글의 논리성이 부족한 편이에요. 비문도 많고, 생략도 많아서 읽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비판할 때가 많아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음에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것을 보면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의문도 들고요.


라우    1년 정도 됐어요. 문학 이론이든 사회과학 이론이든 온갖 이론은 다 혐오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글을 쓰는 행위도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순간들을 가둬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화의 일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때 글을 엄청 염세적으로 썼었는데, 이런 생각이 글 쓰는 고통과 연결됩니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애쓸 때마다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빌려와 이야기에 적용해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온전한 작업일지 의문도 들었고요. 내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불편함이 물음표로 마무리될 수 있는 질문으로 언어화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라우    여기서 중요한 건,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이 온전한 진리를 생산해 낸다는 믿음 속에 글을 읽고 써내지 않을 것은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에겐 특히나 버겁습니다. 내 안에서 조각 나서 떠돌아다니는 단어들을 하나의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는 것이 정말로 어렵고 두려워요. 어떤 글을 써낸다는 것은, 논제가 적어도 나한테는 진실로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해야 해요. 하지만 나는 아직 스스로 무엇을 믿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아니면 무엇을 사랑하는지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계속 생각하는 것 같네요.


라우    내가 이렇게 사랑한다고 느끼는,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어떤 언어라는 철장 속에 갇혀 이렇게 떠오르는 걸 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인가, 그냥 그 자리에 이렇게 머물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 글 쓰는 게 아주 힘들게 다가와요. 글로서 말로서 아무것도 재현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래서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데도 내가 옮기려고 노력할 때마다 너무너무 힘이 들어요. 그래서 그냥 안 해야겠다 할 때도 있고, 하다가 말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고, 그런 딜레마가 있어요.


코코    이론화에 대해 라우 님께서 했던 얘기의 맥락과 비슷한데요, 저는 주로 남을 관찰하고 사회 문제 현상에 대해서 내가 보는 관점으로 재현해 내는 방식의 글을 많이 썼어요.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이 사람들을 내가 잘 재현해내고 있는 게 맞나? 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교 청소 노동자랑 경비노동자분들을 만나러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이제 노동하는 몸 자체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분들은 항상 인터뷰에 열려 있는 느낌이었어요. 아들딸, 손자·손녀 대하는 느낌. 근데 내가 원하는 깊이의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


코코    계속 반복되다 보니 저는 제 나름대로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관련 교수님한테 찾아가서 이런 생각들을 풀어내니 저를 엄청나게 혼내셨어요. ‘네가 이 사람들을 고통받는 사람들로 만드는 거 아니냐, 이 사람들은 퇴근하고 신나는 불금을 즐길지도 모른다, 근데 너는 한 관점에만 매몰되어 그런 질문만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라는 게 교수님의 요지였어요. 다시 괴로움으로 돌아오면, 타인을 글에 담을 때 남을 온전히 바라보기가 너무 어렵다는 지점이 괴로운 것 같아요. 누군가의 삶을 너무나도 조명하고 싶지만, 동시에 내가 원하는 식으로 재가공할까 봐 걱정되는.... 그런 느낌이죠.



<그리고...>     


루나    물론 글을 씀에 있어서 끝을 가정하진 않지만, 그래도 다들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여러분의 글이 닿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듣고 싶어요.

모모    저는 연세지에 들어간 이유와 연동해서 30초 이내에 짧게 말해볼게요. 저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어요. 연세대학교에 채식 급식 만들기. 그래서 방법을 찾아봤는데, 중앙운영위원회에 백인 안건 상정 제도를 알게 됐어요. 그러다 내가 아는 사람이 100명이 안 된다는 걸 알았죠. 안건 상정이 차후의 일이라고 느끼기도 했고요. 그래서 최소한 이와 관련된 학내의 여론을 만들어보자, 글을 써보자, 그리고 조금이라도 읽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때 얘기하자 만약 총학생회에서 부결되면 그땐 식당 앞에서 눕자 이런 목표를 가지고 1단계로써 연세지에 들어왔어요. 이 목적에 따랐을 땐 글을 더 이상 안 쓰는 게 목표죠.


라우    30초 지났는데요?


모모    10초만 더 주세요! 근데 지금은 좀 많이 지금 엇나가고 있네요. 비슷한 맥락에서 결국 제 목표는 글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그럴 수는 없겠죠. 앞으로도 항상 쓸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은 글은, 제가 마주하는 문제들을 계속 선명하게 잘 드러내는 글이겠죠. 


라우    저는 글쓰기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서 연세지에 들어왔어요. 글을 쓰고 감상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데, 스스로에게 너무 매몰되고 싶지 않았어요. 최근 들어서 러-우 전쟁이 발발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이런 것들을 보며 펜이 정말 칼보다 강한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됐어요. 누구보다도 텍스트의 중요성을 주창하는데, 역설적으로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공동체에 들어와 글을 쓰고, 글쓰기를 사랑하든 싫어하든 그런 강렬한 감정을 겪은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싶었어요. 제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글은 구체적으로는 없어요. 근데 우리가 왜 계속 읽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글이면 좋겠어요. 구체적으론 글을 쓰는 과정이 그런 방향성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고, 남들도 그거에 설득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희수    저는 저 스스로 도덕적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어요. 예를 들면,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처럼 도덕적으로는 옳지만,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들 말이죠. 이번에 서초동 옥상 살인사건도 그렇습니다. 저는 폭력에 대해서, 특히 사람 사이의 폭력은 그 어떠한 것도 인정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 너무나도 반대되는 사건이 발생했잖아요. 왜 폭력이 계속 끊이지 않는지,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폭력의 예방과 대응에서 해외와 우리나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등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예시를 들자면.... 저는 도덕적 기준이 조금 심할 정도로 높은데, 나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나쁜 생각을 1도 하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 혹자는 ‘나쁜 생각, 예를 들면 도둑질이나 살인이나 탈영이나 등등…. 을 상상하는 것은 괜찮다. 실행으로 옮기지만 않으면 된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생각을 하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어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싶어요. 이런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거의 철학자 중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어쩌면 사회적인 글이 될 수도 있겠어요.


코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한 문화 속에서 당사자가 쓴 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본인만 아는 맥락이 있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구성이 있고, 쓰고 싶은 표현이 있고, 자기가 겪은 경험이 있고.... 사실 그 사람이 아니면 풀어내지 못할 경험과 느낌들이 있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저는 당사자가 쓴 글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글쓰기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느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의 글을 자신이 썼으면 좋겠어요. 전 사람들의 글과 그 사람의 삶과 생각이 담긴 글을 읽고 싶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계속 글 쓰는 걸 추천하고 글 쓰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내 글도 보여주고.


코코    이런 것도 있어요. 내가 내 경험에 대해 글을 쓰면, 뭔가 흐리멍덩하게 있던 생각과 감정들이 글로 깔끔하게 정리되면서 머리가 맑아졌어요. 그런 경험을 남들도 해봤으면 좋겠고, 그 사람의 인생도 궁금하고 그런 거죠. 그 사람의 인생을 알기 위해 내가 계속 시간을 같이 보내는 수단도 있겠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그렇고 여러모로 너무 한정적이니까. 그래요.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읽고 싶다.


사과    아까 설득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냥 제가 이해를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가 글을 쓰는 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정말 위험하다고 문제의식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런 것이 위험하니까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해야겠지.’가 설득이잖아요? 근데 제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여기에 위험을 느끼는데 너도 같이 위험하다고 느껴줘, 내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해 줘’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느끼는 문제의식이 이해받지 못하면 앞으로 무언가를 할 때도 계속 이 길로 가도 될지 고민이 계속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글을 쓰면서도, 어떤 글을 쓰고 싶다기보다는 제가 이해받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루나    마지막이네요. 저는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들이 여럿 있는데, 글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글을 쓸 때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느껴요. 근데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고통을 느끼는 거잖아요.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 그렇기에 글쓰기는 매우 인간다운 행위라고 생각해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저는 누군가 사람다움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런 글을 쓰기에 우리는 인간이다’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과학이 앞으로 끝없이 발전한다면 과거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부분의 능력이나 가치가 무너지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느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상기된 얼굴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열정과 괴로움이 담겼던 대화를 통해 앞의 난해했던 구절이 처음보다 가볍게 다가오길 바라며....



당신.


 아직 수염도 채 나지 않았을 즈음, 사회 선생님께서는 종업식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앞으로의 인생에 많은 행복이 기다릴 테니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자. 목소리는 참 포근하고 따뜻해서, 나는 그 문장을 마음 한편에 담아두었다. 성인이 됐다. 세상은 이상하고 차가웠다. 사람들은 스물이 되었을 때보다 스물둘일 때 더 지쳐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내일이 다가오는 것조차 두렵다고 말했다. 해가 지날수록 사람들은 시들어가는 볏 잎처럼 기운을 잃었다. 그렇게 하나의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일상이 행복보단 한숨으로 채워지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딘가로 깊이 가라앉는 듯했다.


 불현듯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더 이상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는, 오늘 힘들더라도 내일 웃을 힘을 얻을 방법을 찾고 싶었다. 방 안에 숨어있던 많은 이들이 밖으로 나와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고 위로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내 소망을 글 속에 담아 오랫동안 노래하면 언젠가 여러 마음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수십만 자의 글자들을 넘어, 당신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작가로의 나를 마주한 첫 독자가 되었다.


 우린 모두 강렬한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내 속마음을 모두 털어낼 수 있는, 진정한 소통에 대한 갈망 말이다. 나는 10년째 그 욕망을 좇고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글을 썼고, 앞으로도 글을 계속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절실히 느낀다. 연약하고 괴로운 마음은 그렇게밖에 생명을 얻지 못했기에....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마음을 토해내지 않더라도, 그저 흘러가듯 살아가더라도 괜찮은가? 더 이상 잠들어있는 욕망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자. 고민할 바에 쇼츠를 보고, 깊은 얘기들을 나눌 바에 입을 다물던 과거를 벗어나자. 이제는 당신이 느꼈을, 느낄, 느끼게 될 갈망을 직시하자. 글을 쓰자. 당신만이 경험한, 당신만의 언어로 쓰인 당신만의 이야기를 남기자. 그렇게 마주함의 고통에 익숙해질 때면, 이미 그 괴로운 길을 걸었던 많은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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