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호> 편집위원 야자수
학생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예비) '정치'인들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학내 정치를 하고 싶으나, 학생회와는 뭔가 이상하게 안 맞는 사람
-학내 정치를 하고 있으나, 뭔가 이상하게 소진되는 사람
-학생회가 자신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대학교에 총학 말고도 크고 작은 다양한 정치 단위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글은 학생사회 구조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글이다. 학생사회 구조란 투표로 뽑는 과/단과대/총학생회, 학생회가 운영되는 방식, 학생회와 ‘일반학우’의 관계 등을 말한다. 낯설게 바라보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필자가 다른 구조의 학생사회에 있다 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의 행동과 관습을 유심히 느끼며 낯설게 바라볼 수 있듯 말이다.
파트 1에서는 필자가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사회’와 대학교 때 경험했던 ‘사회’가 어떻게 다른지를 기술하여 ‘하향식 의사결정 방식’과 ‘대의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파트 2에서는 대학교의 대표 정치구조체 ‘총학생회’가 어떤 역사적 흐름을 거쳐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지금의 총학생회 구조가 어떤 역사적 흐름 위에서 만들어졌을까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의 학생회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기 때문이다. 파트 3에서는 학생사회 구조에서 ‘총학’이라는 단체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졌음을 비판하고, 더 많은 학생이 시민성을 기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만든 대안은 아니다.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점이었고, 필자는 그저 옛날 자료들과 인터넷을 열심히 뒤적거렸을 뿐이다. 파트 4에서는 필자가 생각하는 더 나은 학생사회를 위한 시나리오를 짤막하게 그린다. 마지막 별책부록에서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움이 된 자료와 책들을 소개하겠다.
필자가 이 글에서 독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전제는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이 단어는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 많이 들어봤을 것 같다. 다른 사회문화 구조에 놓인 문화를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이는 동시간대 뿐만 타 시대의 문화에도 적용된다. ‘역사’를 하나의 직선 위에 두고 비교해 왔다면, 지금은 사라진 원주민의 사회를 ‘미개한’ 사회라고 판단하고 우리가 속해있는 국가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진보한’ ‘문명’ 사회라고 판단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계몽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보자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겪었던 경험을 단순히 고딩따리의 경험이라고 치부하지 않길 바란다.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항상 더 나은 판단을 한다고 확언할 수 없다.
이 학생 사회 구조의 대전제를 의심해 보자는 제안이다.
여기 대학교는 이상하다. 아니, 최소 나에게는 이상해 보인다. 대학 입학 전, 나는 어쩌면 조금은 특별한 학교에 다녔다고 말할 수 있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 다니는 것 말고도, 지역 내에 위치한 ‘몽실학교’라는 이름의 마을교육공동체이자 청소년 자치 배움터에 시간나는대로 들락날락했다. 그곳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자”라는 교훈 아래 학생들은 각자의 관심사대로 ‘사회’를 만들어 갔다.
1층에는 카페와 교무실, 영화관, 노래방, 손공방, 목공방과 큰 마루가 있었고, 2/3층에는 합주실, 주방, 온돌이 되는 쉼터, 컴퓨터실, 촬영 및 녹음이 가능한 미디어 스튜디오, 대강당실, 이동형 의자와 책상이 많은 배움터가 있었고, 옥상에는 팔각정과 텃밭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학생들은 특정 ‘수업’을 듣고 싶다고 선택하지 않는다. 일단 무엇인가 하고 싶은 학생들을 모으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애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전지를 앞에 두고 얼굴을 트고 이야기하며 일 년짜리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누구는 책을 같이 읽고 작가를 초청해 북콘서트를 열고, 누구는 ‘작은’ 연구를 하기도 하고, 누구는 아두이노로 우리 공간에 필요한 ‘작은’ 기술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고, 누구는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열기도 하고, 누구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목공품을 직접 만들고, 누구는 옥상 영화제를 열었고, 누구는 도심 속에서 양봉을 키워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5~10명 정도의 학생과 1명의 길잡이 교사가 함께했다. 길잡이 교사는 예산안 집행하기, 흐뭇하게 바라보기, 적절히 끼어들기 등의 역할만 했다.
그 안에서 나는 다른 학교 중·고등학생들, 대안학교 청소년들, 20살이 넘은 언니·오빠들과 친해졌다. 인문계 고등학교만 다녔다면 만나는 사람이라곤 같은 반 친구이고, 아는 어른이라고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이 전부였을 텐데. 이곳이 아니었다면,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중학생과 무엇인가를 같이 한다는 생소한 경험하지 못했을 거고, 학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거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멋진 어른들이 실존한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곳은 학교였다. 학생이 있었고, 선생이 있었고, 학생과 선생의 경계는 희미했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는 무언가를 배웠다. 너무나 당연히, 이곳에서 숫자로 표기되는 성적은 없었다.
그곳에는 따라야 할 명확한 지침과 규율은 없었다. 대신 ‘10대 자치 규약’이라는 느슨한 규칙이 존재했다. 이를 모든 행사 전에 같이 읽으며 젠더/나이/성적 지향성/친밀성에 따른 위계 권력을 인지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최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고, 모든 일은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고 말한다.
우리 대학교에서 대동제와 아카라카가 열리듯, 거기도 매년 5월이 되면 동네 어린이들과 어린이날 행사를 열거나 10월마다 각자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자랑하는 연례행사를 열었다. 여름이 되면 남원에 위치한 대안학교에 놀러 가 그곳의 친구들과 2박 3일을 같이 보내는 ‘수학여행’도 있었다.
보통 이런 연례행사 및 큰 행사를 기획하는 건 학생회였는데, 학생회의 이름은 노란조끼(줄여서 노쪼)였다는 것이 아직도 인상 깊다. 그곳의 학생회 구성 방식은 일단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 안에서 내부의 의견을 잘 조율하고, 대외적으로 집단의 말을 대변할 사람을 대표로 임명했다. 이 과정에서 공약 제시-투표는 없었다. 노쪼(기획팀)뿐만 아니라 홍보팀, 공간 디자인팀, 프로젝트팀장 모임이 ‘청소년 자치회’를 구성했다. 홍보팀은 주로 구성원 인터뷰, 행사 비하인드와 같은 이야기를 8페이지 중철제본으로 담아 만든다. 공간 디자인 팀은 공간의 모양새가 다양하니만큼 발생하는 문제도 가지각색이라, 그 문제점을 찾고 사람들이 그 공간을 더 잘-자주 사용하도록 해결한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청소년 자치회 4인, 길잡이 교사회 몇 명, 교육청 장학사와 합쳐져 ‘협의체’로 회의했다. 하루는 협의체 회의에 가본 적이 있는데,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회의가 길어졌다. 청소년 자치회, 길잡이 교사회가 서로 사이가 좋아도 의견이 항상 맞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계속 방법을 찾으려고 했고, 고민의 침묵이 있었고, 집중하지 못할 때 나는 멍때리며 머리카락을 열심히 뜯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매번 겪을 중추 멤버들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난한 상호소통의 시간 동안,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겪은 학생사회의 정치였다.
내가 그 공동체를 떠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핵심 인력들(길잡이, 좋은 가치관을 가진 장학사 등)도 떠났다. 그리고 몽실학교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소리도 왕왕 들렸다. 하지만 우리가 지냈던 그 사회의 ‘지속 가능함’은 단체 자체의 영속성이 아니다. 대신, ‘그때’-‘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무수히 반복했던 ‘듣기’와 ‘이해하기’를 통한 상호이해의 감각을 어디서든지 실천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에 가깝다. 일시적인 만남이었지만, 만난 사람들끼리 재밌게 작당하고 작별한 후에도 서로를 삶의 참조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향식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협의 가능 사회>
1) 이곳은 이기적으로 살되 이타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구체적인 관심사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놀이’의 형식을 통해 함께한다.
2) 이 ‘사회’의 대표자는 본인이 제시한 정책을 집행하는 것에서 벗어나, 공동체 구성원의 의견 조율을 담당하고 대외적으로는 집단의 ‘말’만 대표한다
3) 성문화된 세칙/규율이 없거나 유효하지 않고, 당연히 그에 따른 성문화된 ‘처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4) 합의 과정에 다다르기 위해 첫 번째 제시된 의견을 계속해서 다듬어 나간다. 모두가 흡족해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이 과정에서는 서로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5) 프로젝트 회의 시간 말고도 ‘쓸데없는’ 시간도 같이 보낸다.
6) ‘즐거움’을 느꼈던 이 단체는 영속적이지 않다. 대신 그 감각을 어디서든지 또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라는 사회는 조금 달랐다. 본인들이 감각하는 일상에서 문제를 찾아보고,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는 학생회에 들어가야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기적으로 살되 이타적일 수 있는 활동은 학업과 취업 준비 뒷전으로 여겨지기 쉬웠다.
또한 이곳에서 선생과 학생의 경계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 사회에서는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했고, 선생은 그 분야에서 연구와 교육을 함께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선생과 학생이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는 진로상담과 면담뿐이었다. 어쩌면 위계와 경계가 명확한 곳에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으로는, 학생회 구조라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 ‘정책’이라는 게 생겼고, ‘투표’라는 게 생겼고, ‘회-세칙’이라는 게 생겼다. 가장 큰 단위의 학생 대표체는 재수강 횟수 완화와 성적 지우개라는 정책을 항상 내세웠다. 학과 단톡방에는 총학과 단과대 공지 사항이 제일 자주 올라왔다. 세칙을 바꿨다는데, 뭐가 어떻게 바뀐 건지.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 학생회는 여러 방면으로 잘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실질적으로 나에게 체감되는 정책은 없었다. 제휴 맺은 안경점은 갈 일이 없었고, 로스쿨을 준비하지 않아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신기했던 건 YB, 다비치, 실리카겔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행사를 기획했다는 거다. 오락 한 번은 기가 막히게 잘 체감된다. 하지만 그 감각이 정말 내 일상에서 꼭 필요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들었다.
대의제가 정말 나를 대변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 즈음, 이런 의사결정 구조가 이상해 보이는 결정적 순간이 있었다. 최근에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서 처음에는 어이없고 기가 찬다고만 생각했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는 ‘승자주의식 의사결정’ 혹은 ‘하향식-국가중심적 의사결정’임을 느꼈다. 2024년 10월 2일 사회과학대 교학 협의체 연희마루에 참관했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과대 학생회 소속 학생들은 시험 기간 일주일 동안 연희관을 24시간 개방해달라고 요구했고, 교무팀은 예전에 23시 30분까지 개방했다가 거의 아무도 출입을 안 했다며 실수요조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장 신청인에 한해 카드를 찍으면 들어올 수 있는 접근권한을 주겠다고 말했다. ‘학생사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위한 교직원들의 배려였을까. 그리고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는 인스타에 24시간 개방한 것을 알리며 “사상 최초”라는 수식을 붙이며 자신들의 ‘승리’를 뽐냈다. 24시간 개방을 하며, 사과대 학생회는 자치도서관 운영위원회(이하 자도)와 협조하여 자치도서관에서 새로운 행사(심야영화제, 야구 플레이 오프)를 열기로 했다.
실상은 어떠했을까? 운영위원회를 제외한 외부 인원은 목요일에 참석한 3명을 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자도 운영위원회 소속 내 친구들은 집에서 편히 자지 못하고, 돌아가며 자도에서 밤을 지새웠다. 물론 그들도 새로운 행사를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여한 학생의 수를 보면 다시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해당 행사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자도에서 만난 학생들끼리 친해져서, 우리 시험 기간에 새벽 영화제를 열까?/헐 근데 우리 24시간 개방 안 되잖아/그럼 우리끼리 새벽에 몰래 보자/에이 그거는 좀. 너무 우리끼리만 보는 거잖아/ 그렇네..그럼 다른 애들한테 좀 더 물어볼까?/ 그래 사람 좀 모이면 학생회 애들한테도 한번 물어볼까?/… 등과 같은 수다를 가장한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방법이 실수요 확보에 더 적합할 것이고, 이 과정을 거쳐야만 모두가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의기구에서 이뤄진 하향식 의사결정의 가장 큰 한계는 일반 학우들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실상 무관심하다는 거다. 학생회는 당장의 1년 동안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혹은 사명감 때문에 공약을 집행한다. 솔직히 관심이 많아 보이는 나조차도 사과대 학생회 투표-더불어 학내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투표-는 큰 뜻 없이, 그냥 해야 해서 한 건데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나의 일부를 떼어내서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그들이 마치 사람들의 의사 결정권 일부를 떼어 받은 마냥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양복쟁이 학생들은 양복을 벗고 마음껏 놀고 싶지 않을까? 이스포츠 대회 같은 것을 열고 싶지 않을까? 보드게임만 주구장창하고 싶지 않을까? 양복을 입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으로 공론장과 여가의 장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관련 단체와 논의가 부재한 채, 명령-일사천리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잦다는 점이었다. 최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지 편집위원회의 자치회비 삭감과 관련해 총학생회 측과 교지 측의 충돌이 있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어떤 형태(학내 tft팀이든, 공청회든, 공문서의 형태로든..)로든지의 ‘건강한 꾸짖음’이 삭제된 채 막바로 예산 삭감 논의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교지 러비가 발표한 성명서와 학보사의 기사에는 예산삭감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따지는 내용들뿐이었다. 분명 그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겠으나, 절차적 정당성만 따지다가 문제의 실질적 핵심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교지가 잘 안 읽히는 문제는 단순히 교지 단체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여러 문제, 즉 미디어의 흐름 변화에 따른 학내 구성원이 교지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함, 교지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학내언론’으로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음 등의 상황이 중첩되어 벌어졌을 텐데,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협의해 볼 생각은 부재한 채 일방적인 판단이 진행된 것이다. 만약 총학생회 측에서 교지 편집위원회가 ‘학내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면, 자치회비 삭감에 관한 논의 이전에 교지가 ‘학내언론’으로서 기능하지 못한 구체적 이유를 물었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는 다른 대학교의 교지와 학보사를 살피거나, 과거 교지 러비가 어떤 글을 써왔는지 찬찬히 읽어보며, 그 기준을 같이 협의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교지 측도 ‘교지는 꼭 필요하다’라는 당위적 차원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닌 ‘읽히는’ 교지는 무엇일지 독자 입장에서 꾸준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서로를 강화해 보려는 ‘정치’와 ‘소통’의 과정은 생략된 채, ‘삭제’의 정치만 남게 된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가정하지 않고 이뤄지는 행정 집행에는 끝없는 상처와 피로감만 남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기 사회의 대의기구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왜 일을 벌이는 거지? 왜 이렇게 ‘일사천리식’으로 일을 해결하지? 투표제도가 있길래 ‘큰 뜻’ 없이 했던 투표 행위인데, 그렇게 당선된 정치 단위체가 ‘대표성’이라는 이름의 권위를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학내의 타 단체를 쉽게 없앨 수 있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은 규모의 차이이다. 여기는 이만 연세인 아니던가! 곧 얘기해 보겠지만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둥그렇게’ 모여 앉아 논의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미 우리네 선배들은 그를 제안했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이는 ‘비대한 총학의 구조가 필요하다’라는 당연시되어 온 전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향식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대의제 기반의 사회>
1) 이곳에는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다수이긴 하지만, ‘정치조직’이라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관중’으로서 존재한다.
2) 이 ‘사회’의 대표자는 정책을 먼저 제시하고,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3) 대의제에 기댄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는 주로 학과/단과대를 기점으로만 이뤄진다. 이 속에서 ‘학생’은 다양한 구체성(취미,정치,사회적 의제에 관심있는 개인)은 지워진 채 보편적인 개인(00대 소속으로서의 교육권이 절실한 개인)으로서만 상상된다.
4) 성문화된 수많은 기록에 기반하여 법과 규율이 존재한다. ‘개강총회’와 같은 모임을 여는 것도 세칙에 근거하여 집행한다.
5) 다양한 의제에 따라 모인 단체끼리의 협력이 아닌, 당선된 대표자 하의 임명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의 집행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 글에서 지금, 이곳의 학생사회 구조가 당연하지 않음을, 그리고 그 구조가 만들어낸 의사결정 방식이 당연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일단 나는 학교를 벗어나서 정치인이 되기는 싫다. 자 근데, 20대 때 위와 같이 ‘승자주의식 정치하기’혹은 ‘절차적 정당성에 갇힌 정치’를 학습한 사람들이 정치인과 국회의원이 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니까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 아시아 사립대 1위 연세대학교의 몇몇 학생들은 핵심 정치인이 되어있을 텐데,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대통령처럼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한다. 행정부의 특정 부서가 ‘문제적’이라고, 무엇이 문제인지 여럿이 둘러앉아 정의하거나 논의해 볼 생각 않고 바로 ‘폐지’를 명령하면 어떡하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북한에 도발하면 어떡하지? 대표자를 뽑을 때, 언제까지 개인의 ‘신념’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하는 걸까? 복불복의 정치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합리적인 의사소통에 기반한 정치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미래의 정치인이 될 학생들이 다니는 지금의 학생사회가 어떤 모습의 조직도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총학생회-단과대학생회-과/반 학생회가 존재하고, 의결 기구로는 각 단위의 대표자들이 모인 대의원회가 있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중앙운영위원회’와 ‘확대운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타학교의 경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와 같은 이름으로 존재한다. 중앙운영위원회는 단과대 대표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의결 기구이고, 확대운영위원회는 중운위보다 기층단위의 대표자가 포함된 의결 기구다. 중운위가 더 자주 개회한다.
이런 구조는 민주집중제라고 부를 수 있다. 민주집중제란, 대표자 선출 과정에서는 절차적인 민주성이 확보되지만, 이후 1년 동안의 집행 과정에서는 그 어떤 의견도 나누고 협의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생각하면 좋다. 우리는 총학/단과대/과 단위의 대표자를 직접 투표를 통해 뽑고 정책 토론회 또한 ‘잘’ 이뤄지지만, 이후 1년 동안 총학생회는 본인들이 내건 공약을 집행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낸다. 개개인의 학생들은 집행하는 정책 수요조사 구글 폼과 행사를 소개하는 카드뉴스만 기다릴 뿐이다. 이는 분명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공약 집행을 집중적으로 하기에는 좋은 구조이다. 하지만 공약 달성만이 총학생회의 존재 의의라면, ‘그 공약이 정말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런 구조였을까? 구조의 역사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당연하게 느껴져 왔던 구조의 불변성을 의심하고, 충분히 다른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파트는 특히, 기존 학생회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더불어 새로운 모습의 학생회를 꾸려나가고픈 학생이라면 주의 깊게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민주집중제는 1980년대에 형성된 학생회 틀이다. 쌍팔년도에 대한민국은 민주화 격변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민주화’라는 단일한 의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학생회를 통해 학생들을 조직하고, 동원해야 했다.[1]위에서 설명했다시피, 민주집중제는 ‘집행’에 유리한 구조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당시 대부분의 학생은 이 구조에 매우 효능감을 느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된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00년대와 10년대의 학생회는 복지와 민원 중심으로 운영된다.[2]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생회가 제시하는 ‘공약’이 본인들의 삶을 크게 바꾸지 못함을 느끼고, 학생회 자체에 크게 흥미를 잃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학생회의 달력 사업(등록금 관련 교학 협의체,대동제 등)을 집행하는 데 부담감을 갖고 학생회 활동을 기피하며, 그렇게 총학 단위의 입후보가 없어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민주집중제라는 틀은 사람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학생회라는 단체는 더 이상 ‘일꾼’ 혹은 ‘서류작업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일반 학우 입장에서도 오락만 즐길 뿐 학생회에서 내세우는 정책을 진심을 다해 원하지 않는다. ‘비대위여도 그만’일 뿐이다. (평소 이런 생각을 하지만, 총학생회 만족도 설문조사 구글 폼 링크를 들어갈 때는 ‘총학생회가 내 생활에 꼭 필요하다’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은 채 설문조사에 임한다. 평소 하던 생각을 무시하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 대전제를 의심해 보길 바란다) 그 대신 누군가는 학생회가 아닌 또 다른 자치단체를 통해, 누군가는 봉사와 멘토링을 통해, 누군가는 학회 및 대외 프로젝트를 통해, 누군가는 동아리를 통해 자신들만의 ’사회‘를 일궈 나간다. 그렇다면 현재의 총학생회 체제는 정말 꼭 필요한 것인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총학생회라는 대의기구가 제공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대의기구가 제시하는 정책이 애초에 일반학우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실제 학생회 부원들이 행한 본부와의 협상 과정이 실은 그들만의 ‘자족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또 다르게 주목할 지점은, 지금의 구조 속에서 투표를 통해 공식성을 부여받지 않은 자치단체이지만 학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를 하는 학생들의 자리가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식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행사와 정책 진행 및 홍보에 제약이 걸린다. 예컨대, 파트 1에서 언급한 사회과학대학 교학 협의체 연희마루에서 연희관 자치도서관 운영위원회(이하 자도 운영위)와 사과대 학생회는 자도 운영위 모집에 관해 ‘문서상의 지위’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다. 자도 운영위가 사과대 학생회 측에 각 과 단톡방에 홍보를 부탁했지만, 학생회 측은 자도 운영위가 사과대 학생회 소속의의 공식 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그 홍보를 거절했다고 한다. 12년 동안 연희관 지하 1층 한켠을 함께 지켜온 공간인데, ‘문서’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다.
이 과정에서 카카오톡 공지방이라는 장소는 인원 모집과 행사 진행을 알리는 중요한 온라인 소통 창구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볼만하다. 카카오톡 공지방에 손쉽게 자신들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단체는 상위기구(총학/단과대)뿐이다. 여타의 자치단체가 무엇을 홍보하려면 개인의 인맥을 통해 카톡방 홍보를 부탁하거나, 공식 기구로부터 문서상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위기구로부터 공식성을 확보하지 못한 단체들은 더 많은 학생의 카카오톡 공지방에 드러나지 못하게 된다. 반면, 공지와 세칙 개정 공지는 ‘총학’이라는 단체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민주집중제 구조와 그 구조 속에서 행해지는 일방적인 의사결정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물론 이런 방식이 정말로 더 효율적일 때도 있지만, 이런 구조 속에서 시민성(듣고-이해하고-협의하기의 과정)을 기르기는 어렵다. 학생회는 ‘모두’를 대변할 수 있다는 허상을 버려야 한다. 더 다양한 정책을 펼칠 수 없냐는 물음에 학생회는 ‘다양한 의제 때문에 우선순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지만, 이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한 의사결정이니 다른 구조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선택과 배제의 정치가 아닌 다양성과 포용의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현재 학생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있어 왔다. 그 시절, 선배들은 어떤 문제점을 찾았고,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지 살펴보자.
예전부터 학생사회의 구조를 개편하자고 주장했는데, 변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교라는 공간은 ‘역사’가 계승되는 척하지만, 실은 계승되지 않아 그 구조를 진지하게 성찰하기가 쉽지 않다. 계승되는 ‘역사’라고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신화적 개인의 역사일 뿐이다. 그동안 단체들이 어떤 공약을 내세웠는지, 십년 전 대학생들은 학생사회를 어떻게 바꾸려고 했는지 개개인의 학생들이 알기란 쉽지 않다. 이 지점은 학내언론도 반성해야 하는 지점인 게, 우리조차도 예전 선배들의 글을 진지하게 찾아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대학을 4년만 다니기 때문에 충분한 숙성기간을 갖지 못하는 것도 있고, 지나치는 장소로만 여기기 쉽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도모할 친구를 찾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공론장을 만들고,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난한 시간을 거치기에 힘들다.
필자도 학생사회의 여러 불편함을 인지하고 언어화하기까지 오래 걸렸고, 이런 불편함이 있었다는 선배도 없어서 혼자 삽질하고 인터넷과 옛 학교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그랬더니 지면을 통해 꽤 많은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지면에 그들의 생각을 남긴다. 아직 학교 다닐 시간이 많은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학내 이해관계자를 불러 모아 변화를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글이 어디로 갈지 그리고 누구에게 읽힐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고 바로 덮기보다는 생각나는 친구에게 보내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마음이다.
1. 내각제의 총학생회
당시에는 총학생회를 두고 ‘운동권’과 ‘비운동권’이라는 정파 간의 대결이 이뤄졌다. 특히, ‘운동권’이 외치는 구호와 현실의 괴리가 생긴 학생들은 ‘비운동권’ 학생회를 뽑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운동권’ 학생회가 당선되어도 학생회와 학생들 사이의 의사소통 불가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글쓴이는 이런 문제에 대해 정파 간의 치열한 조직력 싸움을 제한하면서, 다른 자치조직 활동을 북돋아 주는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총학생회 견제기구와 내각제 방식의 총학생회 구성하자고 한다. 득표율에 따라 중운위 의석 수를 배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도적 대안들이 실현되기 위해 다양한 자치 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실질적 움직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에 글쓴이는 당시 열렸던 <학생총회 제도개혁과 다양한 대중운동 질서 형성을 위한 포럼>, <여성자치연합>과 같은 학내 움직임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2. 총여학생회의 새로운 자치질서
이 글은 이전(제9대)까지의 총여학생회가 단일한 정치체로 갖고 있는 한계를 짚고, 대의제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학내 크고 작은 여성주의 자치단체들끼리의 연합체를 조직한다. 기존의 학생대표기구는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행정부 장관을 임명하는 조직도’라면, 여성자치연합은 ‘학내 곳곳에 있는 거미줄들을 연결한 큰 덫’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3.학생평의회를 꿈꿨던 자치언론기자들
05년도 연세통 선배들[3]은 학생 평의회라는 대안을 꿈꿨다. 당시 성공회대에서 학생 평의회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원문을 통해 봐보자.
이어, 경영학과(조직행동론) 황선길 박사를 만났다. 평의회적 사고는 권위주의와 신비주의(좋은 지도자가 나타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과 권위에 기대어 형성되는 정치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일상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4. 예산 자치제
과거 학생회 구조가 내각제나 평의회는 아니었지만, 예산 자치제를 통해 학내 자치단체들이 대중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며 작은 규모의 단체를 활성화했다. 여기서, 대중 활동이란 “누구나 무료입장이 가능한 행사”인 강연회, 토론회, 공연 등을 말한다. 첫 번째 기사는 2005년 예산 자치제 배분을 위하여 회의하는 현장을 담았다. 두 번째 기사는 11년도 총학 선본 당선 인터뷰로 예산 자치제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동아리와 단체들에 돈이 돌아가게끔, 더불어 자치 언론사를 대상으로 기금이 운용되게끔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당시에는 각 단과대를 대표하는 자치언론들이 많았는데, 이는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대표적 수단이 웹이 아닌 ‘지면’이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지금은 어떤 단체를 대상으로 예산 자치제를 시행할 수 있을까?
5. 새로운 거버넌스와 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민주집중제의 학생회 체제 [링크 바로가기]
‘예술대학생 네트워크’ 모임은 기존의 학생사회가 학생회 부원과 일반학우 모두가 민주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없는 구조임을 비판하고, 참여 민주주의로서의 공론장과 거버넌스를 제시한다[사진 1][4]. 이 과정에서 대의기구로서의 학생회는 개별 단과대학 정체성을 벗어나 전체 학생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대표성의 대표자도 포함되도록 한다[사진 2][5]. 아래 사진의 ‘각 단체별 의제’는 기존 연구논문을 기반으로 필자가 재작성하였다. 가장 현재의 이야기를 담았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통해 확인 바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필자는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서 대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상해 보였다. 분명 이 모습 말고도 다른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데, 싶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로 친구들을 만나 학내외의 풍경을 일궈 나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뿐더러, 대의제에 기대 ‘양복’을 입은 사람들도 매번 어떤 정책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힘들어한다. 그리곤 대부분 비슷한 공약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는 놀랄 만큼 아무도 관심이 없다.
파트 3에서 제시한 학생사회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먼저, 학내에 다양한 의제를 중심으로 작은 단체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정치조직’은 모두를 대변할 수 있다는 허상을 내려놓고, 정말 자기가 생각하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만 집중한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재수강제도’, ’성적표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축제’, ‘환경’, ‘유휴공간’, ‘여학생 휴게실’, ‘벤치’ 등과 같이 다양하다. 본인이 관심 있는 학내외 의제로, 같이 놀-혹은 정책을 제안할- 사람을 찾고, 단체를 만든다.
가장 작은 규모의 단위서부터 실험적 공동체로서 토론(듣기-이해하기-합의해 나가기)을 훈련하는 시간을 갖는다. 즉, 한 집단이 행할 구체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는 타인의 관점 전체를 나와 똑같은 관점으로 바꾸려 하기보다 제안을 계속 다듬어 나가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본인들이 하고 싶은 것으로 ‘축제’와 ‘여가’의 판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총학은 그들을 지원해 주는 공공정책을 펼치고, 네트워크형 협의체 속에서 다양한 단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갈등은 생길 거다. 그럴 때는 회 세칙으로 ‘처벌’하는 일사천리식 해결(“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식의)이 아닌 각종 이해관계자를 둘러 모아 ‘듣기’와 ‘이해하기’를 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공론장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과거의 경험을 단순히 낭만화하지 않은 채 대학교에서 느꼈던 감각을 언어화하기까지 참고한 책들이다. 교지 편집위원회라는 학내언론에에 속해있으면서, 실은 투표에 큰 뜻 없다고 입 밖으로 말하기까지 꽤나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부족의 시대, 2017, 미셸 마페졸리 : 더 이상 엘리트는 대중을 대표할 수 없다. 저자는 평범한 절대 다수가 원시적이고 순간의 감정에, ‘역능’ 속에서 살아간다고 표현했다. 작금의 사회를 ‘개인주의’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각자만의 부족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역능과 생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사회학 저서.
*아나키스트의 인류학, 2016, 데이비드 그레이브: 본문에 나온 ‘듣기-이해하기-상호협의’의 단어는 이 책에서 적극 차용했다. 읽으면서 ‘우리는 지금껏 ‘말하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학내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자치단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2005, 피에르 클라스트르: 원시사회의 사례를 들면서, 지금의 우리에게 상대주의적 관점이 왜 필요한지 알려준다. 소규모 단체의 추장은 경제활동과 의례활동을 이끌지만, 권위와 강제력,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의사 결정권은 없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말하기’라는 행위를 통해 집단의 조화를 도모한다. 국가가 정말 유효한 체제인지 끊임없이 묻게 해주는 정치인류학 저서이자 소규모 단체의 리더가 읽으면 좋을 자기 계발서.
*성적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2009, 조앤 W. 스콧: 프랑스 페미니스 역사학자가 프랑스 남녀 동수 운동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책이다. 필자는 대의제의 위기 파트를 중점적으로 읽었으며, 추상적 개인에 기댄 대의제가 어떻게 구체성(책 속에서는 ‘성차’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을 지우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제시한 개념들을 통해 ‘학생 개개인은 학과/단과대의 단위로서만 상상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각주]
[1] 시민성 관점에 근거한 차세대 대학 학생회·학생자치 모델을 위한 기초연구, 2020, 예술대학생네트워크, 서울광역청년센터, 16쪽
[2] 위와 동일, 17쪽
[3] 연세통은 04년도부터 10년까지 활동한 상경대학 자치언론이다.
[4] 시민성 관점에 근거한 차세대 대학 학생회·학생자치 모델을 위한 기초연구, 2020, 예술대학생네트워크, 서울광역청년센터, 223쪽, 그림<학생자치 거버넌스 운영 도식>
[5] 위와 동일, 229쪽, 그림<학생회 체제 개편 도식/ 새로운 대표성의 대표자 선출 방식> 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