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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Dec 09. 2021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노력할게.

자주 지난날을 돌아본다




혜인아, 엄마 죽고 싶어. 그런데 살고 싶어. 너희들이 너무 미워. 연을 끊고 싶어. 엄마 너무 힘들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울고 있었다.


우는 엄마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동생들하고 얘기해볼게. 나도 학생회 올해까지만 하고 취직 자리 알아볼게.

거대한 행사가 하나 끝난 뒤 푹 쉴 요량으로 후배를 집에 초대해 먹고 마시고 놀던 날이었다. 급작스레 걸려온 전화에 나도 울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노력할게.


동생들은 각자의 이유로 방황하고 있었다. 셋째는 1년간 유학을 갔다가 반년만에 우울감으로 돌아올 거라는 선언을 했다. 막내는 자꾸 잠에 빠져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엄마는 지방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뜻있는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는 결혼해서 집에 없었고, 엄마는 혼자였다.


이틀 뒤 다시 전화를 했을 땐 엄마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혜인이, 오늘 알바 갔다 왔어?

응 엄마, 목금토일 나갔어.

원래 주말 알바야?

곧 그만두게 되어서 사람 구해질 때까지 평일에도 나가기로 했어.

그만두고 어디 가게?


아니 엄마 있잖아, 하곤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근로기준법에도 명시되지 않은 '교육비'를, 3개월 이내 그만둘 시 받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는 교육비를 주지 않는 사장이 얄미워서. 그만두기로 했다고.


사장님, 제가 알아보니까 그런 법이 없던데요, 세금 3.3% 떼는 건 왜 그런 거예요? 제가 알바 해오면서는 그랬던 적이 없어서요. 꼬치꼬치 캐묻는 내가 신고를 할까 싶었는지 사장은 내게는 교육비를 주겠다고 했다. 예전에 자기도 여학생회장을 했었어서, 활동하는 아이들을 많이 지원해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친근함을 느낀 모양인데, 교수까지 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법을 안 지키는지. 그리곤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또 그런 서명을 요구하는지.


나는 사장님에게 더 이상 교육생들에게 그런 서명을 시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건 네 알바 아니라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아니 사장님, 그거 불법이라니까요. 사장님은 요즘은 노동청도 사용자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다며 나갈 때 등에 칼 꽂고 나가지 말라고 했다. 대답하진 않았다.


장사를 하는 엄마는 사용자의 안타까운 입장을 예로 들더니 그만두곤 뭐 할 거냐고 물었다. 일단은 여기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 일하고 나가게. 그다음에 찾아봐야지, 언제 구해질 줄 알고.

계속 아르바이트하며 살 거냐고 했다. 너처럼 사회운동을 하는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기 어렵지 않으냐고.

엄마, 나도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노조라든가 찾아보게. 9 to 6으로, 월 100에서 150 정도 벌 수 있는 곳이 많대. 영상을 만들어도 되고. 일단은 돈을 벌고 싶어. 그러면서 내 커리어가 될 수 있는 선을 그어나가 보게.


사람들이 너를 찾을 수 있도록 전문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 돈 벌고 살기 쉽지 않아.

아이 엄마, 알지. 내가 고민상담을 했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행사를 만들고 홍보물을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대. 나도 그래보려구.

그래 혜인아, 전문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어?

뭐, 내가 좋다는 사람도 있고 내가 좋은 사람도 있었는데 다 잘 안됐지 뭐.

그래, 인연이 또 오겠지. 엄마 살아보니까 올 사람은 오드라.

엄마가 생각하는 신랑의 조건 있어?

성실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네가 택할 길이 안정적인 길은 아닐 테니까. 네가 돈을 벌지 않을 때에도 집안이 굴러가도록. 그러려면 너보다 서너 살 많은 사람이어야겠지.

아유, 나도 이제 가볍게 만나기 싫어. 다 귀찮더라 엄마.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사장님이 교육비 준대. 그 말을 들은 언니는 분개했다.

야, 내가 회사에서 다 물어봤는데 그게 말이 안 된대. 네가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준거지 무슨 선심 쓴 척하고 있어. 미친 거 아냐.

그치그치. 말이 안 돼. 응 수요일에 막내랑 놀러 갈게, 그때 봐요.




일기장을 보다가 2년 전의 기록을 발견했다. 안팎으로 많이 힘들던 시기였다.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동생들도 울고 언니도 울었다. 학생회도 잘 안되고 뭐 하나 돌아가지가 않았다. 기록이 있던 시점으로부터 몇 달 뒤, 나는 그 알바를 그만두고, 학생회도 그만두고, 애인도 없었고, 새로운 알바를 구했다. 노조에서 홍보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거기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형 지각을 하곤 했다. 스스로 목을 조르기도 하고, 정신과를 찾아가 약도 구해 먹었다. 혼돈의 시기였다.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왔는지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다음 기회에 해보기로 한다. 동생은 자기 길을 찾더니 최근 청년몰에 가게를 개업했다. 막내는 군대에서 운동을 시작하더니 건강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기로에 서있지만, 적어도 저 때 바라던 활동가 월급 150은 이루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과 경제적 자립을 함께 가져갈 길을 찾고 있다. 엄마가 바라던 상은 아니라서 지금도 안 좋아하시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있다. 동생들 문제로 울던 언니는 든든한 남편과 함께 잘 살고 있다.


자주 지난날을 돌아본다. 내가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알고 싶어서. 지난날의 나를 안타까워하고, 정신없이 헤쳐오느라 고생했던 나를 안아준다. 꼼꼼하게 안아주고 싶다. 울지도 못한 채 울었던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 하나하나 되짚어서, 그때 이만큼 고생했지, 이만큼 아팠지, 대단하다, 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너보다 성장한 나는 이제 너를 위로할 만큼 컸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건 무너지되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온 너 덕분이라고.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른 것보다도 인정과 위로라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부터든, 타인으로부터든. 있는 힘껏 울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건 결국 사랑 덕분이다. 진실되게 마주하고 안아주는 데에는 그런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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