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도 Apr 25. 2024

나와 함께 시간이 멈춘 예술을 하자


백수 1년 차의 어느 날이었다.

지난 1년간 유튜브도 인스타도 브런치북 출간도 차례로 실패하고 장렬히 전사한 백수는 하이에나처럼 다음 할 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티스토리 블로그가 괜찮다길래 애드센스 승인글을 8개 썼지만 한달만에 퍼져서 조용히 빠꾸. 자영업자와 스톡사진가라는 후보지도 잠시 들렀지만 빼꼼 들여다보고 지나쳤다.



‘이번 정류장은 이모티콘 작가입니다.’



‘스톡사진으로 돈 버는 법’에 대한 영상을 열심히 보다 보면 알고리즘은 자연스럽게 부업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그중 우선순위에 밀려 몇 번이고 외면했던  ‘이모티콘 작가’가 드디어 나의 간택을 받았다.


대부분의 부업에 관한 영상들이 그러하듯, 억 단위 연봉작가들의 성공기로 출발한다. 속도 없이 또 동기부여받고, 시장분위기를 훑어본다. 하지만 이제 나도 제법 프로백수라 분위기 파악이 빠르다.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게시물들의 업로드 시기는 이미 3-4년 전이다. 유명작가들은 이모티콘 그리기 수업으로 수입을 얻기 시작했고 많은 작가들이 유튜브를 병행하다가 접은 분위기다. 임티시장은 이미 레드오션 중에 레드오션이라 승인은 하늘에 별따기고 승인 후에도 경쟁도 어마어마한데, 월정액 제도가 도입되면서 ‘임티로 인생역전’ 같은 분위기는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걸 파악했지만, 나는 다음 타겟을 이모티콘으로 잡았다. 나의 목표는 이미 월천이 아니고 월백이다. (아니 월 50이라도…)


우선 남편의 아이패드를 갈취했다.

내가 이러려고 남편에게 아이패드를 선물했구나 으하하하! 되는대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직립보행하는 강아지, 고양이, 곰, 토끼를 그렸다. 머리는 크고 배는 볼록 나오고 팔다리는 짧고 2등신도 안 되는 존재들을 꼬물꼬물 그렸다. 내가 얼마나 ‘귀여운 존재들’을 애정하는지 새삼 깨달아가는 시간이 시작됐다.


그림이라곤 미술시간에 그려본 게 다라서 그저 관찰력과 상상력 밖에 없는 상태. 마치 노래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그냥 따라 하고, 그려제꼈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소망은 평생 막연하게 품어왔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음 생에나 할 일이라 여겨왔다. 재료를 사고 학원을 다니고 뭐 그런 본격적이고 대단한 걸 해야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이모티콘이라는 존재의 출현으로 인해 나는 드디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린 지  낙서를 시작한 지 (O) 사흘째, 남편과 저녁식사를 마친 후였다. 텐션이 오른 나는 재잘재잘, 그림 그리기가 얼마나 즐거운지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었다. 나의 그림예찬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의식의 흐름은 근거를 찾아 헤맸다. ‘평생 음악을 해 온 나로서는 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갇힌 예술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다’라는 논리였다. 오 내가 말해놓고도 그럴싸해.


그러고 보니 실용음악과 졸업 후 첫 번째 음태기에 빠졌을 때 사진에 빠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다- 며 끊임없이 재잘되는 나에게 (왠지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지친 표정의) 남편은 고무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그래 나와 함께 시간이 멈춘 예술을 하자.

 그러니까 그 타임라인에서 나와서 설거지나 좀 해. “



-라고 나의 사진가 남편이 어금니를 꽉 깨문다. 사이좋게(?) 설거지를 하면서 나는 또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정말 나의 모든 스트레스들은 그저 시공간의 밸런스에 관한 문제였던 걸까.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이모티콘 두 세트를 만들었고, 그중 첫 번째였던 ‘불만이 많은 오리’는 카카오 이모티콘 스튜디오에 제안도 넣었다. 두 번째 시리즈도 순항이다. 음악으로 다 표출하지 못했던 나의 내면세계가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이 작고 하찮은 캐릭터들에게 쏟아졌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아이패드를 들고 다녔다. #애착아이패드 #팀쿡사랑해



남편은 순식간에 갈취당한 자신의 아이패드를 되찾기 위해 내게 새 아이패드를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두 달 전부터 하이에나처럼 새 제품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3월에 발표한다던 뉴 아이패드는 드디어 5월 7일로 예정되었다.



유튜브 브이로그 한다고 카메라 사고, 인테리어 인스타 한다고 가구 사고, 이제 이모티콘 그린다고 아이패드 사려는 호기로운 백수... 속도 없이 설렌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설레고 시무룩한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