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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Mar 05. 2024

나의 설레고 시무룩한 하루

지난 주말 갑자기 ‘초콜릿 샵’을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은 A 씨는 매우 설렜다. 



불과 1년 전 이맘 때는 보컬입시강의에 쩔어 고딩들의 히스테리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년 돌아왔고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이제 더는 이 짓을 못하겠다며 울고 불고 심리상담에 돈을 쓰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A 씨의 상상 속에선 (그간 그녀에게 끔찍하게 굴었던) 학생들과 담당선생에게 심한 말을 날리며 학교에 불을 지르고 탈주했지만, 현실에선 조용히 홀로 교문을 빠져나오며 미친년처럼 히죽히죽 웃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내일 뭐 하지’를 온몸으로 체험 중인 백수 A 씨.

그간 유튜브 브이로그도 해보고, 브런치북 응모도 해보고, 인테리어 인스타도 해보고, 심지어 블로그도 기웃거려 봤다. 하지만 모두 세 달 만에 짜게 식었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는 것이 실패라며 용감하게 도전한 자신을 셀프 다독여줬다. 그리고 이번엔 지치지도 않고 '초콜릿 샵'에 꽂힌 것이다.


눈누난나 초콜릿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뒤적이며 주말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고자 맘먹은 월요일. 마음은 이미 사장인지라, 희망차게 창업 브이로그를 찾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냉혹한 알고리즘의 인도로 만난 수두룩한 폐업 브이로그들… 망한 스토리와 현실조언들을 연쇄적으로 밀도 있게 보고 있자니 현타가 왔다. 


‘여… 열심히 안 했겠지. 세... 센스가 없었겠지…’ 등의 합리화와 ‘나는 달라’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위장하여 도망가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은 2년 차 수제 요거트집 사장님도, 핫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4년 차 수제 베이글집 사장님도,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다들 왜 닫냐고 어리둥절해한다는 6년 차 카페 사장님도 모두 폐업의 길로 들어섰다. 치솟은 물가에 두 손 들고, 워라밸 없는 삶에 두 발까지 든 것으로 보인다. 


남들이 보기엔 안정권에 진입한 가게들도 알고 보면 몸과 영혼을 탈탈 갈아 넣어 돈과 바꾸고 있었다. 직장인들이 ‘퇴사하고 창업’을 꿈꾸는 이유처럼 ‘월천’을 벌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SNS에서 소문난 줄 서는 인기식당도 순수익 일이백을 겨우 넘는 실정이었다. 다들 당장 도망가고 싶은 걸 여태 쌓은 게 아까워 꾹꾹 참으며 버티는 중이다.


현실을 알고 나니 급 시무룩해졌다. 당장이라도 카페 사장님, 공방 사장님, 심지어 알러지를 극복하고 플로리스트가 될 것 마냥, 국비지원 수업을 찾아 떠난 첫 화면에는 포토샵, 파이널컷, 챗GPT 클래스만 가득했다. 난 이미 중급정도의 수준으로 다룰 줄 아는 익숙한 툴 들이었다. 남들은 이제 배우기 위해 찾고 있는 이 스킬들을 냅다 버리고 나는 왜 초콜릿 만드는 법을 찾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사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음악, 사진, 영상 등 너무 무형의 것들을 만들며 살아온 나로서는 사실 손에 잡히는 무엇이 그리웠던 것 같다. 웹상에서 만나는 구독자가 아닌 현실에서 만나는 손님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알고 나니 다시 도르마무 도르마무였다. 현타가 왔다. 


우울함을 극복하려고 GYM으로 달려갔다. 뛰다 보니 돌파구가 떠올랐다. 작업실로 돌아와 빠르게 '진로상담 GPTs'를 만들었다. 나의 전공 및 직업적 히스토리와 몇 년 전에 받은 MMPI-2의 PDF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현재 나의 진로고민을 털어놓았다. GPT는 ‘스톡사진가’를 제안했다. 혼자 하는 창의적인 활동에 이만한 게 없다며 레드오션인 초콜릿 집 사장님보다는 스톡사진가가 나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며 나를 가스라이팅 했다.


군침이 싹 돌았다.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쉽게 설레는 병에 걸렸나, 의심해봐야 한다. 좋아 내일부터 식재료를 사면 무조건 흰 종이 위에 놓고 찍어두는 거야. 조명을 하나 사야 하나? 쩜팔 렌즈도 하나 질러? 탑뷰 촬영이 가능한 거치대도? 도파민이 분비됐다. 


하지만 저녁식사 후 남편이 보여 준 ‘미드저니’ 활용 영상을 보고 나는 다시금 짜게 식었다. 아니 AI가 사진을 저렇게 고퀄로 막 생성해 내는데 스톡사진이 웬 말이냐. 또다시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이다. 이 정도면 경계선 성격장애를 의심해야 하는 걸까?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을 설렜다가 좌절했다가를 반복하는 거냐. 당 떨어지네. 


다시 시무룩해진 채로 잠이 들었다. 쫓기는 꿈도 꿨다. 아침운동을 다녀와 간단히 토스트와 계란, 드립커피를 마시며 경제채널을 틀었다. IMF 이래 24년 만에 이런 고물가 시대는 없다, 폐업률이 3배로 늘었다- 는 뉴스를 보며 창업을 꿈꾼 어제의 나를 반성했다. 그래 무자본, 디지털 사업으로 가자. 


으아니, 알고리즘이 내 마음을 읽는 건가. 

갑자기 이모티콘 만들기 콘텐츠가 눈에 띈다. 

아… 안돼… 또 설렌다. 바로 이건가?!






그냥 음악 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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