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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따 Apr 03. 2020

코로나와 베를린

지난 3월 11일, 친구한테서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 너 항상 ***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했지? 혹시 거기는 문 계속 여니?

- 그게 무슨 말이야? 문을 안 열 이유가 있어? 이번 달 들어서는 도서관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 돼서 집에서 공부하는 중이야.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하는 대로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머무르던 상황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나자 괜히 쑥스러웠다. 베를린에서 나만 이렇게 유난인 게 틀림없었다.


- 우리 학교 도서관은 내일부터 출입 금지야. 문 닫는대. 그래서 지금 공부할 곳을 찾고 있어.

- 설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야?


쑥스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알게 된 사실은 반가우면서도 충격적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베를린 시내 대학 도서관, 시립 도서관은 모두 문을 닫는다고 했다. 여태껏 독일 언론이나 정부에서 바이러스 예방 수칙에 대해 언급을 한다거나 조치를 취하는 일은 없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에 사람들이 흥미를 조금 가질 뿐이었다. 동양인을 보고 인상을 팍 구기며 옷깃이나 목도리로 입을 가리는 사람들도 왕왕 있었고, '코로나 코로나' 거리면서 시비를 거는 일도 있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공포를 주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종 차별주의자들에게 명분이 되는 것 이외에는 단순한 독감처럼 치부되던 COVID-19에 이제야 유의미한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정부의 발표와 맞물려 사재기가 시작됐다. 왠지 모르겠지만 두루마리 휴지 품귀 현상이 일었고, 손세정제는 물론이고 파스타, 쌀, 우유와 같은 식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마지막 남은 휴지 내가 집음'이라든가 '세 번째로 방문한 마트에서 겨우 산 휴지' 등의 글귀와 함께 사진이 올라왔다. 텅 빈 매대가 주는 압박과 두려움은 생각보다 커서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휴지나 손세정제가 간혹 보이면 집어왔다. 평소에 쓰던 제품보다 배로 비쌌지만 살 수만 있다면 가격은 중요치 않았다.

텅 빈 화장실 휴지 매대
사진 하단에 보이는 녹색 비닐 포장된 파스타를 하나 샀다

알바하던 곳에서는 근무 시간을 줄였다가 얼마 안가 영업 중지 결정을 내렸다. 중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손님은 극적으로 줄어 보통 매장 안에는 직원들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탈의실에 벗어놓은 옷을 개거나 진열장에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는 것, 재고 정리를 하는 것이 주 업무지만 텅 빈 매장은 정리할 것도 채워 넣을 것도 없었다. 학교 가는 날을 제외하고 항상 일하던 친구네 버블티 집도 문을 닫았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는 이동제한령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출금지령 얘기도 나왔다.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는 베를린에 머물던 남성이 귀국 후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잠복기 등을 고려해 독일에서 감염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감염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마스크도 예방 수칙도 없는 이곳은 코로나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우리 모두가 천 쪼가리 하나 없이 무방비로 감염자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3월 22일 저녁에는 메르켈 총리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결국 보다 강력한 규정이 발표됐다. 실내에서도 실외에서도 2인을 초과하는 모임은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식당, 커피숍 및 술집은 물론이고 사람 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는 미용실, 뷰티살롱, 마사지 샵도 폐쇄됐다. 사실상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전체가 마비되었다.


자발적으로 외출을 삼가는 것과 벌금을 내지 않기 위해 외출을 삼가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열흘 만에 내 일상은 초토화되었다. 시험은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되었고 학교와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알바를 할 수도, 친구를 만날 수도 집으로 초대할 수도 없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차단된 채 단칸방에 고립된 것이다. 무엇보다 감염되어도 간호를 받을 수 없다. 병상과 의료진이 부족해 위급한 상태가 아니라면 병원으로 옮길 수 없고 자가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진자 역학 조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곳곳에서 들리는 귀국행 소식과 사재기 현상, 아직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줄줄이 취소되는 비행 편, 연결되지 않는 코로나 핫라인을 보면 과연 내가 이곳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든다.


조용하던 독일 언론과 정부에서 뒤늦게 내놓은 대책들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 아니다. 감염자가 폭증하면서 병원이 포화되고 의료 시스템이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늦추는 것일 뿐이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속된 말로 '존버'하겠다는 것이다. 메르켈은 독일 인구의 70%가 감염될 수 있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부가 모든 해결책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독일의 대응을 보면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사람 간 1.5미터 거리를 유지하도록 권고하면서 왜 마스크 착용은 권고하지 않는 것인가? 마스크는 소용이 없다며 마스크 구매를 멈추라던 전문가들은 이제 와서 마스크 착용을 호소한다. 마스크 품귀 현상을 우려해 마스크가 충분히 확보될 때까지 언론플레이를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이제야 마스크의 효과를 인정한 것일까? Covid-19가 유럽 땅에 상륙하기까지 시간이 있었는데 왜 확진자가 몇천 명을 돌파하도록 아무런 발표가 없었던 것일까? 아시아보다 가까운 이탈리아 북부에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을 때에도 발표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시 간 이동을 제한하고 외출을 금지하는 등의 강도 높은 규제가 가능했다면 왜 더 이전에 완화된 수준의 규제를 전혀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사후 검사는 하지 않는 것인가? 검사받지 못하고 사망한 자들도 집계한다면 독일 내 사망률이 얼마나 되는가?


'야 그래도 독일은 의료 선진국이잖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겠다는 말에 수화기 너머 친구가 멋쩍은 위로를 건넸다. 온몸에 두드러기를 달고 피부과에 갔더니 알레르기 검사는커녕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고 차를 마시라며 빈손으로 돌려보내던 의사가 떠올라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또 열흘이 지났다.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사재기는 완화되었으며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무너진 일상에는 또 다른 일상이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창가로 옮기는 것, 소식이 뜸했던 오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 드라마를 몰아보는 것, 한 시간 요리하고 이십 분 만에 먹어 치우는 것, 그리고 다시 치우는 데만 삼십 분을 보내는 것.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 때를 위해 최선을 다해 고립된 채 한가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이다. 도서관을 다니고 알바를 가는 게 이토록 그리워질 줄 몰랐던 것처럼 코로나가 물러가고 거짓말처럼 이 지루한 일상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모두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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