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벤따 May 03. 2020

또 다른 시작 앞에 설 너에게

유학이 준 깨달음 하나

맥주병 따개를 열쇠고리처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금을 살짝만 밟아도 미친 듯이 따르릉대는 자전거, 마트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 이제는 자연스러운 이 모든 것들 당연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베를린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나는 길 위에 신호등 하나, 쓰레기통 하나에도 '오!', '와!' 하는 감탄을 뱉기 바빴다. 그것들이 신기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팔자에도 없던 도전을 시작한 나를 향한 찬사이기도 했다.


나에게 유학이란 것은 더 큰 곳에서 배우지 않고는 못 배길 비상한 두뇌를 지닌 사람들이 가족의 열렬한 지지와 넘치는 경제적 지원을 받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중 한 가지에도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은 나와 동떨어진 세상이었다. 로또 당첨에나 견줄 법한. 이런 견해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유학을 가겠다, 부모님 앞에서 처음 입을 뗀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할지 오래 연습하고 계획한 끝에 부모님 앞에 겨우 꺼낸 유학 소리가 다시 내 귀로 들어가 뇌에 다다를 즈음에는 "아빠, 나 로또 1등 당첨될게. 이천만원만"과 같은 소리를 지껄인 것처럼 들렸. 부모님도 엇비슷하게 들으신 것 같았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은 아빠는 헛웃음을 짓다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셨고 어떤 대목에서는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다시 뜬 아빠의 눈에는 그 순간 나보다 더 많은 생각이 오고 가는 것이 보였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사려분별 모자란 이 어린애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 실망, 심함.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순간이다. 부정적인 반응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만치도 아찔한 것이구나! 다른 의미의 아찔함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나는 정신을 바짝 잡아야만 했다. 훈계와 타이름, 역정이 한바탕 지나가고 내 눈에선 물 같은 것이 계속 나왔다.


일생일대의 갈림길에서 '안된다'는 아빠의 말에 독일행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깨달음을 하나 주었다. 내 인생의 거대한 흐름을 한 마디 말로 정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이 아빠에게도 있었지만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삶이니까. '된다'는 말 한마디로 판을 뒤엎어 보자. 나는 독일에 가야겠고, 기필코 갈 것이다!


생각이 미치자마자 계획을 짰다. 비용을 계산하고 준비 기간을 1년으로 잡았다. 돈을 모으기 위해 오전에는 유치원에서, 오후에는 입시학원에서 일했다. 주말에는 고등학생 한 명을 맡아 가르치게 되었고, 한 달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던 학부모님은 곧 동생의 과외 수업도 부탁하셨다. 학생은 조금씩 늘어 주말에도 쉴 틈이 없었다.


전쟁 같은 하루가 쌓여 얼추 일 년이 됐다. 마침내 비행기표를 끊고 비자를 받았다. 이젠 가족들도 나의 독일행을 마땅히 여기는 같았다.

"그래서, 언제 간다고?"

집 앞 슈퍼마켓 가는 정도의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묻는 가족과 친구들이 야속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때보다 준비가 된 나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제 와서 직접 무를 수도 없고, 누가 나를 좀 격렬하게 말려줬으면 했다.


아무도 말리는 이 없었고 결국 비행기에 올랐다. 밤 비행기는 어둡고 고요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들뜬 마음으로 롤러코스터에 탔는데 하강 직전에야 발 밑 세상을 보고 후회하는, 딱 그 꼴이었다. 걱정과 초조, 불안으로 점철된 감정을 어쩔 줄을 모르다가 급기야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겁쟁이였다.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는 내가 혼자서 우리 집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던 때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골목의 왼쪽 끝엔 놀이터가 있어 혼자서도 늘 다녔지만, 오른쪽 끝은 큰길로 연결되는 길이라 혼자서는 가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외출하는 엄마를 봤다. 나는 왼쪽 끝을 막 진입하고 있었고 엄마는 집에서 나와 골목의 오른쪽을 향하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엄마!'하고 외치며 뛰어갔지만 듣지 못한 엄마는 빠르게 걸어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거의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끝까지 쫓기로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무서웠던 나는 등을 남의 집 담벼락에 대고 양 손을 좌우로 뻗어 벽을 더듬거리며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한발 한발 내디뎠다. 지나가던 젊은 남녀 한 쌍이 나를 보고 수군거렸다. 애써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날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꼬집으며 떠올린 지난날의 기억은 '골목에서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던 어린 나'까지 이르렀고 문득 지금이 그때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엄마를 쫓았지만 지금 꿈을 좇는 것이리라.


골목 밖엔 괴물이 사는 것도 아닌데 서너 살의 나와 스물 하고도 서너 살의 나는 시작의 대가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처음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두려운 일이다. 더 이상 우리 집 골목을 빠져나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아직도 나는 새로운 시작에 맞닥뜨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러면 내 안의 작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언젠가 이 골목을 지나 세상을 누비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와 베를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