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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따 Nov 12. 2020

자유 투성이 세상

스무 살의 특권은 단연 음주다. 십구 년 세월을 어떻게 참았는지, 단 몇 초도 낭비하지 않으려 전날부터 모여 술과 함께 새해를 맞는 스무 살들의 모습은 이색적이지 않다. 나는 그보다 며칠 늦게 중학교 동창들과 선생님과 함께 갈빗집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그것이 내 생애 첫 알코올은 아니었다. 열세 살쯤 언니 둘과 집에서 영화를 보려는데 당시 성인이었던 언니들이 맥주를 따라놓고 안주를 준비하는 사이 슬쩍 한 모금을 마신 적이 있다. 기억에 따르면 독약 내지 사약 같았던 맥주의 맛은 내가 태어나서 마셔본 것 중 가장 시궁창 같은 맛이었다. 어제까지는 시궁창 같은 것이었을지라도 불법이었던 것이 합법이 되면 구미가 당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합법의 맛, 어른의 맛에 취해 시궁창을 들이켜던 나는 곧 맥주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스무 살은 술을 마시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왜, 고등학생 때까지는 합법이더라도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교복을 입고 급식을 먹고 타율적으로 야간 자율 학습을 하던 나는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없었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도, 일곱 시간 넘게 잘 수도 없었다. 내 교복 마이 주머니에는 늘 곱게 접힌 한 달 급식표가 들어있었고(요즘은 어플이 있어서 급식이들이 아직도 종이를 소중하게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오늘 급식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다. 과연 열아홉까지의 인생에 허락된 게 있나 싶을 정도다.


법대로라면 스무살의 나는 담배도 피울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주변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어서 우연히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담배를 만져본 적도 없, 어느 에 불을 붙이고 어느 에 입을 갖다 대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한번은 유튜브에서 금연과 관련된 영상을 봤는데, 담배를 끊지 못해 피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댓글창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처참한 세상이 있었다. 몸에 칼을 대봐야 끊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본인은 암에 걸려서야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왜 담배를 팔아가지고 내가 이 고생을 하냐며 우는소리도 있었다. 흡연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처음부터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한때 담배 피울 자유를 만끽했던 이들은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끊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직접 해보기로 했다. 내 생활 속에서 가장 중독성이 강하고 무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술이었다. 물보다 싼 맥주의 나라 독일에 살면서 맥주를 끊는 것은 짐작하기에 담배를 끊는 것과 맞먹었다. 냉장고에 맥주를 사다 놓지 않았고, 술자리는 거절했다. 굳이 끊어야 하나, 어렵지 않을까 했던 걱정이 우습게도 이제 나는 더 이상 맥주를 포함한 어떤 술도 마시지 않는다. 막상 술이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이 되니 이 생활이 만족스러워 계속 마시지 않기로 했다. 돈도 굳고 정신도 굳고 간도 굳었다. 내가 아무리 술을 좋아했어도 담배 끊는 고통에는 못 비기 걸 보면 담배는 처음부터 피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를린에 와보니 여기는 한국사회보다 더 많은 것이 허락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본 것을 묘사할 때면 '자유롭게'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는다. 공원이나 지하철,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악기 연주나 노래를 하는 사람들, 공원에 누워 자유롭게 햇볕을 쬐는 사람들, 민낯과 노브라로도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서 자유로운 여자들. 때로는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지하철역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열차 내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도 흔히 보인다. 그뿐이랴? 마약을 사고파는 사람도 볼 수 있다. 클럽이나 파티에는 술과 마약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자유가 곧 행복이나 긍정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 것 같다.


마약을 구하기 쉽다고 해서 독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마약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내가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크로아티아인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땐 친구네 어머님이 나에게 담배나 마약을 하는지 물어보셨고, 우리가 놀러 나갈 때 종종 주의를 주셨다.  마약(痲藥) 마귀 마()가 아닌 저릴 마(痲) 자를 쓰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마약범은 얼마나 위험한 범죄자로 분류되는가? 그런데도 모든 규제가 갑자기 풀려버린 어리석은 스무 살처럼 법망이 느슨한 곳에 나가 마약을 하는 사람이 많다. 무슨 대단한 자유라도 되는 양.


바야흐로 벅찰 만큼 자유가 가득한 자유 투성이 세상이다. 때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오히려 내게서 자유를 앗아가기도 한다. 담배나 마약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그렇게 입기 싫었던 교복에서 벗어나자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뭘 입을지 고민한다. 주머니에는 한 달짜리 급식표가 없어서 늘 메뉴를 고민하며 장을 본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자유라는 것을, 선택지가 있는 것이 선택하도록 구속받는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있을까? 모든 행동은 자유로운 동시에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자유와 구속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작용 반작용처럼 늘 쌍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무엇으로 자유를 느끼 하기보다 무엇에 구속받을지를 선택하겠다. 기꺼이 나서서 속박당해도 좋은 것, 나에게는 그것이 술이나 담배 따위가 아니다. 마약도 아니다. 돈인가? 상상해보면 꽤 달콤한 구속이겠으나 지나치면 해로울 것 같다. 유튜브인가? 역시, 유튜브는 좀 덜 보는 게 좋겠다. 이건 달콤하지조차 않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무엇에 구속받을지를 고민하는 이때 난 더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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