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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약사 Jan 08. 2023

술 그만 먹게 하는 약 있나요?



아흔 정도 되어 보이시는 한 노모가 약국을 찾아오셨다. 

“술 안 먹게 하는 약 있나?”

술을 안 먹게 하는 약이라… 술을 먹을 때마다 부정적인 신체 반응을 일으켜 거부하게 만드는 약과 술 대신 의존하게 하는 약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약은 다른 사람이 대신 구입해 줄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 아니다. 그 약물의 위험성과 의존성 때문에, 비슷한 사례들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복용을 판단하게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누가 그렇게 술을 마셔요?”

“아들이, 밥도 안 먹고 맨날 술만 먹어. 그런 약 좀 있으면 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대화의 시작부터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술을 먹는 자녀가 있는데, 그것을 부모가 강제로 외부 물질을 이용해서 그 행동을 제어하려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않고, 술로서 겨우 에너지를 얻는 자식이 걱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아들이 몇 살인데요?”

“환갑이 넘었어.”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뭐가 힘들어 보이세요?”

“힘든 일도 없어. 근데 그냥 술만 마셔대.”

노모가 보기에 힘든 일이 없다는 것은, 아마 근래에 급격한 외부 사건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들의 마음속에 혹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과 표현하기 어려운 좌절과 무력감이 있지는 않을까. 막연하게 내 주변 삶의 경험을 통해 넘겨 짐작해 볼 뿐이다.

“아드님이 혹시 무슨 일을 하세요?”

“일도 안 해. 들어앉아서 술만 마셔.”

“언제부터 일을 쉬셨어요?”

“한참 됐어. 젊었을 때도 하도 술을 마셔서, 내가 병원에까지 넣어 놨었는데 소용이 없어. 좋다는 여자도 많았는데, 아들이 똑똑하고 인물도 괜찮았거든. 그런데 결혼도 안 하고 여태껏…”

아차차.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고 오래 지속된 것 같다. 가족에 의해서 알코올 의존을 고치고자 병원에 강제 입원이 된 적이 있는 것이다. 원래의 가족 외에 마음을 나누고 기댈만한 새로운 가족이나 다양한 외부의 인간관계가 없고, 일을 통한 사회적 성취 면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이분은 대체 어디서 자신의 존재감을, 살아야 하는 의미를 느낄 수 있을까.

입원을 통해 사회적으로 단절시키고, 외부의 강제와 압력으로 아들을 고치려 하는 방식은 그대로 ‘술 안 먹게 하는 약’을 찾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아마 기타의 소소한 문제들에서도 이분은 강력한 외압으로 아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선택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마음이 여리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압력을 그대로 수용하려 애쓰다가 자기를 놓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들이 병원에 가자고 했을 때, 저항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나중에 원망하거나…”

내 딴엔, 이것은 너무나 당연했기에, 그저 당시의 상황을 더 여쭤보고자 드렸던 질문이었다. 한데,

“안 그랬어. 지가 잘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나는 잠시 망연해진다. 부모가 나를 병동에 넣어도 저항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들은 스스로를 완전히 포기하고, 삶의 주도권을 전혀 행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정말 할머님 말씀대로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 가서 벌을 받든 치료를 받든,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무언가와 분리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아들이 술을 마시는 게 왜 싫으세요?”

“맨 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싫어.”

“그런데 아들을 술을 못 먹게 하면… 아드님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재미도 없지…”

오랫동안 일을 손에서 놓았고,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본 경험보다 통제를 주로 받아왔던 환갑을 넘긴 그 남성분이, 술을 마시는 것 말고 어떻게 삶을 보내고 싶어 하시는지 나는 잘 모른다. 또한 아흔을 앞둔 노모도 술을 마시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답이 보이지 않아 참으로 갑갑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떤 순간들 속에 변화의 기회들이 있었을까. 아쉬움에 부질없는 생각들을 이어가 본다. 만약 일반의약품으로 금주를 돕는 그런 약들이 분류되어 있었다면, 나 역시 무력감을 이기지 못해, 내가 할 수 있는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할머니께 약을 드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외부에서 물질로 제공하는 도움엔 이렇게 한계가 있다. 때때로 당사자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을 더 다치게 하기도 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점철되어 있다고 했던가.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냈으면 좋겠다. 삶의 좋은 부분들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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