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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약사 Jan 08. 2023

버스가 오고 있는데 뛸 수 없어요




처방전을 입력하면 

심평원과 연결된 

의약품 안전 서비스(DUR)가 작동된다. 


약국에서 약을 받으실 때 

이미 조제받은 약이 있어, 

같은 성분의 약을 

추가로 더 드시게 된 것은 아닌지, 

함께 먹으면 안 되는 약이 있는지 

등등의 정보를 알려준다. 


이날 오신 분은 

이미 다른 약국에서 

같은 약을 받으신 것으로 나오는데, 

총 5가지 중 

3가지 약에 대해서 중복된다고 나왔다.


음? 피부 알레르기인가? 

항생제도 처방이 나왔는데, 

이전보다 많이 긁으셨을까? 


기존의 약이 효과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서 새로 진료받으신 걸까? 

성격이 급하신 분일까? 

증상이 너무 심한가? 

약을 어디 두고 다른 지역에서 오셨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말을 걸어본다.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으신 약이 있으신가 봐요.”

“네, 그런데 안 들어서 여기 한번 와봤어요.”

“피부 때문인 거예요? 어디가 어떻게 그러신데요?”


사실 피부질환에 관한 약이라는 게, 

다른 피부과 병원에 가본다고 해서 

별다른 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스테로이드 등급을 높이거나, 

경우에 따라 면억억제제나 

항균제를 적절히 첨가하게 되는 차이 정도가 아닐까.


“어디서는 알레르기라고 그러고, 

어디서는 염증이라고 그러고. 

이게 자주 이러는 데 낫질 않아요.”


바지를 걷어 올리며 보여주신 

발목과 종아리 부위에 

붉은 점이 빼곡하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알레르기든 염증이든 

약을 전달하는 내 입장에서는 

결국 그 말이 그 말이긴 한데, 

이분의 다리는 

확실히 흔히 보던 증상과는 상황이 다르다.


처방전을 본다. 

여러 종류의 항히스타민제를 골고루 넣고, 

스테로이드와 항생제. 


다른 곳에 가서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아 다시 진료를 본다는 말을 들으시고 

나름 항생제를 추가로 처방하셨나 보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세균 감염과 관련이 있을까?


“어머머! 이게 왜 그런 거예요? 

한쪽만 그래요? 아니면 양쪽 다? ”


내가 오히려 놀라 되묻는다. 

이건 대체 뭘까? 


차라리 이상한 괴생물체라도 몸에 들어가서 

이런 반응을 내는 거라고, 

그래서 그놈을 잡아서 제거하면 

싹 낫게 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항생제를 처방한 의사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언제부터 그래요? 

혹시 예전에 

다리 쪽에 수술받으신 적 있으세요?”


“네 맞아요. 

한 4년 전에 뒤꿈치가 부서져서… 

양쪽 다…”




약국에는 이런 손님이 종종 오신다. 

병원에 가도 낫지 않고,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는다. 


원인도 알 수 없고 

증상도 잘 제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속 반복된다. 


그러다가 대화해보면 

그 부위에 수술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많은데, 

예민하신 분 중에는 

치과 치료나 내시경 했던 부위를 

언급하시는 분들도 많다. 


시술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는 그 경험의 강도가 심각하게 다가오고, 

그에 대한 충격의 여진이 남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에게는 환지통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객관적 논거로 확인을 거친 실체를 믿어야 할지, 

눈앞의 상대가 표현하는 추상성을 믿어야 할지,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그 이야기를 

신비로운 이미지처럼 연상하는 것 같다.




“수술하고 나서도 

계속 디딜 때마다 아플 거라고 하긴 했는데, 

그렇더라고요.”


“그럼 걸을 때마다 아픈 거예요? 

왜… 뒤꿈치가 왜요?”


“2층에서 무거운 걸 들고 뛰어내렸거든요, 그때. 

식당에서 일하는데 빨리하려다가…”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마음은 세상 속에서 

나의 삶을 움직인다. 


우리의 세상과 나의 마음,

그 둘은 

나의 몸을 통하여 서로 관계 맺는다. 


세상이 전해주는 것들은 

몸의 감각으로 수용되고 

마음으로 의미를 풀어낸다. 


그렇게 혼합된 의미 덩어리이든, 

또렷하게 추출한 믿음 조각이든, 

나의 마음은 

나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구현된다. 


죽음을 향해서 가는 

신체의 유한성과 

과거나 미래로 뻗어나가는 

무한성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경험하고 선택하며 나아간다. 


추상이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한과 유한은 상응하며, 

마음도 몸을 통해 연결된다. 


세상의 의미들과 

내 마음의 열망이 

나의 몸에 담기고, 또 통과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경험을 담은 나의 몸이 

때로는 

내 마음의 한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 한계에 굴복하고 

통제되며 

위축될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확장할 수 있는 

인내와 요령,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몸, 

몸과 세상, 

세상과 마음은 

서로 균형 상태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몸에 극심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황을 

새롭게 재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다.




어릴 적 내가 봐오던 엄마의 발은, 

설거지할 때 잔뜩 웅크리고 있는 발이었다.

나는 그 발이 

너무 애처롭고 안쓰러웠던 것 같다. 


아마도 긴장과 두려움을 쉽게 느끼던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너무 안 편해...’라며 

힘겨워하는 엄마의 말소리가 

그 발에서 들리는 듯하다. 


그런 엄마와 똑같이 

발끝을 오므리고 컴퓨터를 하는 

신랑의 발을 종종 끌어안는다. 


먼저 자리에 누워 있으면, 

살포시 발 쪽으로 다가가 쓰다듬고 

발에 볼을 기대고 잠든다. 


내가 생각했을 때 발은,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주로 담기는 신체 부위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그 사람의 발이 함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 고마움에 

더는 긴장하지 말라고 

쉬어도 된다고,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응원의 마음을 담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발에 대해 

이런 의미들을 가진 것이다. 


지난 시절 발에 대한 경험과 인상,

특정한 상대가 나에게 갖는 의미와 

발이라는 신체 기관이 가지는 기능과 가능성. 


그렇게 발과 관련한 세상과 

내가 꺼내어 놓고 싶은 나의 마음들이 

신체의 표현으로 연결된다.




그에게 자신의 발은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 

살아오는 동안 발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담아왔을까. 


다른 사람의 발에서 어떤 마음들을 확인하고, 

발을 무엇을 할 수 있는 신체 기관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발로 

어떤 마음들을 표현하며 살고 있을까.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라 

아직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 


종일 서서 발을 딛고 일하지만 

그건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고 하신다. 


사고로 재편된 신체적 한계가 

그의 일에 대한 마음과 

사회적 관계를 

크게 압박하지는 않는 듯이 보였다. 


비록 통증은 남았지만, 

그때의 경험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지내시는 걸까?


“그럼 어떤 상황일 때, 발이 가장 힘겹게 느껴지세요?”


“저번에 출근 시간이 늦었는데, 

버스가 저기 앞에 오고 있는데, 

내가 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특히 더 아픈 것 같아요.”




무거운 것을 들고 

2층에서 과감히 뛰어내렸던 분.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효과가 없어서 

바로 다음 날 다른 병원을 찾으신 분. 


느긋한 성격의 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분이 더 이상 

성마른 속이 후련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


발꿈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 하는 작업을 계속해내는 

성실하고 단단한 성정.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시간 약속에 늦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본다. 


조급한 마음으로 

발의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눈앞을 지나가는 버스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삶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다. 


몽글몽글 피맺힌 다리는, 

동동 구르는 마음이 

혈관의 부정형 확장으로, 

연쇄된 피부의 상태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사정을 다 듣고 나서 

더더욱 새로운 처방이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약을 두고 서로 민망하다. 

뭐라고 하면서 드려야 하나 어색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항생제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나머지 약들도 

이미 효과가 없었다고 확인되었던 약들이다. 


그분의 경험 위에 

섞이지 못한 기름처럼, 

현대의학이, 

과학이, 

화공약품이 동동 떠 있다. 


어쩌지…?


“그럼 이 약은… 어떻게 할까요…?”


주춤주춤 겸연쩍어하며 그분께 묻고 

약봉지에 약을 담아 드린다. 

뭐라고 덧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약값의 일부는 

보험공단에서 지불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쓸 일이 있으실 수 있겠다 생각되어, 

감기가 심할 때 드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 외 달리 

이 증상을 완화할 방법도 잘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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