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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Oct 29. 2020

내 아이를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키우고 있다면

이제 막 아이가 수와 문자의 세상으로 진입하여 교육이라는 첫걸음마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문자와 숫자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이를 사용함에 따른 놀라운 세계와 편의성에 감탄했을 법한데, 생각보다 아이는 금방 지루해하고 관심 없어 보였다. 이제까지 숫자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살았던 고대 원시인들이 숫자와 문자의 발명과 사용으로 느꼈었을 법한 상호 소통에 대한 편의성과 감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딸아이도 이제까지 암흑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막 문명에 한발 들여놓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바라보니 생각만으로 어느새 아이를 원시시대 어느 동굴에 동물 가죽옷을 입혀 놓고 모닥불을 쬐는 모습으로 상상만으로도 혼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조그만 아이를 두고 엄마가 너무 멀리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맞은편 의자엔 아이 대신 곰돌이 인형이 나를 보고 앉아 있다. 


어디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딸이 내가 원시시대 동굴을 잠시 상상하는 동안 곰 인형을 대신 앉혀 놓고 도망을 가버렸다. 둘이서 한참 동안 깔깔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겨우 학생과 학부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마음가짐이 중요할 것 같아서 방향성 설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매일 밤 고민이 많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대부분 아이가 비슷한 과목의 학원을 다닌다. 그리고 엄마들은 거의 비슷한 희망을 품고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엄마들의 희망 풍선이 점점 내려와 현실의 접점을 만난다고는 하지만, 이제 막 시작인 엄마들의 희망 풍선은 저기 멀리 하늘 저 멀리 둥둥 떠 있다. 아이들이 각자 엄마의 희망 풍선의 줄을 잡아당겨 현실 아이들의 자리로 내려오느냐 그렇지 않으면 엄마의 풍선 줄을 잡고 둥둥 떠올라 가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우리 아이들이 모두 다 서울대를 가는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아이가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소수의 아이가 하는 여정을 그대로 모두 같이
가는 게 현실 아닌가. 


가능성이라는 전제하에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가능성일지라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또 노력이라는 든든한 변수가 있으니까 다수의 우리는 묵묵히 그 여정을 함께 한다. 어찌 보면 대다수의 우리는 그들이 중간중간 지치지 않고 페이스를 잃지 않고 레이스를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뛰어주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굳이 그 길을 가고 싶지도 않았고 가는 도중에라도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고 또 잠시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뛸 수밖에 없었던 대학까지의 레이스. 그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이 길이 아니었나 봐’라고 다른 길을 향해 달리고 싶어도 그때는 힘이 다 빠져 그냥 왔던 그 길을 사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수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뛰고 있는 목적이 페이스메이커라는 걸 알고 있고 그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평가를 받는 일이지만, 만약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결승점까지 열심히 뛰는 경기에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페이스를 조절하기 위한 페이스메이커로 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어이없을까?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엄마들이 나를 본다면 초보 엄마에다가 입시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떠든다고 쏘아붙여도 할 말은 없다. ‘네가 막상 그 자리에 가봐라. 너라고 별수 있는지…. 누군 몰라서 그리 하지 않는 줄 아느냐?’라고 나에게 쏘아붙일 것 같다. 나는 이제 막 학부모가 된 새내기 학부모지만 학부모 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사람이라 그런지 이제 막 시작했지만, 그 무게와 현실이 주는 답답함을 지레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늦게라도 만날 수 있었던 귀한 이 아이를 내 노력이 닿는 한 열심히 키워 보고는 싶은데 남들 하는 데로 정신 놓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 이 아이를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키웠다는 걸 깨달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매일 부족한 나 자신을 계속 채근해서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곤 한다. 


분명 열심히 키우는 것과 잘 키우는 것은 다른 것임을 아는 나이기에 어쩔 땐 더욱 하루하루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매일 평형대 위 중심 잡는 아이처럼 엄마 마음을 다잡고 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하루는 ‘다들 하는데 나라고 무슨 배짱으로 안 할 건가’라는 조바심이 들고 다음 날은 ‘이렇게 내 생각대로 가도 되나’ 하는 불안감도 들것이고, 엄마가 되어 한 사람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여느 철학자 못지않은 사고의 깊이와 이에 따른 삶의 방식을 꾸준히 따라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 같다.      


엄마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계속 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본다. 다른 사람의 페이스를 무턱대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인생을 내 페이스로 나의 속도와 방향으로 꾸준히 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오십이 넘은 나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도 그동안 사람들이 가는 대로 쉽게 말해, 대세가 움직이는 물결대로 휩쓸려 그 무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반평생 넘게 살아온 나의 습관 덕분에 어쩌면 갓 십 년을 사는 우리 딸아이보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기가 어리석고 둔감하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내 짝지가 문제 푸는 걸 도와줬어. 내 짝지는 똑똑한 거 같아”

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너는 왜 못 풀었는데?”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할 틈도 없이 조건반사처럼 그 아이는 할 수 있는걸 너는 왜 못하냐라는 원망 섞인 말이 순간 튀어나왔다. 정말 말은 한번 뱉고 나면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엄마의 얇고 어리석은 속내가 다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려질 정도였다.  친구가 잘 푼다고 칭찬하는 아이에게 너는 왜 칭찬을 못 받느냐는 시기심과 경쟁심을 가르쳐 주는 어리석은 엄마가 되어 버렸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는 누구보다 아이를 줄 세우기 좋아하고 페이스메이커든지 뭐든지 결승전을 향해 앞만 보고 뛰어가라고 들쑤시는 엄마가 되기에 십상인 사람인 거 같다. 이 글은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 쓰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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