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의 어느 날. 우리는 하와이 공항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시도를 해도 티켓이 출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갓 호놀룰루에 도착해 마우이 섬으로 가는 여정 중이었다. 환승 티켓을 출력하려면 발권기에 예약 번호를 입력하도록 되어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오류 메시지만 나타났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항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몇 번 시도해 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떠났다. 다른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비행기 출발 시간이 지나버렸고, 우리는 국제 미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꼭 하와이어야 할까? 여행 전부터 여러 번 고민했다. 먼 거리의 비행기 편과 일주일 간의 숙박비, 렌터카 비용과 식비, 쇼핑 비용을 계산해 보니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여행을 위해 3년 전부터 적금을 들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떤 이유는 우리의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꼭 하와이어야 할까? 돈이 차곡차곡 모이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같은 가격에 누릴 수 있는 서비스를 생각하면 태국이나 발리가 나을 것 같았다. 차라리 볼거리가 많은 유럽을 갈까 고민도 들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최소 비용으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 하지만 난 똑똑한 축에는 들지 못한다. 지난번 싸고 좋은 숙소를 찾다가 결국 사진만 번지르르한 엉터리 숙소에 묵게 된 과오가 있다. 마음은 하와이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왜 나는 가성비를 생각하고 있을까? 싸고 좋은 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좋아, 이번에는 진짜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거야. 양보는 없어.’
꼭 하와이어야 할까? 그렇게 다짐을 했음에도 다시 고민에 빠졌다. 시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쓰러져 정밀 검사 등의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아프신데, 분에 넘치는 여행이 도리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이런 나를 남편의 말이 붙잡아 주었다.
“부모님의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계획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모처럼의 기념일이니까 나중에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게 다녀오자.”
하와이는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국제선 공항이 있는 호놀룰루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 마우이 섬에 가기로 했다. 그 와중에 비행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카운터에 문의한 끝에 이유를 알아냈다. 발권을 하려면 출발 시간 40분 전에 출력을 완료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넘겨버린 모양이었다. 입국 심사가 길었던 탓이다. 카운터에서 한 시간 반 뒤의 비행기로 재예약을 해주었다. 곧 안도감이 밀려왔다. 조금 일찍 가나 늦게 가나 마우이 섬에 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우리 부부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꼬챙이 같던 두 사람이 제법 후덕해졌다. 외모의 변화만큼 취향도 변했다. 휴양지는 따분하다고 질색했는데, 어느새 해변에 누워 하늘이나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마우이는 한적한 섬이다.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가 심심하면 수영을 하고, 낮잠을 자다 밥을 먹으러 가는 단순한 일과를 보냈다. 이제껏 누려본 적 없는 안온한 나날이었다.
2년 반이 지난 요즘, 때때로 그날의 기록을 들춰본다.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회상하고 회상한다. 여행의 기억이 좋아서? 물론 맞다. 그리고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여행을 다녀온 2달 후, 전 세계에 비상이 걸렸다. 몇 세기 만에 강력한 바이러스가 찾아온 것이다. 그로 인해 일상이 바뀌어 버렸다. 예전에는 여행을 위해 딱 두 가지만 고려하면 됐다. 돈과 시간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면 돈이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뿐, 돈과 시간만 있다면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지금은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바로 여행이다. 서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오지 못하게 막는 세상이 되었다. 하와이의 사진을 보며 몇 번이나 되뇐다. ‘다녀오길 잘했어.’
동화 <파랑새>에는 새를 찾아 헤매는 두 남매가 나온다. 오로지 행운의 파랑새를 찾기 위해 여러 장소를 거치고 많은 나날을 보낸다. 그들의 염원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파랑새는 항상 곁에 있었다. 자신들이 키우던 비둘기가 바로 파랑새였던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헤매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직장을 잃었고, 안전을 잃었고, 신뢰를 잃었다. 불안과 우울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가벼이 여긴 것들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스크 없는 얼굴로 숨을 쉬는 일, 인파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일, 사랑하는 이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 나누는 일.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는 행동은 다음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의 행복을 뒤로 미루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꼭 하와이어야 할까?’ 하는 물음도 그렇다. 비용이 아까워서, 과분해서, 부모님 생각에. 수많은 핑계를 찾았다. 그때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2년 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다음 기회가 오기는 올지, 몇 년이나 지나야 가능할지 모르는데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사진을 보며 다시 되뇐다. ‘역시 다녀오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