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편집장 Oct 30. 2020

핑크 팔레트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11  #insamnia


매거진 발행작가 : insamnia(https://brunch.co.kr/@in3nia/26)
매거진 발행일 : 2020. 10. 15.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건 어느 영역까지 가능한 것일까요? 영역이라는 제한을 두어야 할 만큼 과연 어려운 일일까요?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고 알려준 경험이 있어서 이 글을 남깁니다.



  긴편집장님께서 기획하신 '잃어버린 책 찾기 프로젝트' 소식을 듣고 바로 떠오른 책이 있었다.


핑크 팔레트- 한윤아, 2018년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휘감겨 있던 책이다. 

  그랬던 이 책을 기억에서 잠시 제쳐두었다는 반성이 이 글을 남기게 한다. 나의 책장에서도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된 책이다. 서있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2년 동안 저 자리에 누워있는 핑크 팔레트


  이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또 무심하게 흘려보냈을까. 이제 막 브런치에 입문한 초보로서 서투른 글솜씨에 대한 걱정이 있지만, 바로 지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강해서 조급하게 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과연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


인연


  2018년 여름이었다. 살면서 가장 무더웠던 여름 중 하나였다. 당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퇴근 후 혼자서 할만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가 아주 우연히 사이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면 의뢰인과 연결을 해주는 곳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타이핑 정도라서 연관된 항목에 클릭을 해 두었다. 그러곤 며칠 후 한 의뢰인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알림 문자가 왔고 무작정 신청을 해봤다. 해야 할 일은 녹취된 음성을 타이핑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의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십 대 여성의 목소리였고 작업을 의뢰하시겠다는 의향을 밝히셨다. 누군가에게 선택되었다는 뿌듯함에 그런 일이 처음이라는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음성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주신다고 하셨고 나는 이틀 안에 작업을 끝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내 본업이 아닌 일을 처음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과 떨리는 마음으로 음성 파일을 듣기 시작했다. 의뢰인께서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상황이었다.  사람 모두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에 더구나 목소리 톤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 이거 내가 다 적어낼 수 있을까? 단순히 열심히 듣는 노력만으로는 해내기가 힘들 것 같아 음성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어플을 찾아서 다운 받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몇 번이고 되돌려보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자로서도 경험해봤던 일상적인 이야기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날씨와 장소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부분은 그 음성이 또렷이 들리지 않더라도 정확한 단어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지만 이 분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흘러가면서 내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분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쇼'라는 이름의 뷰티 블로거를 취재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들의 주제는 다름 아닌 '핑크'였다.


  핑크


  그것은 분명히 나도 아는 것이었다. 

  아저씨인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이 핑크에 대해 이렇게 대화를 전개해 나가기 전 까지는.

Q.   그리고 핑크 안에 다양한 핑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핑크를 좋아한다고 내가 저 사람이랑 같은 취향이 아닐 수 있듯이 정말 그 안에서도 계열이 많이 나뉜다는 느낌이 드는데 다쇼님이 좋아하는 핑크를 키워드로 표현하면 어떤 핑크일까요?
A.   저는, 확실히 핫핑크도 좋아하고 페일핑크도 좋아하고 베이비핑크도 좋아하고 코랄핑크든 핑크를 다 좋아하긴 하는데 그 질문을 받고 특별히 생각났던 거는, 그 마시멜로 중에서 하얀색, 분홍색, 파란색으로 꽈배기 모양으로 돼있는 그 마시멜로 있잖아요. 거기 안에 있는 핑크색을 특별히 좋아하고요. 딱 바로 그 마시멜로가 생각이 났어요. 그 마시멜로에 있는 핑크인데 그 마시멜로처럼 질감이 폭신폭신한 느낌의 핑크? 그런 거랑 봄에 벚꽃 폈을 때 그 벚꽃잎 색깔 핑크? 그 약간 봄 느낌이 나는 따뜻한 핑크? 근데 또 너무 코랄이면 안돼. 



  이 부분에서 가장 충격적인 말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너무 코랄이면 안돼'

  이게 무슨 말인지 그 순간엔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문맥상 굉장히 중요하고 반전이 있으며 센스가 숨어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인가를 맘 놓고 좋아하고는 있지만 자신만의 브레이크는 장착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이 사람들 왜 이리 멋있지?


몰입


  두 사람 간의 대화의 폭이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친근한 동질감이 서로에게 녹아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곳을 같은 호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사이에서만 발현될 수 있는 끈끈한 애착과 연대감이 청각을 통해 슬며시 들어와 비어있던 머릿속 공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핑크는 내가 이 글에서 단지 중요한 문장에 색을 씌우는 게 전부인 그런 단편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목적으로서의 핑크였다.


  그녀들의 대화는 단순히 느낌이나 호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주제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페어리/ 키덜트 같은 문화적인 성향에서부터 쿨톤/웜톤 같은 피부색의 용어들, 그리고 문어가든/나스/코드글로컬러 등의 생소한 회사 이름들이 일상의 용어처럼 마구 흘러나왔다. 뷰티에 전혀 관심이 없던 40대 남성의 귀로는 도무지 무슨 맥락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핑크라는 이 색깔 하나에도 삶을 통째로 대입할 수 있고 그 욕구가 인위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과연 나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었을까? 그런 감정을 품으며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나의 런 소심한 걱정을 화끈하게 씻어주는 음성이 있었다.

A.   어릴 때부터 남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써야 된다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의 사고가 약간 그렇잖아요 남을 많이 신경 쓰는, 남들도 나를 많이 신경 쓰고 나도 남을 많이 신경 쓰게 되고. 근데 조금 지나고 보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한 번 사는 거고, 내 인생이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건데,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어 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분명히 내가 저들보다 십 년 이상은 더 살았을 텐데 왜 저런 생각을 못해보고 살았을까. 우리는, 특히 나같이 경직된 조직의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든 나보다 연륜이 높으신 분들에게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나보다 인생을 덜 살아온 사람에게서 오히려 더 강력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귀여운 사람들에게서.

Q.   다음 질문인데요. 귀여운 것들은 대부분 핑크가 빠지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항상 귀엽다 하면 핑크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는데 이 둘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A.   음... 귀여운 거에 핑크를 넣으면 그렇게 사랑스러워지잖아요. 근데 핑크에 귀여운 것이 합쳐지면 그 분위기가 더 배가 되고요. 그래서 이 두 개는 약간 되게 달달한 관계가 아닌가.
Q.   달달한 관계?
A.   네 달달한 관계 (웃음). 좀 더 사랑스러워지고 귀여운 게 배가 되고 이런 게 결국은 되게 달콤 달콤한 느낌이에요. 그래서 달달한 관계?
Q.   항상 귀여운 걸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뭐 다른 색을 좋아하실 수는 있어도 핑크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웃음)
A.   맞아요 맞아요.


전달


  이틀 동안 열 시간을 투자해서 타이핑 작업을 끝냈다. 수십 번을 들어도 그 단어를 잡아내지 못한 부분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꼼꼼히 작업한 파일을 의뢰인께 전달해 드렸다. 내용물을 받아보신 의뢰인께서는 대체로 만족해하시는 것 같았고 수고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여 주셨다.


  의뢰인은 비용을 송금하기 위해 나의 계좌번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핑크가 지배했던 그 이틀간의 나를 생각해 보았다. 작업을 하면서 귀를 쫑긋하고 때론 놀라며 웃음 지었던 순간들을. 그것은 분명 특정 금액의 숫자로 환산해 버려도 되는 가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의뢰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렀음을 실토하고 그러나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주셨기에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의뢰인과 이런저런 대화들을 더 주고받았다. 그 인터뷰 내용은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책에 실릴 예정이라고 알려주셨다. 본업은 따로 있으신데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혼자서 출판을 준비하고 계셨다.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시다 보니 일부 분량은 이렇게 외부에 의뢰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분이셨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분께서 한마디를 남기셨다.
  작업해 주신 감사의 의미로 책이 출간되면 한 권을 보내주시겠다고.


핑크 팔레트


  땀으로 흥건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그때의 작업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날로부터 3개월 뒤 의뢰인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책이 곧 출간될 거라 한 부 보내 주신다고 나의 주소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  기억하고 계셨구나...
  솔직히 책을 보내주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짜 그러실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고 아주 잠깐의 인연이고 서로 모른 채 살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충실한 만큼 자기가 뱉은 말에도 책임감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책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겉과 속이 핑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온통 핑크이지만 그 안에서도 분화된 서로 다른 핑크들의 조합으로 지루하지 않게 구성되었다. 책은 그렇게 핑크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인터뷰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내가 작업한 부분을 제일 먼저 찾아보았다. 그 여름의 음성들이 깨어나 머리를 톡톡 건드려주고 있었다. 받아 적기에 급급했던 문장들은 의뢰인에 의해서 간결하고 조화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목차 - 뒤로 갈수록 종이색이 짙어진다
내가 작업했던 다쇼님 인터뷰 부분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보통의 인연이 아니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감사하고 그 사람과의 인연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감각을 향해서도 그런 애정을 동등하게 뿜어낸다. 혼신을 다해 좋아할 수 있도록 자신 앞에 나타나 준 것 자체가 감사해서 그것을 완성된 무언가로 승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의뢰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그것을 멋지게 해내는 모습을 증명해준 사람이다. 


  나 또한 책 속의 그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끊임없이 발굴하면서 살아갈 거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마음만을 눈치 보면서. 단, 그것이 이기나 방종으로 흐르지는 않도록 제어력을 발휘하면서. 너무 코랄이면 안되니까.



귀여운 것과 핑크색을 싫어한다면 : 

숙면을 위한 충분한 두께가 필요하다면 : 

표지만 봐도 사랑스러운 책을 원한다면 : 

지금도 남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면 :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이전 11화 탁월한 사유의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