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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Dec 28. 2021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1

#최남선 #잡지

모던걸, 모던보이가 활보하는 경성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중요 시인들의 작품 속 키워드로 살펴보는 식민지 인문학




    특이하게도, 한국은 일본이라는 제국의 식민지 기간 동안 ‘최단시간’에 근대화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식민지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가 이뤄진 것(식민지 근대화론)인지, 일제의 수탈로 인해 발전을 방해받은 것(내재적 발전론)인지 ‘여전히’ 논의가 분분(紛紛)하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화 과정 중에 선구자 역할을 감당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변절에 큰 배신감을 느끼며, 그들의 업적을 ‘몰수(沒收)’해버리는 것에는 관대하다. 반면에 친일 행위를 했던 인물들을 ‘바로’ 평가하는 것에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이 모든 문제들이 난해하고 처치 곤란한 숙제처럼 계속 미뤄지고 있다.

    친일 행위를 했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은 일제 말기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는 상황 논리로 변명과 옹호를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친일 행위만 비난함으로써 마치 역사의 진실을 밝혔다는 듯이 만족하는 것도 옳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역사와 개인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지, 좌우 진영의 논리로 그들을 ‘인정’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20세기 전반기라는 역사의 단면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재조명을 통해 현재와의 연속성이 창조되고, 이를 통해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인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사유하기 위함이다.

    그와 같은 식민지 시대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그 중심에 있다. 그는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이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강요받던 시기에 일본을 통해 사상적 세례를 받은 1세대 신지식층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배운 신식 문화를 토대로 단군 신화를 비롯한 국학 연구의 선구자이며, 근대적인 자유시를 촉발(<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시켰고, 일본의 앞선 출판 인쇄술을 도입하여 근대 출판의 선구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소설가 유진오의 말처럼 “그는 동시대인으로부터 너무 앞서 있었기에, 그의 주위는 사면이 모두 처녀지었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신기한 것이었기에, 시대는 그에게 ‘무슨 하나’가 되는 것보다도 ‘모든 무엇’이 되기를 요구”했다.

    물론, 이번 글은 최남선을 옹호하거나 또는 비판하려는 목적보다는 최남선을 둘러싼 시대 전체를 조망(眺望)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우리의 지금 여기를 사유하는데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E. H. Carr의 말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간 계속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 할 때, 최남선과 우리는 동시대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번(除煩)하고, 이번 호의 키워드는 ‘잡지(雜誌)’다.


1. 잡지의 시초

    

    본격적으로 최남선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국 잡지의 시초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국은 개항(開港, 1876) 이후 개화기(開化期)를 맞이하면서 정부와 지식인들은 국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건립하기 시작했고, 1883년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이 정부 주도(통리아문)로 지어졌다. 일본에서 직접 기계를 들여와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가 간행되었다. 곧이어 1896년 민간인이 독자적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잡지(동인지)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신문이 대중적인 의미를 담고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상정했다면, 잡지는 공통의 관심사를 지닌 특정 집단을 상정하였으며 전문적인 ‘문필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1892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창간된 ≪Korean Repository≫는 한국 최초로 발행된 발간물이었으나, 독자층이 주로 외국인 선교사였으며 영어잡지였다는 점에서 한국 최초의 잡지로 보긴 어렵다. 이후에도 독립협회가 발간한 ≪대죠션독립협회회보≫(1896),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대죠선일본유학생회≫(1896),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 ≪협셩회회보≫(1898), ≪경향잡지≫(1906) 등이 여러 단체를 통해 발간되었으나, 매우 특정한 집단의 ‘회보(會報)’ 성격에 가까워 완벽한 잡지의 모습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 한국 민간인이 독립된 인쇄소를 통해 우리말로 발행한 최초의 근대 종합 잡지라고 평가되는 것은 바로 최남선이 1908년 신문관에서 발행한 ≪소년(少年)≫이다. ≪소년≫의 창간일이 11월 1일인데, 이 날을 현재까지 ‘잡지의 날’로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2. 신문관과 ≪소년≫    

 

    최남선은 일본 유학 중 1908년 6월 일본의 인쇄소 <슈에이샤(集英社)>의 최신식 인쇄 시설과 인쇄 기술자 5명과 함께 조선땅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서울 상리동(上梨洞, 현재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는 본가 건너편에 집을 얻어 위층은 편집실로, 아래층에는 인쇄소 ‘신문관(新文館)’을 차렸다. 서울 이동(梨洞, 현재 중구 장교동)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동시에 학부 관할의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는 부친 최헌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 최남선의 나이가 겨우 열아홉이었다.

    신문관에서 처음 출판된 인쇄물은 창가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1908년 3월 20일, 10전)였는데, 조연현 평론가에 따르면 최남선이 일본 유학 시 일본에서 기차 개통에 대한 노래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발행부수와 판매부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 달 만에 재판을 찍었다고 전한다.     


경부텰도노래 초판본 표지다. '철도'라는 말보다 '텰도'라는 말이 더 덜컹거릴 것 같다.


우렁탸게 토하난 긔뎍(汽笛) 소리에
남대문을 등디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난 바람의 형세 갓흐니
날개 가딘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뎖은이 셕겨 안졋고
우리네와 외국인 갓티 탓스나
내외 틴소(親疎) 다갓티 익히 디내니
됴고마한 딴 세상 뎔노 일웟네.
― 「경부텰도노래」 1,2연     

            

    두 번째로 신문관에서 발간된 인쇄물이 바로 잡지 ≪소년≫(A5판 84면, 14전)이다. 최남선이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 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 대한유학생회학보(1906)의 제작과 편집에 참여했는데, 그 경험이 ≪소년≫ 간행의 토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03년 일본에서는 최남선이 한국에서 발행한 잡지와 이름이 똑같은 잡지 ≪소년(少年)≫이 발행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소년≫, ≪소년세계≫ 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들이 큰 인기를 끌었고, 이를 몸소 보고 느낀 최남선이 한국에 돌아와 청소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잡지의 스타일을 차용하거나, 일본에서 출간된 서양 번역서를 재번역하여 ≪소년≫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최남선의 소년, 일본의 소년, 일본의 소년세계. 지금의 MZ세대처럼 '소년'이 당시의 유행하는 세대론이었나 보다.


    최남선의 ≪소년≫은 잡지 사상 처음으로 삽화와 원색 화보까지 곁들인 참신한 편집 기법을 선보였다. 아마 일본 잡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삽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그렸고, 최남선의 신시(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수록되었으며, <소년문단>이라는 투고란을 마련하였다. ≪소년≫의 발행 부수는 대략 2,000부 안팎이었는데, 1908년 당시 최고의 발행부수를 기록하던 ≪대한매일신보≫ 국문판과 한글판 모두 합쳐 8,000부 가량이었고,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이 3,300부, 2,000부 가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발행 부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 실적은 매우 보잘것없었다고 한다. 창간호의 독자 수가 6명, 2호가 14명, 8,9호가 30명이었고, 1년이 지나서도 270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판매 부수와 관계없이 ≪소년≫의 의미는 각별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평론 「육당 최남선론」을 썼던 이광수는 “이 조그마한 잡지는 그때에 있어서는 일종의 경전과 같이 애독이라는 것보다 존경을 받았다”라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다.

    이처럼 신문관과 ≪소년≫은 ‘1인 출판’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데, 최남선의 증언처럼 “스스로가 기자며 식자공이며,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인쇄직공이기도 했”다. 그리고 점점 신문관의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신문관은 편집부와 인출부(印出部) 그리고 판매부까지 함께 운영하는 출판 복합체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다른 출판사의 출판물도 인쇄하여 판매ㆍ유통하기도 하였으며, 신문관에서 발행한 잡지에 공란이 있으면 자사(自社)의 책 광고를 넣거나 근간 예고 광고를 넣기도 하였다. 또한 신문관 발행 서적에는 항상 ‘신문관 발행’이라는 문안을 적어 넣어 자신들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신문관은 판매 전략으로 우편제도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소년≫ 창간호의 판권 위에는 주문 규정이 수록되었는데, “대금은 아무쪼록 우편환으로 송치하시되 부득이하면 1전이나 5리(厘) 우표를 10에 1을 가(加)하여 송치”하라고 알렸다. 이 모든 시도가 한국 최초였다.

    1909년 2월 12일 신문관에서는 최남선이 직접 번역한 <걸리버 유람기>(조나단 스위프트, 최남선 역)가 발간되었는데, 표지에 ‘십전총서(十錢叢書)’, ‘소설류 제1책’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 유명한 ‘십전총서’다. 그 당시 책값은 대부분 50전 이내(인력거꾼 하루 임금)로 비쌌지만, 최남선은 ‘균일정가’ 10전을 내세웠다. 그리고 1913년 10월 5일에는 ‘육전소설(六錢小說)’이라는 이름으로 <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 등 3권을 발간하였다. 육전소설 역시 말 그대로 6전(국수 한 그릇)이라는 저렴한 가격과 휴대하기 쉬운 B6판으로 판매되었다. 특히 육전소설은 표지가 돋보였는데 소설의 한 장면을 삽화로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덩굴무늬와 꽃봉오리와 같은 화려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출판학자들은 십전총서와 육전소설을 우리나라 문고본의 효시로 꼽는다.


십전총서 심청전, 남훈태평가, 사씨남정기. 저 화려한 장정을 보라! 겁나 세련!!


   그러나 공교롭게도 <걸리버 여행기>가 출간된 직후 1909년 2월 23일 ‘출판법’이 공포되어 ≪소년≫은 1909년 3월부터 두 차례 압수를 당하고, 세 차례 발행 정지를 당해 결국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폐간에 이르게 된다. 이후 최남선은 해방 전까지 끊임없이 잡지를 발간한다. 반월간 ≪붉은 저고리≫(1913. 1.~1913. 6.). 월간 ≪아이들보이≫(1913. 9.~1914. 9.), 월간 ≪새벽≫(1913.~1916. 1.) 등이 그것이다. 이후 신문관에서는 1919년 2월 27일 오후 극비리에 최남선이 기초한 <3ㆍ1 독립선언서>의 조판을 짜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2만 1천 매 가량을 비밀리에 인쇄했다. 그러나 신문관은 그해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에 의해 전소되고 만다. 결국 최남선은 1922년 7월 신문관을 해산하고 그해 9월 ‘동명사’를 창립하지만, 발간하던 ≪시대일보≫가 실패하면서 그의 출판 사업은 몰락의 과정을 밟게 된다.          


3. 책 편집과 디자인  

   

    최남선은 일찍이 근대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일본 유학 중에 보게 된 일본 책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는 특히 책 표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책의 성격과 내용에 어울리는 표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안중식, 고희동 등 당대 최고의 화가로부터 작품을 받아 표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책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삽화를 본문에 삽입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소년≫(제4년 제2권, 1911)에 게재된 「로빈손(無人絶島漂流記)」에는 거친 풍랑을 헤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삽화로 보여주면서 ‘표류기’라는 의미를 더욱 부각하는 효과를 의도하기도 했다. 특히 서양 번역서들을 소개하거나 수록할 때 많은 삽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접하기 어려운 서구문화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과 동시에, 친밀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시각적 주목 효과와 텍스트로 가득 찬 지면의 지루함을 줄여주는 역할은 물론이다.      


<로빈손> 삽화다. 저 회오리치는 바닷물을 보라. 당시에는 엄청난 혁신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남선이 전통적인 문양이나 이미지 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최남선은 태극이나 호랑이 등의 한국적 소재를 적극 활용하여 책을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소년≫ 창간호의 ‘봉길이 지리공부(鳳吉伊地理工夫)’란 꼭지 중 「대한(大韓)의 외위형체(外圍形體)」라는 글에서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에 비유한 지도를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는 최남선이 일본 와세다대학 고사부 지리역사학과 입학하여 공부한 일이 있어 지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는 것과 관련지을 수 있다.


<봉길이의 지리공부>에 나온 호랑이를 닮은 한반도. 진짜 대박!!



    게다가 「대한의 외위형체」라는 글이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호응을 얻어 ≪황성신문≫에서 최남선의 글을 극찬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 호랑이 지도는 이후 폭넓은 지지를 받아 최남선은 각종 잡지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호랑이 이미지를 수록하였다. 1913년 ≪붉은져고리≫ 창간호, ≪신문계(新文界)≫ 창간호, 1914년 ≪청춘(靑春)≫ 창간호, 1925년 ≪새벗≫ 창간호, 1926년 ≪별건곤(別乾坤)≫ 창간호 등의 표지화에 호랑이 이미지를 넣었다. 또한 최남선은 태극 문양을 ≪소년≫ 표지와 내지에 즐겨 사용하기도 했다.



청춘 창간호, 아이들보이(10호) 표지, 아이들보이 본문이다. 컬러풀하다!

   

    또한 당시의 다른 서적과는 달리 신문관은 서적에 2도 혹은 ‘풀컬러’의 색채를 사용하여 시각적 주목을 의도하였다. 어린 아이들을 주독자층으로 염두에 둔 ≪붉은져고리≫, ≪새벗≫, ≪아이들보이≫ 등의 표지에는 화려한 색채의 이미지를 그려 넣어 관심을 유도했고, 본문 역시 화려한 색채의 삽화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아이들보이≫에서는 한국 최초로 잡지연재만화를 게재하였는데, <그림본>이나 <다음엇지>라는 코너에서는 이미지만 그려 넣어 다음 칸을 연상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아이들보이 10호 그림본과 <다음엇지> 코너. 쥐의 꾀에 고양이가 빠져들었다. <톰과 제리> 조선판이다.


   

    이처럼 최남선은 단순히 서구 지식만 소개하거나 자신의 사상이나 의견을 피력하려는 지면 확보에 머무르지 않고, 돈 주고 사서 볼만큼 가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선보였다. 그는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디자인 개념을 적극 도입하되, 그것을 동양적인 것, 조선적인 것으로 재해석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식민지 땅에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을 계몽(啓蒙) 하기 위한 절실한 고민이 그 바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남선의 그와 같은 노력이 현재에 이르는 출판 기술과 출판 시스템 등의 발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4. 왜 잡지였을까    

 

    부친 최헌규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신문관은 유지는커녕 애초에 설립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신문관이 계속 유지되고 잡지와 육전소설 등이 계속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지식인 최남선의 근대화를 향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인쇄매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일반 대중 특히 ‘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신문화 혹은 근대문학을 소개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당시 계몽을 위한 최대치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매체가 인쇄매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雜誌의 刊行하난 趣旨에 對하야 길게 말삼하디 아니호리라. 그러나 한마듸 簡單하게 할 것은 「우리 大韓으로 하야곰 少年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能히 이 責任을 堪當하도록 그를 敎導하여라.」 이 雜誌가 비록 뎍으나 우리 同人은 이 目的을 貫徹하기 爲하야 온갖 方法으로 써 힘쓰리라.
少年으로 하야곰 이를 닑게하라 아울너 少年을 訓導하난 父兄으로 하야곰 이를 닑게하여라.
― ≪소년≫ 창간호(1908) 창간사    

 

   ≪소년≫ 창간사에서 알 수 있듯이 늙고 병든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를 벗어나 젊고 건강한 ‘소년의 나라’가 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 ≪소년≫이고, 그것이 신문관의 설립 이념일 것이다. 최남선은 일제의 억압과 압수, 발행 금지 처분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류의 잡지를 꾸준히 발간하는데, 그것은 잡지가 가진 ‘힘’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잡지는 신문의 정보 유통과는 다른 차원의 심도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근대문화의 총아(寵兒)로 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발간할 수 있어 대중적인 확산이 신문보다 용이했을 것이다.

    결국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잡지문단’이 형성될 수 있었고, 잡지를 통해 “제일 못나고 제일 가난하고, 산천도 남만 못하고, 시가도 남만 못하고, 가옥도, 의복도, 음식도 남만 못한”, “철학도 발명도 예술도 없다”는 식민지 조선 땅에 ‘문예(文藝)’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광수는 조선에 문예라는 말이 정착된 것은 잡지에 배치된 ‘문예란’의 공이 큰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최남선 역시 ≪소년≫이나 ≪아이들보이≫ 등에 독자의 의견을 듣는 독자엽서 란을 만들었다. 창작자와 향유자의 분리가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으로 인해 창작자와 향유자가 동일해지는, 비로소 근대적인 문화와 문학의 장(場)이 마련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최남선이 끈질기게 잡지를 발간한 이유일 것이다. 잡지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잡지를 읽고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사람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세상이 바뀌길 고대(苦待)하는 아니, 이미 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잡지를 만들고 읽는 사람이 아닐까. 전 세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독(惟獨) 한국에 문학잡지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누구나 조국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그래서 건강한 나라가 되는, 최남선이 꿈꾸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을까.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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