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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an 18.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5

#임화 #종로

1. ‘조선의 발렌티노’ 임화 


    수려한 외모를 가진 ‘조선의 발렌티노’ 임화(본명 임인식)는 1908년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나 1929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이미 1928년 21세의 나이로 <유량>, <혼가> 두 편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지만, 임화는 흥행했다. “뜨거운 태양을 쏘이고 다니는 마부의 얼굴로서는 너무나 희다. 이번 실패는 자기의 역을 생각지 않고 미남자로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그 원인이 된 것이다. 또한 동작에 있어서도 선이 너무나 가늘고 표정도 심각한 곳이 없다.”는 당대의 영화평은 그가 얼마나 ‘훈남(美男子)’이었는지, 영화가 얼마나 흥행에 실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임화(1908∼1953)와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 1895~1926). 미남이시네요!


    그는 곧 연기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지만, 오히려 그가 유학생활 중에 배운 것은 연기가 아니라 문학이었다. 사회주의 연극에 심취하면서 ‘사회주의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물론 임화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에 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그가 주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다다이즘’이었다. ‘임다다(林DADA)’, ‘다임다(DA林DA)’라는 필명을 쓸 정도로 그는 다다이즘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당시 소위 ‘문필가’와 다르게 그는 조선의 고전문학에는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처음부터 서구문학에 경도되었다. 아마도 1925년 모친이 사망하고 집안이 파산하면서 ‘길거리 소년’이 된 그는 최신 유행을 보다 가까이서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화는 조타모(鳥打帽, 도리우찌)를 쓰고 본정(本町, 혼마찌)과 같은 남촌을 떠돌던 모던보이였다.

     

…(상략)…

암만해도 나는 회화에서 도망한 예술가이다

미래파―공적(功的)이고 난조미(亂調美)의 추구

그것도 아니다 결코 나의 그림은 미술이 못되니까―

하마터면 또는 1917년 10월에 일어난 병정의 행렬과 동궁(冬宮) 오후 3시와 9시 사이를 부조(浮彫)하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사랑할만한 ‘아카데믹’의 유위한 청년의 작품이―

오오 나의 그림은 분명히 나를 반역했다

그러고 새로운 나를 강요하는 것이다

삥기―냄새를 피우고 핏냄새를 달랜다

그리할 것이다 나는 이후로부터는 총(銃)과 마차(馬車)로 그림을 그리리라

― 「화가의 시」 부분 

    

    1927년 5월 스무 살에 발표한 등단작 「화가의 시」(<조선지광>)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총과 마차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 “새로운 나를 강요하는” 시대에 적극 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카프 도쿄지부의 이북만을 만나 강경론자가 되어갔고, 1930년 조선으로 돌아온 임화는 카프 경성지부 조직을 재정비하고, 1932년 마침내 ‘서기장’이라는 카프의 실질적인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길거리 소년이자 영화배우였던 그가 계급문학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된 그 짧은 몇 년의 시간. 그 짧은 시간이 그의 인생을, 그리고 한국문학사를 통째로 뒤흔들게 되었다.     


2. 예술을 무기로,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위하여

  

    임화가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전,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계급문학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있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1922년 9월에 조직한 ‘염군사(焰群社)’와 1923년 조직한 ‘파스큘라(PASKYULA)’가 그것이다. 염군사는 3.1운동 좌절로 인해 팽배하게 된 조선 문단의 낭만적 퇴폐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한편, 피착취 근로인민 대중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하기 위한 ‘신경향파문학’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단체 파스큘라는 동경에서 귀국한 김기진과 <백조> 동인들 일부를 주축으로 발족되었으며, 두 단체는 1925년 8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a Artista Proleta Federatio)로 통합되었다. 카프(KAPF)는 1935년 해체되기까지 계급문학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자임(自任)하였다. 특히 이들 프로문학 진영은 민족주의 진영을 ‘부르조아문학’으로 규정짓고, 이들과의 첨예하고도 치열한 논쟁은 이론과 논리가 없었던 기존의 조선문학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역동적인 문학사를 연출하였다.


카프 단체사진과 팔봉 김기진, 회월 박영희


    “일체의 전제세력(專制勢力)과 항쟁한다. 우리는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한 카프는 당대 문학이 식민지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과 생활상을 외면하고 현실 도피를 일삼았다고 비판하면서, 무산자 계급의 해방을 실현하는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투철한 목적의식은 카프 내부에서까지 논쟁을 일으키면서 2번의 ‘방향전환’이 촉발되었다. 

    김기진과 박영희 사이에서 벌어진 ‘내용 형식 논쟁’에서 카프의 주도적인 이론가로 자리 잡은 박영희는 1927년 ‘목적의식론’을 제기하면서 1차 방향 전환을 주도하였다. 김기진이 박영희의 소설 「철야」를 “추상적 설명”으로 비판하자, 박영희는 “프로문예는 무산계급과 노동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을 선동하고 지시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면서 계급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적 완성이나 미학적 형상이 아니라, 계급이념의 전파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카프 이전까지의 문학을 ‘자연발생적인 문학’으로 규정하고, 카프 이후의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문학’으로 규정하면서 카프의 이념과 노선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를 계기로 동경파라 할 수 있는 이북만, 임화, 권환, 김남천 등이 가세하게 되었고, 카프는 카프의 작가들에게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추고 투쟁의 전선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중에게 계급사상을 전달하고 민중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임무 하에서 쓰여진 ‘프로시’는 관념적 구호에 불과했고, 민중의 생활상과 괴리를 갖게 되면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카프 내에서 ‘대중화론’이 전개되면서 ‘전위의 눈으로 세계를 볼 것’을 창작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이제 카프의 작가들은 민중의 생활과 투쟁의 현장을 묘사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비로소 화자가 노동자 등의 민중과 밀착되기 시작했고 그들의 생활에서 비롯된 감정이 계급 모순의 인식 하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카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창작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이 논의가 전개되면서 1930년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채택하게 되었다. 2차 방향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김기진과 박영희가 한창 논쟁을 벌이면서 카프의 주도권 싸움에 매진할 무렵, 임화는 ‘혜성 같이’ 등장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카프시의 딜레마를 한 방에 해결할 작품으로 임화의 시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김기진은 현실과 괴리된 카프시를 비판하면서 시가의 대중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서사적인 소재를 취하고 쉬운 말로 써서 대중들이 이해하고 낭독하기 좋은 작품을 ‘단편서사시’라고 지칭하면서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를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들었다. 그러나 정작 임화는 이 작품을 발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의 내용이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속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다가선 결과임을 스스로 비판하였다.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 날 밤에

연거푸 말는 권연(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었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 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가버리지 않으셨어요

- 「우리 오빠와 화로」 부분     


    카프의 2차 방향 전환을 계기로 조직이 정비되고 ‘드디어’ 임화가 서기장이라는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만, 점차 내부의 갈등과 일제의 억압으로 인해 카프는 해산에 이르게 된다. 1935년 6월 카프 문학부 책임자인 김기진이 <카프 해산계>에 서명하면서 카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는 박영희의 고백(<동아일보> 1934.1.1.)처럼 예술을 무기로 삼으려 했던 카프는 예술 자체를 잃게 되었다.   

  

3. 혁명과 실패의 공간, 종로


    카프의 서기장이 되고, 카프가 해산하면서 월북에 이르기까지 임화는 절체절명(絶體絶命) 결단의 순간마다 시를 썼다. 특이하게도 그는 그 결단의 순간마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시적 화자를 내세웠는데, 「네 거리의 순이」(1929.1), 「다시 네거리에서」(1935. 7), 「9월 12일-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1947)라는 세 작품이 그러하다. 임화는 「네 거리의 순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프로시인’이 되었고, 「다시 네거리에서」를 쓸 무렵에는 카프의 해산과 이혼과 재혼 등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9월 12일-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 조선 공산당 재건 축하 시가행진이 있던 날의 감격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임화에게 ‘종로’가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임화는 선택의 기로(岐路)마다 종로에 서 있는 시적 화자를 통해 갈림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당시 서울(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의 조선인과 남쪽의 일본인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때 조선인 구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 종로였다. 또한 종로는 3.1운동과 각종 사회운동 등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으니, 말 그대로 종로는 조선인의 심장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종로 지도


“종로는 우리나라의 심장이야. 종로가 일본놈들에게 먹히면 우리 민족의 숨결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독립군들은 만주벌판에서 싸우고 있지만 우린 이 종로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단 말이야.”
“이것마저 빼앗기면 끝장이야. 종로 상가는 조선왕조 오백년을 지속한 어시가 아니냐.”
― 영화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 대사 중에

     

    식민지 종로에서는 청년단체와 민중운동단체들의 군중집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으며, 경성법원과 종로경찰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종로는 운동과 진압이, 저항과 감시가 동시에 일어난 곳이었던 것이다. 또한 종로는 조선인 투쟁과 조직의 거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선인의 구속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 임화도 1931년 8월 공산주의협의회사건으로 박영희와 함께 종로경찰서에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종로 우정국로에서 벌어졌던 대동인쇄주식회사 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을 배경으로 한 「네 거리의 순이」, 카프의 해산을 ‘종로에서의 퇴각’으로 상징하면서 썼던 「다시 네거리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 축하 행진이 있었던 종로를 배경으로 쓴 「9월 12일-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종로는 임화에게 고향(“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다시 네거리에서」)이자 전선(戰線), 혁명적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거점(“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네 거리의 순이」)이자 조선 그 자체였다.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 「네 거리의 순이」 부분 

    

    임화는 「네 거리의 순이」에서 지식인 오빠를 시적 화자로 내세워 여직공 누이동생 순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화자는 누이동생에게 감옥에 있는 애인으로 인해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청춘의 정열”을 행복으로 여길 것을 강권(强勸)하고 있는데, 여기서 임화가 노동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 조선인의 심장, 종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네 거리에서」 종로는 과거의 연대와 투쟁을 추억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임화는 카프가 해산되면서 지난 시절의 투쟁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과거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물론 시적 화자의 말을 빌려서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메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 때 내 불상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내지 않던가?

…(중략)…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상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 「다시 네 거리에서」 부분

     

    임화는 시적 화자의 말처럼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려 한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지난날의 투쟁을 회한(悔恨)으로 남기면서도 그 과거와의 결별을 고한다. 말 그대로 ‘퇴각(退却)’한 것이다. 종로와 종로의 청년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다시 현해탄을 건넌다. 물론 현해탄을 직접 건너지는 않았다. 작품으로 건너갔다. 그는 현해탄을 중심으로 한 바다 연작시를 발표하면서 시집 <현해탄>(1938)을 발간하였다. 그는 끝내 ‘현해탄 콤플렉스’(김윤식)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4. 파란만장한 삶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중략)…

원컨대 용기이어라.

― 「9월 12일-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 부분  

   

    조선공산당이 재건되면서 종로 네거리에는 조선공산당 1인자 박헌영의 연설이 울려 퍼지면서, 임화는 다시 ‘용기’를 갖게 된다. 물론 그는 군중의 행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다. 친일 행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말 사상보국연맹,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였고, 일제의 전시영화 대본을 교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에서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마다 널린/ 서울 거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임화는 예전에 빼앗겼던 종로를 수복(收復)한 ‘위대한 수령’을 따라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조국, 종로가 김일성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믿었고,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약하면서 ‘조선의 레닌’ 박헌영을 추종하여 마침내, 1947년 월북한다. 그리고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문화공작대’로 남한에 들어오지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자 다시 북한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1953년 남로당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임화는 당해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복 음모와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만약 임화가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지 않았다면, 혹은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신념이었던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그의 인생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어쩌면 흔들린 것은 임화가 아니라, 불완전했던 사회주의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 종로 네거리


    낙산의 집에서 보성고보를 가려면 종로 4정목이나 5정목으로 나와서 종로통을 걸어, 탑골공원을 거쳐, 종로네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공평동 견지동 쪽으로 등교했던 임화. 그는 종로에서 살았고, 종로에서 혁명을 이루고자 했으며, 종로로 돌아오고자 했다. 이념의 문제를 떠나, 그가 지키고자 했던 종로는 조선의 심장부이자 조선의 마지막 보루(堡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종로는 ‘정치1번지’가 되었다.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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