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항구
1. 고독한 거리의 시인, 오장환
오장환(1918~1953?)은 1933년 16세의 나이에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그는 월북하기 전까지 4권의 시집과 번역 시집 1권을 남겼는데, 특히 첫 시집 『성벽(城壁)』(1937)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극찬에 가까웠다. “길거리에 버려진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도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 “현대 지식인의 새 타입을 세웠다.”는 김기림의 평가와 함께 “보들레르와 베를렌느같이 고독한 심신으로 거리에서 다방에서 자나깨나 살아오던” 거리의 시인이자, “인생의 ‘페이소스’한 것을 느끼게 하는 놀라운 경지”, “현대시에 있어서 새로운 감각의 신경지를 개척”한 시인, “인간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청춘의 감상에서 오는 광채와 매력”을 지닌 시인으로 인정받으며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는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1930년대 후반 문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였고, 월북 이후에도 『붉은 기』(1950)를 출간하는 등 일제 식민지와 해방,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전개되는 한국사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시쓰기를 이어 갔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살펴보는 일은 곧, 당대의 (궁핍한) 현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함께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오장환은 첫 시집 『성벽』에서 식민지 현실을 비애와 퇴폐의 정조로 시화하였고 근대문명과 도시에 대한 ‘환멸’을 보여 주었다. 물론 뒤이어 모더니즘 경향에서 점차 향토적 서정의 세계로 변모해 갔지만, 일본 유학 후에 한창 작품을 써 갔던 1930년대 후반만큼은 그 어떤 시인보다 ‘데카당(décadent)’했다! 특히 그는 시집 『성벽』에서 ‘항구’와 ‘도시’에 몰두하여 근대성의 부정성을 돌올하게 드러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에서 시작되어 임화의 「현해탄」(1938)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현해탄 콤플렉스)이었지만, 오장환의 바다 이미지는 철저히 상실과 방황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피폐한 식민지 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姓氏譜
-오래인 慣習, 그것은 傳統을 말함이다
내 姓은 吳氏. 어째서 吳哥인지 나는 모른다. 可及的으로 알리워주는 것은 海州로 移舍온 一淸人이 祖上이라는 家系譜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李哥엿는지 常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恒常 家系譜를 創作하였고 賣買하였다. 나는 歷史를, 내 姓을 믿지 않어도 좋다. 海邊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利己的인, 너무나 利己的인 愛慾을 잊을라면은 나는 姓氏譜가 必要치 않다. 姓氏譜와 같은 慣習이 必要치 않다.
─ 「姓氏譜」 전문(조선일보, 1936. 10. 10)
전통을 강하게 부정하는 면모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 오장환의 작품 「성씨보(姓氏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가계와 혈통을 비판 혹은 조롱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기-부정과 역사-부정을 동시에 전개한다. 그에게 있어 전통은 극복해야 할 것 또는 단절해야 할 것이며, 이는 곧 인륜과 도덕의 파탄까지 이른다. 시인은 이를 어떻게 감당해 낼까. 이때 드는 회의와 방황은 어떻게 시로 형상화될까. 그가 본 현실, 그가 겪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라면, 특히 그가 자주 시적 소재로 썼던 ‘항구’를 통해 오장환의 슬픔과 패배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비애를 무역하는 항구
항구는 출발지이자 도착지, 국내(육지)와 해외(바다)가 만나는 통로 또는 접점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더욱 발달한 문명과 지식을 습득하고 교역하기 위해 항구를 통해 새로운 세계, 해외로 향했다. 반대로 특히, 서구의 문물과 지식이 항구를 통해 유입되기도 했다. 망망대해(茫茫大海)로 향하는 항구는 새로운 세계로 열려 있는 공간이자,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현실에서 항구는 일제의 조선 수탈의 현장이었으며, 조선 침략의 행로에 불과했다. 물론,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에서 ‘항구(港口)’ 혹은 ‘포구(浦口)’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이른바 ‘근대적인 것(모더니티)’의 탄생을 내포하는 주요한 상징이기도 했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 담론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항구는 식민지와 제국의 영향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장소이자, 제국주의와 식민지 토착민이 가장 먼저 접촉하는 곳이다. 다양한 인구가 집결하여 외래문화와 토착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며, 식민지와 제국, 전통과 근대 등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항구라는 공간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절망과 비애, 제국 일본에 대한 동경이라는 양가의 감정이 그 어디보다도 가장 먼저 형상화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조국의 상실 때문에 ‘국내’는 소거되고, ‘국외’에서 ‘국외’로 출발하고 도착하는 장소가 되어 버린 항구는 ‘무국적의 공간’이 되었다. 이제 항구는, 조선땅은 유랑하는 선원들처럼 순간적인 쾌락에만 몰두하는 타락과 비애의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오장환의 시세계에서 항구가 드러난 작품은 「해항도(海港圖)」(1936), 「어포(漁浦)」(1936), 「해수(海獸)」(1937), 「선부(船夫)의 노래 1」(1937), 「선부의 노래 2」(1937), 「여정(旅程)」(1941)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비애와 우울, 피로한 여정과 상실감으로 점철된 초기 시에서 항구는 전통적인 세계와 대비되면서 페이소스의 기원으로 설정된다.
폐선처럼 기울어진 고물상옥(古物商屋)에서는 늙은 선원이 추억을 매매하였다. 우중충한 가로수와 목이 굵은 당견(唐犬)이 있는 충충한 해항의 거리는 지저분한 크레용의 그림처럼, 끝이 무디고, 시꺼먼 바다에는 여러 바다를 거쳐온 화물선이 정박하였다. …(중략)…
망명한 귀족에 어울려 풍성한 도박, 컴컴한 골목 뒤에선 눈자위가 시퍼런 청인(淸人)이 괴춤을 훔칫거리면 길 밖으로 달리어간다. 홍등녀의 교소(嬌笑), 간드러지기야. 생명수! 생명수! 과연 너는 아편을 가졌다. 항시의 청년들은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이 술처럼 마신다.
─ 오장환, 「해항도(海港圖)」 부분(『시인부락』, 1936. 11.)
항구야
계집아
너는 비애를 무역하도다.
모진 비바람이 바닷물에 설레이던 날
나는 화물선에 엎디어 구토를 했다.
…(중략)…
야윈 청년들은 담수어처럼
힘없이 힘없이 광란된 ZAZZ에 헤엄쳐 가고
빨간 손톱을 날카로이 숨겨두는 손,
2-3.1920년대 인천세관 보세창고 인근에서 곡물검사하는 풍경
코카인과 한숨을 즐기어 상습하는 썩은 살덩이
나는 보았다
항구,
항구,
들레이면서
수박씨를 까부수는 병든 계집을-
바나나를 잘라내는 유곽 계집을-
…(중략)…
음협(陰狹)한 씨내기, 사탄의 낙윤(落倫)
너의 더러운 껍데기는
일찍
바닷가에 소꿉 노는 어린애들도 주워가지는 아니하였다.
─ 오장환, 「해수(海獸)」 부분(시집 『성벽』, 1937)
「해항도」에서 시적 주체는 “폐선처럼 기울어진”, “우중충한 가로수”, “충충한 해항의 거리”처럼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로 항구의 거리(港市)를 묘사한다. “풍성한 도박”이 난무하고, 주체는 그 세계 속에서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이 술처럼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을 본다. 더욱이 “홍등녀의 교소”에 “생명수”가 “아편”이 된다. 생명수라는 것이 치유와 생명력의 상징이라면, 이 상징도 곧 “홍등녀”에 의해 죽음을 의미하는 아편이 된다. 결국 표면적으로 볼 때, 홍등녀는 좌절과 타락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장시(長詩) 「해수」에서도 부정적 분위기는 계속 이어진다. 시적 주체는 ‘항구’를 ‘계집’이라고 호명하며, “비애를 무역”한다고 언술한다. 여기서 ‘해수(海獸)’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소꿉 노는 어린애들도 주워 가지는 아니하였다”는 진술을 통해 “더러운 껍데기”를 가진 바다 짐승을 주체 자신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씨내기’를 씨를 받기 위한 수컷이라고 이해했을 때, “음협(陰狹)한 씨내기, 사탄의 낙윤(落倫)”은 더할 수 없는 자기 부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 표면에 자의식을 가진 시적 주체의 목소리가 직접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멸에 가깝도록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은, 항구라는 표상공간에서 드러난 현실인식이자,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과 자신에 대한 부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일 것이다.
3.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 항구
오장환에게 항구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비판과 비극적 현실에 대한 좌절이 함께 드러난 공간이다. 그중 「해항도(海港圖)」와 「해수(海獸)」가 인천의 풍경과 높은 유사도를 보인다. 두 시에서 공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五色, 七色” 깃발을 휘날리는 “領事館”이고, 「해항도」에서는 “租界의 各가지 基ㅅ발”로 표현하면서 이곳이 ‘조계지’에 위치한 영사관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남의 나라 말에 能通하는 稅關의 젊은 관리”, “稅關의 倉庫” 등의 표현을 통해서도 1883년 우리나라 최초로 관세 업무를 담당했던 인천 해관이 설치되면서 활발한 국제무역을 보인 인천항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外人의 묘지”는 시적 공간이 인천임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인천 외국인 묘지는 1883년 창설되었으며,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최초 매장보다 7년이나 앞선 것으로 한국 외국인 묘지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저쪽 上頂엔 外人의 묘지”라는 표현이 인천의 것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적 항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4~5세기 신라와 가야의 해상무역 발달 때문에 동래포구(부산), 염포포구(울산), 원산포구(원산만) 순으로 항구가 만들어졌고, 더욱 근대적인 항구는 15세기 이후로 보는 편이다.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와 태종은 회유책을 써서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으나 무질서하게 정박하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태종은 1407년 동래의 부산포(富山浦)와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를, 1418년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해 이곳에만 정박하게 하는 왜관(倭館)을 설치하였다 . 그러나 이후 왜관은 역사의 여러 상황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왜관이 소재했던 부산이 가장 먼저 개항하게 되었다. 차례로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되면서 개항장 내에는 여러 외국인이 거주하고 활동했으며, 나라별로 다른 양식의 건물이 지어졌다. 특히 개항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개항 이후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의 편입이 급속도로 진행된다. 특히 인천은 부산이나 원산보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외국 상사들의 무역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여기에 일제의 식민 지배를 더욱더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더해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왜관이 존재하고 있던 부산에 더 많은 일본인이 진출하면서 부산은 대도시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일제 ‘본토’와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일제는 1905년 1월에 경부선 철도를 완공했고, 같은 해 9월부터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을 오가는 그 유명한 ‘관부연락선’이 취항하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관부연락선 총 수송 인원은 약 3,00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관부연락선과 경부선의 기점이 함께 존재하는 부산은 세계로 향하는 통로이자 동아시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의 물적 자원과 인적자원 등 일제의 수탈물들이 일제 본토로 빠져나가는 수탈의 경로이기도 했다.
4. 항구와 떠도는 식민지 지식인
근대 초기에 등 떠밀리다시피 개항하게 된 항구 인천과 부산. 당시 발표된 신소설 민준오의 「행락도」(1912), 박이양의 「명월정」(1912), 선우일의 「두견성」(1912) 등을 보면, 항구는 수적들이 재물을 약탈하거나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인신매매가 성행하던 공간이었다. 여성의 경우 유곽(遊廓)으로 팔려가거나 남성의 경우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나라 밖에서 매매되는 일이 흔했으며, 유곽과 조선 내부의 부정부패한 관리들이 모정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오명을 더하게 되었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빈곤한 조선인의 삶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조선인이 집중한 빈민지대에는 누추한 도로시설에 악취가 충천하는 비위생지대로 부산항을 전염병의 도시로 하는 직접 원인이 된다고 하야 …(중략)… 부산부의 노동자 생활은 극도로 공황상태에 빠저 잇어 크다란 사회문제로 되어 시급한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부빈생활에 크다란 위협이 된다.
─ 『동아일보』 1936. 3. 25.
얼굴이 검은 식민지의 청년이 있어
여러 나라 수병이 오르내리는 저녁 부두에 피리 부으네
낼룽대는 독사의 가는 혓바닥을 달래보네
병든 관능이여!
가러귀처럼 검은 피를 토하며
불길한 입가에 술을 적시고
아하 나는 어찌 세월의 항구 항구를 그대로 지내왔느뇨?
─ 「선부(船夫)의 노래 2」 부분(『자오선』, 1937)
“얼굴이 검은 식민지의 청년” 오장환에게 항구는 “잠재울 수 없는 환락”과 “병든 관능”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가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략 1936~1937년이었는데, 일본 유학 중에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1937)하고, 시집 『성벽』(1937)을 발간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난 항구는 일본 유학 중에 보거나, 일본을 건너갈 때 보았던 풍경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게 있어 항구라는 공간은 식민지 현실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부정과 자기 침윤이 함께 나타나는 공간이었다.
결국, 일제의 식민 지배로 모국(母國)이 사라진 시인은 출발과 도착이 무한히 반복되는 항구를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국적의 공간, 범죄와 빈곤, 타락과 환락이 가득한 항구라는 곳에서 시인은 무엇을 쓸 수 있고, 무엇을 꿈꿀 수 있었을까. 풍광의 아름다움 이면에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항구. 현재, 우리 또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