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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May 24.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10

#오장환 #서울

1. 검은 쇠사슬과 서울


   첫 시집 「성벽(城壁)」(1937)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세 번째 시집 「병(病)든 서울」(1946)에 이르면서 비애와 우울, 피로한 여정과 상실감으로 점철된 오장환의 시세계는 “비애를 무역”(「海獸」)하는 ‘항구’를 거쳐 “病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病든 서울」)로 이어진다. “오래인 休息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面刀않은 턱어리처럼 지저분”(「城壁」)했던 성벽이 가득했던 식민지 조선은 이제, “너이들은, 자랑스런 너이들 가슴으로/解放이 주는 노래 속에서/또 하나의 검은 쇠사슬이 움직이려 하는 것을……”(「8·15의 노래」) 보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 압제에서 벗어난 조선 땅은 비로소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할 줄 알았으나, 여전히 현실은 암흑 속에서 궁핍했던 것이다. 여기서, 오장환이 보았던 ‘검은 쇠사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어리며/막다른 노래를/노래 부르는 벗이어!”(「讚歌」)


시집 병든 서울. 조금은 병들어 보이기도 한다.


   오장환의 ‘검은 쇠사슬’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손과 발에…… 쇠사슬 느리고/억눌린 배ㅅ전에/스스로 노를 젓든/그 옛날, 흑인의 부르든 노래/어찌하여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다시금 부르는 것이냐”(「讚歌」)), 다른 하나는 병든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신(死神) ‘죽음’(“詩밖에 모르는 病든 사내가/三冬치위에 헐벗고 떨면서/詩한수 二百圓,/그때문에도 마구 써내는 이 詩를 읽어보느냐”(「强盜에게 주는詩」))일 것이다. 강도 앞에서, 병들었지만, 시밖에 모른다고 말하는 시인 오장환. 그는 검은 쇠사슬에 묶인 자신과 서울을 번갈아 보며 거침없이 시를 써 내려간다. 


―이것아, 어서 돌아가자

병든것은 너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생각만 하여도 무섭지않으냐

대궐 안의 윤비는 어듸로 가시라고

글세 그게 가로채었다는구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는 어머니

이제는 자식까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나는 그런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것은

이가슴에 넘치는 사랑이 이가슴에서 저가슴으로

이 가슴에 넘치는 바른 뜻이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모―든 이의 가슴에 부을길이 서툴러 사실은

그때문에 病이 들었습니다.

─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부분(「病든 서울」)


   늙으신 어머니가 아들이 있는 서울에 찾아오셨다. 병든 아들이 있는 서울 역시 병들었다. 서울이 병에 들어서 아들이 병든 것인지, 아들이 병에 들어 서울이 병든 것인지, 선후는 알 수 없다. 어머니는 ‘무서운 서울’에서 시골로 돌아갈 것을 아들에게 종용하고 계시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병든 진짜 이유를 모르신다. 아들의 ‘병’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고, 넘치는 사랑과 바른 뜻을 모든 이에게 전달하지 못해 병이 들었다. 아픈 것은 아들 자신이 아니라 서울이었고, 아픈 원인은 아들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었다. 병든 아들은, 병든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서울은 왜 병들게 되었을까.


2. 식민지 행정수도 경성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외국인들이 서서히 조선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인은 현재의 충무로 일대, 중국인은 현재 소공동과 북창동 일대, 서양인은 정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이곳들은 땅값이 다른 곳보다 저렴했고 조선인들의 주요 활동지인 종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외국인들이 정착하기 좋았다. 1885년 남산 일대에 일본 공사관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인 거주구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한국의 수도 서울은 조선왕조 오백 년 도읍지 ‘한성(漢城)’에서 식민지 행정수도 ‘경성(京城, けいじやう)’을 거쳐 지금의 ‘서울(Seoul)’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1월 총독부 고시 78호를 시작으로 1934년 7월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법이라 할 수 있는 ‘경성시가지계획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성개발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래된 도읍지 ‘한성’을 새로운 식민지 행정수도 ‘경성’으로 만들어 간다.

   일제는 종로-황금정(현재의 을지로)-본정(현재의 충무로)을 연결하는 남북도로와 을지로 중심의 방사망 도로망 등을 건설하면서, 경성은 기존의 구도심과 새롭게 형성한 신도심이 혼재하게 되었다. 관공서, 백화점을 비롯한 서구의 새로운 문명과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가 흘러들어 왔지만, 여전히 한편에는 소를 몰고 가는 ‘농투성이’와 머리에 봇짐을 진 여인네가 지나간다.

   자본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도 모일 수밖에 없으니,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된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일본인의 인구 역시 빠르게 증가했다. 일본인은 청계천의 남쪽인 ‘남촌’ 지역에, 조선인은 청계천의 북쪽인 ‘북촌’ 지역에 거주했다. 하지만 조선인과 동시에 일본인의 경성 유입이 빨라지면서, 분리되어 거주하던 두 계층은 같은 지역의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종로의 김두한과 혼마찌(本町)의 하야시 간의 대결이 볼만했던 SBS 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가 바로 그 상황을 아주 잘 보여 준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김두한과 하야시. 그 당시 정말 hot한 드라마였다! "바람처럼 스쳐가는 정열과 낭만아~"


   경성의 상업화가 빨라짐에 따라 일제는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을 더욱더 발전시켜 갔다. 비가 올때마다 질척거렸던 남촌을 정비하여 근대식의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일자리가 넘쳐났다. 조선인들조차 일자리를 찾아 남촌으로 흘러들어 갔고, 다양한 인구가 유입되면서 지역의 기반시설도 남촌을 중심으로 구축해 나갔다. 결국, 일제는 경성의 모든 곳을 정비하기보다는 선택적으로 ‘바로’ 발전이 가능한 곳만 도시 기반 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남촌 위주로 도시 정비 사업을 실시했고, 남촌과 북촌은 점점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1926년 남산에 있던 총독부를 북촌의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남촌의 여러 중요 시설들도 북촌으로 하나둘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일본인의 영역은 점점 북촌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인은 북촌의 종로까지 ‘접수’하면서 기존의 종로 건물을 2층으로 개조하거나 거리를 정비하면서 남촌에 뒤이어 북촌도 어느 정도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도시계획을 좀 더 살펴보면, 일제는 경성을 동부(청량리, 왕십리, 한강리 부근), 한강 이남(영등포, 노량진), 서부(마포-용강, 연희-신촌, 은평) 등 세 지역으로 나누되, 구도심부는 그대로 두고 일본인 거주지역인 신편입구역만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경부선, 경인선, 경원선 등 각 철도와 연계되는 지역은 ‘공업지역’으로 개발하고 나머지 지역을 ‘주거지역’으로 정하고, 주거지역 일부를 ‘고급 주거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경성시가지계획이 온전히 시행되는 1936년 4월 이후 경성은 시가지 면적이 이전보다 3배 이상 확대되어 ‘제국 일본 7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경성시가지계획 중 지역 개발 구상표


   “내일의 경성이 완성되어 가는 형세는 어느 것이 힘의 성장이 아니며 어느 것이 영화의 서곡이 아닌 것이 없다.”(『매일신보』, 1936. 4. 19.)는 말처럼 서울(경성)은 ‘메가시티’로서 끝없이 발전해 갔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수탈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극에 달하면서 화려한 외향과 뒤에는 피폐하고 비참한 조선인의 현실이 있었다. 휘황찬란한 아케이드 조명 아래 서구의 신식 상품과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북적이는 소비도시의 면모를 선보이던 경성. 그러나 경성의 뒷골목에는 빈민, 실업자, 매음, 마약 등의 궁핍한 민낯이 숨겨져 있었다. ‘개와 조선인은 출입금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붙었던 경성. 그래서 서울은 병들었던 것이다.


3. 병든 서울


八月 十五日밤에 나는 病院에서 울었다.

너의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天皇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고지가 들리지 않었다.

나는 그저 病든 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로아츰 자고깨니

이것은 너머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주먹을 부루쥐고

나는 病院을 뛰쳐 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줄 알었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기빨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萬世”로 노래 부르며

이것도 하로아츰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病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수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김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씨워주는 무슨 本部, 무슨 本部,

무슨 당, 무슨 당의 自動車.

그렇다. 病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잡놈 저잡놈

모도다 술취한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 싶이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미천을 털고보면 그런놈중의 하나이다.

나라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없는 우리들 靑春의 反抗은 이러한 것이었다.

反抗이여! 反抗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중략)…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죽는날,

“그곳은 넓은 하눌과 푸른 솔밭이나 잔듸 한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었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었다.

그리고 나의 反抗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하여 이냥 질척어리는 내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씰개

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씰개를 잡어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病든 서울」 부분(『상아탑』, 1945. 10.)


   「病든 서울」은 9연 72행의 장시(長詩)인데, 이 시는 1945년 『상아탑』 창간호에 발표되었다가 1946년 7월에 발간된 시집 『病든 서울』의 표제작으로 수록되었다. 『상아탑』에 발표된 작품 말미에는 ‘1945. 9. 28’이라는 창작 시기가 적혀 있는데, 시집 「病든 서울」의 작품 목록에는 ‘45. 9. 27’로 표기되어 있다. 즉, 이 시는 8·15 해방 당시 오장환의 상황과 감정을 술회한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 직후의 현실과 이를 바라보는 창작 주체의 복잡한 심리를 가장 집약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해방조선기념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를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인은 해방 당시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음을 앞두고 원통해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니, 병든 자신과 다르게 서울 거리에는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으며 밝고 희망찬 ‘새날’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러나 서울의 거리에는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정치인이 활보하고 있다. 한때 서울과 자신은 “이 잡놈 저 잡놈/모두가 술 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했었다. 고향과 나라 없는 원통함과 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해방의 기쁨이 찾아왔지만, 그것은 겨우 ‘하루아침’의 짧은 기쁨이었고, 도시는 여전히 병들어 있다.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 없는”,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나는 선술집”이 있는 서울. 

   시인은 “아름다운 서울, 사무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이라고 말한다. 병든 서울 때문에 시인 역시 병들었다. 서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시인은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 ‘절망에 문드러진 쓸개와 눈깔’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서울은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6연), “큰물이 지나간 맑게 개인 하늘”(7연)이 되기를 희망한다.

   일제의 오랜 침략과 수탈로 피폐해진 서울은 해방되어서도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같다. 병든 오장환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인은 서울이 언젠가 곧, ‘아름다운 서울’, ‘자랑스런 서울’이 될 것으로 믿으며,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 구름처럼 떠도는 것’(7연)을 고대한다. 시인은 “오래니 있었던 病室에서/나가는 사람들”은 “모두다 씩씩한 얼골로 나간다”(<入院室에서>)고 말하며, 병든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든 서울 역시 씩씩한 얼굴로 완치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4. 젊음이 외치는 노래


   오장환에게 서울은 자기 자신과 다름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키르케고르)이라 할 수 있는 ‘절망’에 시인도 서울도 벗어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다. 민족해방이라는 ‘새 세상’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궁핍한 서울, 병든 서울. 일제의 가혹한 수탈은 그렇게 회복 불가능하게 서울을 망쳐 놓았다. 외양만 화려하고 비대해졌을 뿐, 비참한 삶은 21세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북촌과 남촌처럼 강북이 있고 강남이 있으며, 격차가 있고 계층이 있다.


…(상략)…

아, 우리의 젊은 가슴이 기다리고 벼르든 꿈들은 어듸로 갔느냐

굳건히 나가려든 새 고향은 어디에 있느냐

이제는 병석에 누어서까지

견디지 못하야

술거리로 나아가

무지한 놈에게 뺨을 맞는다

나의 불러온

모-든 노래여!

새로운 우리들의 노래는 어듸에 있느냐

속속드리 오장까지 썩어 가는 주정뱅이야

너 조차 다 같은 울분에 몸부림 치는걸,

아, 우리는 알건만

그러면 젊음이 웨치는 노래야, 너또한 무엇을 주저하느냐

─ 「어둔 밤의 노래」 부분


해방 직후 을지로의 모습과 서울의 현재


   시인은 “우리의 젊은 가슴이 기다리고 벼르든 꿈”을 찾고자 한다. “굳건히 나가려는 새 고향은 어디에 있느냐”, “새로운 우리들의 노래는 어디에 있느냐” 하며, 새로운 서울을 꿈꾼다. “속속들이 오장까지 썩어 가는 주정뱅이” 서울은 과연 새로운 서울이 될 수 있을까. 오장환 시인은 그 가능성으로 “젊음이 외치는 노래” 즉, 새로운 공동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을 기다린다. 특정한 개인, 특정한 계파도 아닌 젊음의 공동체. 바로 ‘우리’. “곳곳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소리/아, 이 노래는/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다/성난 물결모양 아우성치는 젊은 사람들”(「讚歌」). 우리는 ‘검은 쇠사슬’을 끊고 우렁차게 물결치며 나아갈 것이다. 

   병든 서울은, 병든 세상은 곧, 나을 것이다. (끝)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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