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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봉 Dec 06. 2021

원래는 피아노곡만 들으려고 했었습니다

또 다른 미지와 환상의 세계로 향하여

오늘 오후였습니다. 그때는 무얼 하기에 이르기도, 늦지도 않은 시간이라는 3시쯤이었죠. 대학원 수업 발제를 준비하던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유튜브를 들어갔습니다. 무슨 영상을 볼까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라벨의 <볼레로>라는 곡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래간만에 플루트를 연습하셨는데, 볼레로의 처음 선율이 플루트로 진행되거든요. 그렇게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클릭했습니다.


이 곡은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곡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생 1~2학년 정도 되었을 때, 한창 유행한 만화 영화인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제곡이기도 하거든요. 디지몬은 시대를 풍미한 인기 만화였습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돌아오면, 학원에서 뭔가를 기다릴 때마다 이 만화를 시청한 기억이 나네요. 자연스럽게 <볼레로>는 뇌리에 선명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곡은 설령 디지몬을 알지 못하더라도 초/중/고등학교에서 꽤 여러 번 다루는 곡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음악 시간에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곡의 길이가 조금 긴 편에 속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무척이나 친숙한 곡을 오늘에야 와서 전체를 다 들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좋다~’ 이렇게만 생각하며 감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화면에 송출되는 오케스트라와 연주자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댓글 기능을 활용해서 각각의 마디에 어떤 악기가 연주되는지도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볼레로>라는 곡에서는 주선율을 연주하는 악기와 연주자가 연속적으로 바뀝니다. 초·중반부에는 악기가 한두 개씩 등장하다가, 나중에 후반부로 가서는 여러 악기가 한꺼번에 연주됩니다.


음악을 듣는 내내, 몇 달 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은 제가 한 번 리뷰로 남기기도 했던 『서울예고, 졸업 그 후』였지요. 거기에는 피아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전공했던 전문 연주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동안 피아노만 배웠고, 다른 악기에는 문외한이었던 저였기에, 신기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인지, 저는 클래식 음악도 피아노 연주곡만 위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라벨의 <볼레로>를 감상하면서, 각각의 악기와 연주자가 보이니까 기분이 상당히 묘했습니다. 한 사람이 악기와 함께 클로즈업이 되는데, 읽은 책 내용이 떠오르면서, 이 사람이 살아온 역사는 어떠했을까?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유 없는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어갔던 발자취,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추억들… 이런저런 상념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악기 하나씩 연주되는 게 참 깔끔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앞서 연주된 악기들이 점점 더 합쳐지면서 더욱 웅장한 음색을 냈습니다. 그건 또 그것대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동영상 아래에 있는 댓글을 읽으니까, 제가 그동안 여러 악기에 대해서 무지하였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각 악기가 이렇게 새롭게 다가올 수 있구나, 하나씩 알아가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동하였습니다.



영상을 보고 들으면서, 또 한 가지 인상 깊게 포착한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지휘자’입니다. 지휘자는 연주자 못지않게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음악을 이끌어갔습니다. 흔히 피아노 연주를 볼 때면 피아니스트의 감정 표현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지휘자는 자신의 음악적인 감정에 몰입하였습니다. 그의 표정과 자세, 손짓, 몸동작이 그것 자체로 하나의 ‘연주’로서 느껴졌습니다. 후반부에 고조된 지휘자의 웅장함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죠.


아무튼, 저는 이 곡의 절반을 들었을 쯤이었을까요. 그냥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마 저 또한 한껏 음악 감상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어렸을 적의 생각이 나기도 했구요. 정말 오래간만에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볼레로>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케스트라 단위의 연주곡은 처음으로 끝까지 집중해서 청취하였던 듯싶습니다. 오늘의 이 순간은 길이 기억에 남을 장면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지금까지 저는 앞으로 피아노곡만 쭉 들으면서 살아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피아노곡이 가장 친숙하기도 했고,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기도 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오늘부로 마음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피아노곡만 듣는 것에만 인생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피아노곡도 충분히 다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_-;) 향후에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처럼 듣는 클래식 음악의 장르를 좀더 넓혀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체험은 마치 저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아노 감상 및 연습기에 대한 에세이로 시작한 이 책의 결말이, 그것도 아주 장기적인 결론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끝맺을 거라고 상상하니……. 이것 참 설레는 일이 아닌가요? :)


Reference


https://www.youtube.com/watch?v=f4iMjjnXbT4

제가 감상했던 동영상이랍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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