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세게 얻어 맞기 전까지는
한 달 전 쯤, 제가 100% 홍보인 글을 하나 쓴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기에는 바로 직전 글이어서 다소 민망하기까지 하군요. 브런치에서는 다행히 대놓고 하는 이 홍보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저의 '남의집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빠르게 마감되었습니다. 초 인기폭발(!) 모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코로나19 거리두기 때문에 정원이 세 명밖에 안되어서이기도 해요.
그 날은 전날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어요. 좀 마음이 안 좋더군요. 아무래도 비가 오는 날에는 어디 나가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 보면 노쇼가 발생하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원래도 주차난인 집 앞 골목에는 전날부터 내린 비로 자리를 잡은 차들이 아예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질서가 없고 번잡해 보였습니다.
보통 때는 자랑스럽게 내놓고 이것저것 보여주고 싶어하는 우리 집인데도, 막상 이 곳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모임을 주최하게 되니 어쩐지 단점과 후줄근한 모습들만 보이는 겁니다. 게다가 비까지 오니 계단 턱마다 붙여 둔 미끄럼방지 테이프가 얼마나 없어 보이던지 :( 날씨가 좋아지면 당장 떼고 다시 붙여야지
남의집에서는 진행되는 날 대문이나 현관에 걸어둘 '남의집' 태그와 손소독제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송 일정이 다소 늦어지는 바람에 사용은 못하고 말았어요.
오시는 분은 세 분,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 상황과 관심도를 가진 분들이 오셨습니다. 호스트의 입장에서는 승인/반려가 가능하고, 게스트도 신청한 후 중도 취소가 가능합니다. (물론 당일 노쇼는 환불이 안되긴 하죠) 왠지 예전에 했던 '에어비앤비' 시스템이 떠오르는 부분도 있었는데, 암튼 남의집은 처음이다 보니 생각지 못하게 너무 떨렸어요.
모두 정각에 딱 맞춰서 오시는 바람에 - 놀라우리만큼 30초 상간으로 세 분이 입장;; - 황급히 차를 우려냈지요. 아무래도 차 모임이 아니다 보니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마리아쥬 프레르'의 '마르코 폴로'를 웰컴 티로 냈습니다. 차를 우리는 동안 간단한 자기 소개를 했고요.
게스트 분들 중에는 남의집을 경험해 보신 분들도 있었지만, 호스트인 제가 오히려 처음이다 보니 허둥지둥, 긴장해서 마음만 공연히 급했습니다. 타이슨이 그랬다고 했던가요?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세게 얻어맞기 전까지는 」
약간 제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진행하고 이건 몇 분 정도 해야지 등의 사전 계획이 있었지만 정작 게스트 분들이 오시고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아직 낯선 사람들 사이의 중간에 침묵이 도는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미리 얘기할 만한 자료를 준비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럤으면 귀한 일요일에 시간을 내신 분들에게 민망한 상황이 발생했을 것 같아요.
나름 열심히 준비했던 남의집 자료의 첫 페이지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하면서 PPT 자료를 만들다 보니 어느새 10페이지를 넘어가고 있더라고요. 강연을 할 정도의 지식이나 능력도 없지만 제가 겪었던 일들을 정리하기만 해도 꽤 내용이 많았어요.
제 수준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게스트 분들은 어떤 주제를 좋아할까 - 퇴근하고 자기 전까지의 몇 시간 동안 뚝딱뚝딱 만들었는데, 회사 일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어요. 회사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해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 회사에서 충분히 열심히 부려먹히고 있거든요 :3
그런데 게스트 분들 중에 이 쪽 전문가 + 직업이신 분이 한 분 계셨던 관계로 사실 제가 준비한 자료는 다소 낯뜨거워 간단하게만 넘어가고 - 그런데도 30분 정도 소요가 되었습니다 -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부동산과 단독주택 그리고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 이 집을 고치면서 얼마가 들었는가(!), 그리고 집 고치다가 남편이 울었다에서 나왔던, 현장에서 겪었던 힘듦도 나눴죠. 그런데 현직에 계신 분이 있으신 관계로 오히려 건축주가 아닌 상대 쪽의 의견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D
단독주택에 산다고 했을 때 제가 많이 들었던 코멘트,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하는 것들을 따로 정리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로 삼았어요. 실제로 이 페이지에서 가장 많은 질문과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간 것이 아무래도 부동산 이야기였는데, 사실 요즘 집값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원래 건물은 감가가 있어도 땅값은 지속적으로 가치가 오르는지라 크게 손해를 본다든지 하는 건 없긴 합니다. 잘만 구성하면 시세 차익 + 현금 흐름을 가져갈 수 있다고들 하죠.
쓰레기 처리나 무단 투기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었고, 나중에 주차와 정화조, 단독주택의 벌레에 대해서도 한 번은 써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여기에 내용은 없지만 길고양이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게스트 분이 꺼내 주셨죠.
그런데 사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코멘트의 구성을 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 사실 단독주택을 선택하고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객관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단점을 더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었어요. 하지만 단독주택을 고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하나 더 고치거나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차를 좋아한다고 소개글에 쓰신 걸 보시고, 한 게스트 분께서 '진년정산소종'을 선물로 가져오셨습니다! :) 저도 공부차에서 샘플 패키지를 구매해서 마셔 본 적이 있는데, 동양차를 구매하기에는 좋은 곳이었어요.
정산소종을 우려 마시면서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쯤 되니 단독주택 이야기에서 기타 취향에 대한 이야기, 저희 서재에 꽂힌 책들에 대한 이야기, 최근에 인상 깊게 본 공간들에 대한 칭찬과 비판, 심지어 게스트 분들의 전직 직장까지 알게 된 시간이었죠.
어딘가의 남의집 후기에서 봤던 바가 있어서, 예정했던 시간이 (원래 90분 정도 예정) 되었을 때 한 번 흐름을 끊고 가셔야 할 분들은 가실 수 있게 말씀을 드렸어요. 일정상, 혹은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서 가야 하는데 분위기 상 말을 못한 기억이 다들 있잖아요 :D 다행히 다들 더 계셔도 좋겠다고 하셨고, 그 때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좀 홀가분해지더군요. 초보 호스트로서 부담이 컸었나 봐요.
게스트 중 배려깊으신 한 분이 제 대신 모임을 주도해 주셨고, 저는 '포트넘 앤 메이슨의 얼 그레이'를 끓여냈습니다. 그렇게 한 세 시간 정도 진행을 했던 것 같아요.
잘 들어가시라는 배웅 문자를 보내고, 찻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후루룩- 피로가 몰려 왔지만 동시에 즐거운 기분도 오래 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 게다가 취향이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죠 :) 한 분께서 '단독주택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DNA가 공통적으로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게 취향의 어떤 큰 꼭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