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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01. 2020

냉장고의 오래 묵은 차, 버려야 할까

어느 구석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같은 차에 관하여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엄마의 냉장고 - 특히 냉동실은 무척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일단 음식이 비닐에 싸여서 그 곳에 들어가면 쉬이 잊혀졌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 음식이 나오는 것은 비정기적으로 진행되던 '냉장고 청소' 때가 되어서였다. 보통 대청소를 시작하던 봄 즈음이 가장 많았는데, 비닐에 싸여 있던 그 음식들은 수많은 얼음 가루에 뒤덮여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되어 나오기 일쑤였다.


그 물건들 중에는 중국이나 일본, 유럽에 다녀온 친척들이 선물한 차도 끼어 있었다. 특별히 차에 취미가 없던 우리 가족은,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귀한 차를 빨리 마시지 않고 고이 냉장실에 모셨다. 그리고 오랜만에 꺼내 본 차에는 '유통기한은 4년 전에 지났습니다'로 보이는 'Best Before'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하지만 냉장고에 있었고 뜯지도 않았는데,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남극 얼음 속에서 매머드 사체도 멀쩡히 발견되었다잖아 냉동실은 남극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동시에 그래도 유통기한이 이렇게 지났는데 먹었다가 배가 아프거나 하면 어쩌지?  걱정도 드는 것이 당연하다.


2020년의 어느 날, 이런 홍차 틴이 발견된다면!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해서 그 날짜의 자정을 넘기면 바로 음식이 상해 버리거나 못 먹을 음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유통기한이 약간 지난 음식을 먹어도 멀쩡한 경우가 꽤 있기도 하다. 말 그대로 '소비재의 유통이 법적으로 가능한' 기한이라고 보면 될 듯.


차의 유통기한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상미기한'인데, 일본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다.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기한'으로 보면 거의 정확하며, 'Best Before(BBE, BE)'는 상미기한의 개념에 가깝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이 'Expired'인데, 이 쪽이 왠지 어감은 좀더 무섭다.


그러나 일반 음식과 다르게, 차는 '최상의 향과 맛을 낼 수 있는' 점을 포기한다면 못 마실 것은 없다.


오히려 백차의 경우엔 오래 되면 숙성하면서 특유의 맛과 향, 건강에 좋은 성분이 나온다는 의미로 '1년은 차, 3년 지나면 약, 7년 지나면 보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이차는 오래될수록 맛과 향이 풍부하고 깊어진다고도 알려져 있다.


즉, 차의 상미기한이 지났으니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엄마의 냉동실에 들어 있었던 정체불명의 물건이 된 차의 경우엔, 사실상 맛과 향이 거의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차는 주변의 향기를 엄청나게 잘 빨아들이는 재료로, 냉장고에 보관하면 냉장고 냄새를 싹 흡수해 버린다. 김치 냄새가 나는 신개념 홍차


가향하는 방법 중에 '음화'라고 하여 꽃더미 근처에 차를 두는 방법이 있는데, 재스민 차를 만들 때 많이 쓴다. 주변의 냄새를 잘 빨아들이는 차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참고글: 비천무, 설리의 말리꽃차)


호박과 당근을 블렌딩했다는 크리스틴 다트너의 가향차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상미기한이 패키지에 나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산화도가 낮은 녹차가 홍차보다는 좀더 상미기한이 짧다. 그리고 가향차의 경우엔 향을 입혔기 때문에 상미기한이 좀더 짧은 경우가 많았다. 가향차는 향이 날아가 버리면 마시는 즐거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스트레이트 티보다는 빨리, 열심히 소비하는 것이 좋다.


사실 틴을 열어서 향을 맡아 보면 대강 느낌이 온다. 이건 먹어도 되겠다, 먹어봤자 맛이 없겠다 등등. 영 향이 별로다 싶으면 녹차의 경우 따뜻한 물에 우려서 세안용이나 목욕용으로 사용해도 좋다. 다른 차의 경우엔 오래된 커피를 활용하는 것처럼 냉장고 냄새 빨아들이는 용도로 써도 괜찮다.


그러나 그 전에 빨리 마시는 게 제일 좋다. 물론 우리 집에도 마실 차들이 가득 쌓여 있긴 하지만.


※ 브런치북도 읽어 주시면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tea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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