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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19. 2020

《비천무》, 설리의 말리꽃차

가끔은 기억되고 더러는 잊혀진, 어느 무녀의 정한

최근에 서점을 지나다가, 보는 순간 왈칵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안녕, 나의 순정》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처럼, 그 제목은 나를 옛 시절로 잠시 되돌려 놓았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순정만화 - 로 흔히 일컬어지는 여성 작가의 만화들 - 를 읽고 또 모았던가. 크지도 않은 집에 만화책 1,000권 가량을 모으고 있는 고3 입시생 딸을 보면서 엄마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중 얼마나 많은 만화책들이 그냥 버려지고 기부되고 더러는 잊혀졌던가. 


많은 작가의 작품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위 '최애' 작가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김혜린, 유시진. (일본 만화까지 가면 리스트가 좀더 늘어난다) 


그 중 김혜린은 당시에도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80년대 운동권을 풍미한 《북해의 별》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고 그 이후 여러 잡지에 연재하면서 《비천무》와 《테르미도르》, 《불의 검》을 연달아 히트시켰던 유명 작가였다. 


그 중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작품인 《비천무》는 2000년에 영화화되었는데, 그 영화가 남긴 것은 김희선과 신현준이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은 것과 이승철이 부른 주제가 '말리꽃'뿐이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 한족의 자객과 몽고족 여인의 사랑을 그린 《비천무》에서, '말리꽃'은 여주인공 '설리'의 상징이다. 설리가 말리꽃을 좋아하고, 남주인공 진하에게 선물받은 적도 있으며, 설리에게서 말리꽃 향이 난다는 묘사도 종종 나온다. 


김혜린의 여주인공은 전반적으로 다소 청승맞은 데가 있어서 딱히 좋아한 캐릭터는 없지만 (난 항상 조연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설리는 꽤 자기 주장도 강하고 자기 길을 스스로 개척하며 싸움도 잘 하는 그런 여성이다. 


'비천무'의 두 주인공, 유진하(좌)와 타루가 설리(우)


'말리꽃'이라고 해서 무슨 꽃인가 궁금했었는데, 바로 '재스민Jasmine'이다. 중국 식당에 가면 가장 많이 내 주는 차가 바로 재스민 차인데 - 아니 그렇게 생각하니까 뭔가 감흥이 깨지는데? - 그만큼 중국인들이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블렌딩 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북 지방, 베이징에서 자주 마시는 차로 알려져 있다. 정작 널리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때부터라고 하니, 《비천무》의 시대에는 말리꽃차가 그리 많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녹차를 비롯한 다양한 베이스 차 근처에 재스민 꽃을 두어 그 향을 배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음화'라고 불리는 과정인데, 가향차를 만드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다. 

그냥 꽃 몇 송이 두는 것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양의 꽃을 사용하는데, 그 과정도 여러 번 반복한다고. 그래서 은은하고도 진한 향기의 고급스러운 재스민 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장 최고의 재스민 차는 4-5월에 생산된 녹차에 8월의 재스민을 가향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조합으로 만든 차를 마셔본 적은 없어서, 비교군이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재스민차 자체가 매우 매력적인 가향차임에는 분명하다.


이승철의 '말리꽃'을 우연히 들을 때마다, 재스민 차를 마실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김혜린의 《비천무》를 떠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두 번 다시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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